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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87/128)

78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자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것 같았지만, 그의 눈에는 여전히 차가운 광기가 넘실대고 있었다.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은 그에게 반항해서는 안 된다는 막연한 확신뿐이었다.

다음 순간 그의 품이 내 몸을 옥죄고 있었다.

흥분해서 거칠어진 숨을 감당하지 못한 채로, 그는 내 몸이 터질 만큼 세게 자신의 품 안에 욱여넣고 있었다.

그는 나를 그렇게 안고 중얼거렸다.

“내가 알아. 넌 갈 데가 없어. 내 곁 말고는.”

“공작님…….”

그는 내 뒷머리를 자기 가슴에 꼭 누른 채로,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쓸데없이 부지런한 거야. 너 때문에 성내의 빈집을 다 사들여야 했단 말이다.”

“…….”

숨이 찼다. 그는 나를 풀어주었지만, 나는 내 머리를 쓰다듬는 남자를 바라보며 망연히 서 있었다.

“너는 내게 빚을 졌어. 나를 결혼시켜서 내가 너를 떳떳하게 가질 수 없게 만들었어. 그러니 너도 빚을 갚아. 나를 떠나지 마, 아리엘사. 아니, 이방인.”

❄❅❄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할 수도 없다.

나는 카이런 공작이 메리지 블루로 일시적으로 이성을 잃은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런 말을…….

하지만 제대로 사고할 능력을 잃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두려웠다. 감당할 수 없었다.

나 혼자라면, 오래 쌓여 온 나의 감정은 꾹꾹 눌러 모르는 척할 수도 있었다. 구근 뿌리처럼 땅속에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지만 흙을 덮어 꼭꼭 밟아 모르는 척할 수 있었다.

아니,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외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 혼자의 일방적인 마음이 아니라, 그가 나를 원하는 눈빛을 마주 보면서는 그럴 수 없었다. 그런 것은 내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우연인 척 길에 떨어진 목재처럼, 지진처럼.

나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카이런 공작이 앞으로 무슨 일을 벌일지 머리로 두려워하는 것과 동시에 그런 그를 보며 내가 마음의 둑을 허물고 그를 정말로 사랑하게 되어버릴까 봐 나는 가슴으로 겁에 질렸다.

그래서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에게서, 내 감정에서 달아나야 했다.

나는 주방 하녀에게 몰래 부탁해 헤리어트를 만찬장에서 불러냈다.

컴컴하고 외진 복도에서 나를 발견한 헤리어트는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아리엘사 양 무슨 일입니까, 하하하.”

그는 적당히 취해 있었고, 나를 몹시 반가워했다.

“그러지 않아도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원래는 중부에 도착해서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북부의 가을밤 정취가 뜻밖에 운치가 있어서-”

“-그거요.”

“네?”

“중부로 지금 떠나고 싶어요. 그러니까, 드세일 씨는 결혼식에 참석하셔야 하니 약속대로 저를 데려다주실 수는 없겠지만, 마부를 주선해주실 수는 있죠? 저는 지금 떠나고 싶어요.”

“아리엘사 양,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팔을 가볍게 붙잡으려 했고, 나는 카이런 공작이 나를 억세게 붙잡았던 것이 떠올라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헤리어트는 내가 자신을 치한처럼 여긴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나는 그를 다독일 여유가 없었다.

내 머릿속에는 카이런 공작의 눈에 맴돌던 불안한 빛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는 이 상황을 오래 참아왔고, 그 인내는 오늘 밤 끊어진 퓨즈처럼 망가진 게 틀림없었다.

내 예감은 지금이 아니면 나는 하르펠을 영영 떠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프라일 씨, 제발…….”

“아리엘사 양, 말씀해보세요, 무슨 일이 있으신 거면 맹세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내가 수상해 보인다는 것은 알았지만 머릿속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둘러댈 말 같은 것은 더더욱 생각해낼 수 없었다.

“됐어요! 그럼 저 알아서 방법을 찾겠어요.”

내가 발끈하며 돌아서자 헤리어트가 내 팔을 붙잡았다. 내가 쏘아보자 그는 내 팔을 조심스럽게 놓고 말했다.

“반 시간 후에 후문으로 나오십시오. 마차를 준비해놓겠습니다. 제가 함께 가드릴 수는 없게 되었으니 편지를 써서 마부에게 전해놓겠습니다. 중부의 제 지인이 아리엘사 양을 맞이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고마워요, 드세일 씨.”

나는 안도감이 너무 커서 그를 덥석 끌어안고 말았다.

그리고 그를 복도에 내버려 둔 채 방으로 돌아왔다.

나는 다급하게 짐을 쌌다. 내 짐이라야 별것 없었다. 대부분의 옷이 중부에서 입기에는 너무 두꺼울 것이어서 가져가는 의미가 없었다.

“이건 어쩌지…….”

나는 열쇠 달린 서랍에 고이고이 보관했던 들소뿔 브로치 상자를 들고 잠시 고민했다.

방에 놓아두고 갈까? 그러기에는 누가 훔쳐 갈까 봐 겁이 났다. 그렇다고 가져가기에는 내게는 과한 선물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하르펠가의 수사슴이 새겨진 그 브로치를 지닌 한 카이런 공작도 내 곁을 떠나지 않은 듯 느껴질 것 같아 두려웠다.

이 모든 게 그를 떠나기 위한 노력이니까…….

