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86/128)

77화

그는 사나웠고, 꼭 삐뚤어진 소년처럼 화를 내고 있었다.

나는 울컥 올라오는 서러움을 참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거짓말 아닌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저 지금 작별 인사하는 거예요. 공작님.”

“…….”

그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벽난로에서 가까운 소파 끝에 걸터앉아서, 팔꿈치를 괴어 몸을 앞으로 숙인 채 나를 노려보았다.

마치 자신이 지금 너무 흥분해 있기 때문에, 그렇게 거리를 벌려야 내가 안전한 것처럼.

나는 무릎으로 조금 기어가 그의 앞 바닥에 앉았다. 벽난로에서 고작 몇 걸음 멀어졌을 뿐인데 온기가 훅 사라졌다.

이것이 그의 곁을 떠난 느낌이구나.

순간 그런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나 나는 미소를 지어야 했다.

그를 위해서라도.

아니다. 나를 위해서.

나는 다정하게 말했다. 이제는 내 감정을 그에게 꽁꽁 숨길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이별이란 그렇게 홀가분한 것인 모양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를 다정하게 꼭 안아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한 가지만 신경 쓰시면 돼요. 일 년에 한두 번은 반드시 공작 부인을 친정에 보내세요. 레오르트 후작의 입김이 끼칠까 봐 싫으시겠지만, 그러지 않으면 공작 부인이 우울증에 걸려서 위독해질 거예요. 첫 아이 낳은 후에는 가라고 해도 안 갈 테니까 걱정 마시고요.”

나는 그렇게 그의 삶에 마지막으로 개입했다.

원작에서 카이런 공작은 남부에서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영지를 되찾는다. 그래서 루엘라를 데리고 북부로 돌아가려 했을 때, 헤리어트가 루엘라에게 이간질을 한다.

귀가 얇은 루엘라는 헤리어트가 일러준 대로 카이런 공작에게 요구한다.

“진정한 사랑의 징표인 사막에서만 피는 꽃을 선물해주세요. 그러면 공작님을 따라갈게요.”

카이런 공작은 죽음의 사막을 건너야 하는 그 요구가 후작의 음모인 것을 알면서도 묵묵히 떠난다.

아, 눈물.

루엘라가 그것이 카이런 공작을 사막으로 몰아내어 죽이는 일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은 그가 사막에서 조난된 후였다.

그녀가 헤리어트의 속삭임에 넘어간 것은, 단지 그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다는 여자로서의 아이 같은 열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로맨스 판타지 소설이 비극으로 끝날 수는 없지 않는가.

부하들과 떨어져 혼자 모래에 휩쓸려 간 카이런 공작은 작은 오아시스의 나무 그늘에서 정신을 차린다.

머리가 새하얀 노인이 그에게 묻는다.

“저 꽃을 따러 왔나?”

“그렇소. 내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바칠 거요.”

카이런 공작이 떨리는 눈으로 물가에 핀 꽃 한 송이를 바라보며 쉬어버린 목소리로 대답했을 때, 노인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그 꽃을 소중하게 따서 사막을 혼자 걷다 극적으로 부하들과 재회한다.

루엘라는 눈물을 흘리며 자기 어리석음을 용서해달라고 빌고, 카이런 공작은 나는 너를 원망한 적이 없었노라며 그녀에게 키스한다.

루엘라도 그때 철이 많이 들었다.

그로부터 아버지를 버리고 하르펠령으로 온 루엘라는 낯선 북부의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우울증에 걸린다.

카이런 공작은 레오르트 후작이라면 치를 떨며 그녀가 친정에 가지 못하게 했는데, 그래서 증상은 더 심각해진다.

거기에 그녀가 첫 아이를 임신하면서 임신 우울증과 향수병이 겹쳐 앓아눕는다. 의사는 이대로면 그녀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하지만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

카이런 공작은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주기 위해 그녀를 북쪽 땅끝의 설산으로 데려가고, 죽어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자책과 무력감에 미쳐간다.

그러던 어느 날, 카이런 공작은 그녀와의 추억을 곱씹다 그가 사막에서 따온 신비한 꽃을 떠올린다.

그리고 짠. 그 꽃을 달인 차를 마시고 그녀는 기적적으로 회복한다.

그녀는 첫아들을 낳은 다음에는 아기에게 푹 빠져서 우울증이고 향수병이고 걸릴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카이런 공작은 열심히 동생 만들기에 돌입한다. 그것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었기 때문이다.

흠흠.

“그게 네 예언인가?”

원작 말미의 바람직한 묘사를 떠올리던 나는, 카이런 공작의 냉소적인 목소리에 풋 웃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그에게 예언자였나 보다. 차를 열심히 타는 예언자.

“네. 제 마지막 예언이에요. ‘그로부터 두 사람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제 세상의 음유시인은 그렇게 말해요.”

카이런 공작은 나를 가늘어진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미친 소리를 뱉는 여자를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다 말해버리면, 너는 이제 내게 이용 가치가 없어.”

나는 그에게로 다가가 그의 무릎에 내 뺨을 얹었다. 그의 몸이 단숨에 경직되는 것이 느껴져서, 조금 웃음이 나왔다.

나는 다정하게 말했다.

“이야기는 완성되었어요. 저는 처음부터 이야기의 그늘 속에 있던 사람이었으니까 저도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것뿐이에요. 결혼식이 끝나면 떠날게요, 공작님.”

그가 내 이마에서 머리카락을 걷어내어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내가 그의 무릎에서 머리를 들자, 그는 다시 내 턱을 자기 무릎에 놓게 했다.

그의 손길은 몹시 조심스럽고 다정했다. 또한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조금 소심해진 듯한 그가 낯설어서, 나는 조금 웃음이 났다.