내가 브로치 상자를 손에 쥐고 망설이고 있을 때, 체이어스가 들어왔다.

나는 재빨리 브로치 상자를 치마 뒤로 숨겼다. 하지만 싸고 있던 가방은 어쩔 수가 없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는 노크도 없이 들어왔고, 짐을 싸느라 헤집어진 방 꼴을 보고 전혀 놀라지도 않았다. 불길했다.

“뭐 해?”

“옷장 정리를……. 곧 계절이 바뀌니까…….”

체이어스는 나를 냉담하게 내려다보았다.

“아리엘사.”

“네……. 체이어스 경.”

“나는…… 후회해.”

“네?”

체이어스는 나를 향해 한 발 다가섰다. 그러나 한없는 거리감을 담은 눈으로 말했다.

“나는…… 너를 너무 오래 내버려 둔 걸 후회해. 너는 한 번도 욕심 많은 아이가 아니었으니까, 언젠가는 네 마음을 알아서 정리할 거라고……. 그런 기대를 한걸.”

그는 음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겠구나.”

나는 체이어스가 하는 말을 한마디도 더 듣기 싫었다.

나는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깐 채 말했다.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목소리가 떨렸다.

“이만 돌아가 주세요. 방을 좀 정리해야 해서, 돌아가 주세요, 체이어스 경.”

“이 가방 싸서 어디로 가려고?”

“…….”

“헤리어트 드세일이 사둔 중부의 집은 환불받기로 했어. 그자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 혹시 다정한 약속이라도 했니? 하긴, 남부 남자들은 여자에게 다정하다지. 입에 발린 소리도 기가 막히고.”

그는 내게 고함을 지르지 않았을 뿐, 마치 바람나서 도망가려는 아내를 붙잡은 남자처럼 느리게 분노하고 있었다.

“체이어스 경…….”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고 저절로 코를 훌쩍였다.

헤리어트가 준비한 마차는 이제 나를 데리러 올 수 없었다. 그는 헤리어트를 추궁해 다 알아낸 것이다.

헤리어트는 공작의 시녀를 몰래 빼돌려서 루엘라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역시 악당은 악당이라며 그를 원망했다.

“너무해…….”

나는 다리가 풀려 그대로 바닥에 앉고 말았다. 체이어스는 나를 내려다보며 꺼칠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빌어먹을 사다리. 나는 사실은 요즘의 내가, 변한 네가 더 좋았어……. 하지만 이렇게까지 변해서는 안 되는 거야.”

“체이어스 경!”

체이어스는 성큼성큼 다가와 내 몸을 번쩍 들더니 침대에 던졌다.

그리고 내 몸에 이불을 둘둘 감아 어깨에 멨다.

❄❅❄

“풀어주세요! 열어주세요!”

나무 문은 아무리 두드려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귀를 대어보아도 사람이 오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단지 잠긴 나무 덧창 밖으로 바람이 휭휭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체이어스가 나를 내던지고 간 이곳이 어딘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이 석실은 돌 벽돌이 그대로 노출된 채로 침대만 덜렁 놓여 있었다.

그래서 감방 같았지만, 두꺼운 담요와 커다란 화로, 장작까지 잔뜩 들여진 걸 보면 감방이라기엔 사치스럽기도 했다.

문제는 여기가 어딘지 하는 것보다 내가 여기서 나갈 수 있는가였다.

나는 담요를 몸에 말며 멍하니 내 상황을 곱씹었다.

카이런 공작이 미쳐버렸다.

이제 나는 그와 거래할 정보가 없어서 협상할 힘이 없었다. 나는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그들의 결혼생활의 위협이었다.

카이런 하르펠이 미쳤다.

고작 엑스트라 시녀를 원한다니. 내일 운명의 상대와 결혼할 사람이…….

마침내 다가오는 발소리에 나는 잔뜩 긴장해 벽으로 붙었다. 식판을 들고 나타난 사람은 역시 체이어스였다.

“…….”

나는 그 자리에서 체이어스를 바라보기만 했다. 내 눈앞에서 식판을 든 사람은 지금까지 내가 알아온 체이어스가 아니었다. 완전히 낯선 딴사람 같았다.

그는 전에도 나를 보트 창고에 가둔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때와 완전히 달랐다.

“저한테 이러실 순 없어요.”

나는 내 목소리가 떨리며 나오는 게 싫었다.

그러나 그는 못 들은 척 행동했다. 실내를 둘러보고 식판을 놓을 자리가 없자 침대 끝에 놓았다.

“있어.”

“…….”

“공작님 명령이니까.”

갑자기 다리가 풀리는 것 같았다. 나는 비틀거리며 침대로 가서 앉았다.

“뭐라고요……?”

“그 헤리어트 놈, 주는 것 하나 없이 밉더니 운도 참 좋지. 결혼식만 아니었으면 놈은 바로 지하로 직행했을 거다.”

그는 나를 뚫어지게 보며 나직이 말했다.

“눈이 돌아버린 공작님은 마지막 마물 토벌전 때 이후로 본 적이 없다, 아리엘사. 네가 공작님께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나 있어?”

“흑……. 지금 절 보세요. 공작님이 저를 가두셨다면서요!”

벌컥 높아진 체이어스의 음성은 화가 나 있었다.

“정말 이해 못 하는 거야?”

“도대체……!”

내가 뭘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고 소리치려 했을 때, 체이어스는 갑자기 다가와 내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그의 팔뚝을 때렸지만, 그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내 입을 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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