“늘 궁금했어. 너는? 너는 이 이야기에서 바라는 것이 없나?”

나는 처음으로 그의 눈빛이 낯설다고 생각했다.

웃고 있는데 눈물이 찔끔 나서, 나는 얼른 손으로 닦아냈다.

“그런 건 의미가 없어요. 저는 주인공이 아니니까요. 공작님은 모르실 거예요. 공작님이 얼마나 찬란한 사람인지……. 주인공은 두 분이세요. 공작님과 루엘라 프라일 양이요.”

“…….”

“공작님도 틀림없이 느끼셨을걸요? 그분이 특별하다는 걸요.”

카이런 공작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돌렸다. 그도 그녀의 아우라를 감각하고 있었기에 부정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인제 보니 진짜 떼쟁이네.

“들소뿔 브로치는 돌려드릴게요. 그렇게 귀한 걸 제가 가질 수는 없어요. 그건 하르펠가의 사람이 가져야 하는 물건이에요.”

그는 상체를 조금 숙이더니 내 턱을 한 손으로 감싸 쥐었다. 살기라고 착각할 만큼 나를 사납게 노려보면서.

턱의 압박감은 통증이 되고 있었다.

“공작님?”

“그래서, 보고 싶은 꼴은 다 봤으니, 내 삶을 휘저으며 이제는 실컷 즐겼으니, 내 곁을 떠나겠다. 그 말인가?”

그의 눈에 맴도는 것이 광기라는 걸, 나는 그에게 몸이 딸려가며 깨달았다.

그는 내 팔을 거칠게 붙잡아 당겼다. 서로의 코끝이 닿을 거리였다. 그의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가까이서 보는 것은 해를 마주 보는 것처럼 위험하게 느껴졌다.

“너는 이 세계의 모든 걸 알고 있잖아.”

나는 겁을 먹어 소리쳤다.

“제가 언제, 저는 일부밖에 몰라요. 그건 공작님이 가장 잘 아시잖아요!”

“그래. 네가 이 세계의 미래를 정말로 알고 있었다면, 내가 너 말고 다른 여자를 원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쯤은 알았을 거야.”

“공작님……?”

그의 눈은 위험하게 빛났다.

“너는 아무 데도 못 가. 내 곁에서 단 한 발자국도 못 떠나.”

나는 당황하고 겁에 질린 채로 말했다.

“저는, 저는 이제는 공작님께 쓸모없는 사람이에요.”

그는 내 혼란을 꺼트리듯 다시 내 뺨을 감싸 고정한 채로 말했다.

“듣지 못했나? 내가 너를 원한다고 말했어.”

“아…….”

정신을 차리고 싶었지만, 아득해서 눈앞이 흐려지기만 했다.

“루엘라 프라일? 그래, 세상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는 없을 거야. 남자의 영혼을 녹여놓는 재주를 가졌지.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녀에게 손끝도 대고 싶지 않아.”

“공…….”

“내가 그녀를 위해서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를 생각하면 단 한 가지만 떠올라. 체이어스 말이야.”

나는 겁에 질린 도중에도 혼란스러웠다.

그는 이를 갈듯 말했다.

“체이어스를 불러서 그녀가 원하는 건 네가 알아서 해결하라고 명령하고 싶단 말이야. 하지만 너를 떠올리면…….”

그는 내 눈을 바짝 들여다보다 말했다.

“체이어스 자식에게 수천 번 꺼지라고 말하고 싶었어. 너에게 술을 사주지도 말고, 위로하지도 말고, 춤을 청하지도 말고……. 그런 건 내가 해주면 되는데……. 그랬어야 하는데.”

“공작님, 미치셨어요…….”

나는 당황했다. 나야말로 미쳐서 뱉어서는 안 되는 말을 뱉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비웃음을 흘렸다.

“그걸 이제 알았나? 내가 차 따위나 마시려고 너를 매일 곁에 뒀다고 생각해?”

“공작님은 차를 좋아하시…….”

“웃기지 마. 내 성격이 개 같아서 차를 마셔야 한다고 한 건 너야. 나는 그때 겁을 먹었어. 너마저 나를 싫어하면 누가 나를 좋아해줄까…….”

나는 아리엘사의 그 기억을 갖고 있었다.

카이런 공자가 심술을 부렸을 때 어린 아리엘사는 울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흑흑, 공자님은, 흐흐흑, 정말, 성격이 나빠요. 그건 공자님 몸이 차가워서 그런 거니까, 흑, 차를 많이 드셔야 해요!”

꼬마 아리엘사의 울음은 카이런 공자에게 큰 충격을 준 것이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남자아이들을 그에게서 떼어낸 것은 그에게 상처가 된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고개를 마구 저으려 했지만 카이런 공작이 붙잡은 얼굴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힘은 점점 세어져서 우리의 코끝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그의 팔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차가 지긋지긋해. 나는 단지 너를 곁에 두고 말을 걸고 싶었던 거야. 나를 안정시킨 건 허브 따위가 아니라 너였어!”

연이은 충격에, 나는 이제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는 눈에 초점을 잃은 나를 풀어주었다. 그의 손가락이 내 뺨을 쓱 훔쳐주는 감촉이 느껴졌다.

그러나 카이런 공작은 잔인하게 말했다.

“그 여자가 주인공이라고 했나? 그러면 주인공 대우를 해주지. 그 여자가 있어야만 북부에 봄이 오고 풍년이 든다면 나는 북부를 위해 완벽한 남편이 되겠어. 대신 그러한 운명을 내게 가져온 너는 내 곁에 머물러. 싫다면 다리를 잘라버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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