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너는 아무 데도 못 가.
시간은 무상하게 흘러갔다.
다시 찾아온 북부의 가을은 어느 때보다 농익어 있었다. 연중 태반이 흰색으로 뒤덮인 이곳에서, 누렇게 익은 곡식들이 들판에서 넘실대는 풍경은 사람을 들뜨게 했다.
여주의 출현 때문인지, 올해는 작년을 뛰어넘는 풍년이 될 것이라고 했다.
작년에도 대풍이라고 했지만 지진 때문에 수확을 제대로 못 했으므로 올해가 최고의 풍년이라는 말이 맞았다. 이대로 한두 해만 더 풍년이 들면 하르펠은 예전의 풍요를 빠르게 다시 쌓아 올릴 수 있었다.
그사이 나는 위약금 재테크를 중단하고 헤리어트를 통해 중부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북부를 떠나는 것은 못내 망설여졌지만, 하르펠에서 내가 집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북부를 아주 떠나는 것이 내가 카이런 공작을 위해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떠나지 않았다.
최근 나를 대하는 루엘라의 태도는 눈에 띄게 호의적으로 변했지만, 이따금 카이런 공작이 나를 확인하는 듯한 시선을 보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를 속이는 기분 때문이었다.
그러는 사이 추수가 시작되었고, 결혼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하르펠 성 내에는 매일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챕터를 앞둔 어디쯤에 있었다.
모든 이야기는 끝을 맺기 마련이니까.
❄❅❄
결혼식 이틀 전, 결혼식에 참석하러 온 각지의 귀족들은 속속 하르펠 성에 도착했다. 성문 앞이 고급 마차들로 붐비는 모습은 하르펠에서 보기 드문 것이었다.
카이런 공작은 손님 접대로 바빴고 당연히 나도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루엘라는 새 옷을 고르고 치장하느라 바빴다. 신부는 결혼식 날까지 손님들을 만나지 않는 법이었으므로, 그녀는 지금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을 하는 중이었다.
레오르트 후작은 결혼식에 불참하기로 했는데, 여전히 바람나서 가출한 딸에게 화가 난 아버지를 연기하는 중인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밖에다 댈 핑계였을 뿐, 아마 그의 성격이라면 결혼식을 무사히 마친 다음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없게 되었을 때 나타나서 카이런 공작에게 장인 노릇을 하려고 들 게 뻔했다.
하지만 우리 카이런 공작이 그런 데 넘어가려고.
이제 그를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이 세계에 없었다.
‘두 사람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누군가가 그렇게 속삭여주어야 할 때였다.
추수철 직후에는 성내가 떠들썩하긴 하지만, 결혼식을 앞두고 만찬까지 열리니 성안이 더 들썩들썩한 기분이었다.
저녁에는 손님들을 위한 만찬이 열렸다. 카이런 공작이 거기 참석하는 동안 나는 내 방과 집무실을 정리했다.
나는 밤이 되어갈수록 더 커지는 아련한 성내의 소음을 들으며 차 상자를 정리했다.
오래된 것은 바꾸고, 빈 것은 채워 넣고.
내가 없으면 루엘라가 새로 뽑은 시녀를 시켜 지긋지긋한 그 차 상자를 내다 버리게 할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었다.
내가 대기하는 책상은 치울 것도 없었다. 수틀과 곁에 걸어둔 외투만 가지고 나가면 그만이었다.
그러니까 이 방 안에 내 흔적이란 없었다. 그동안 매일 출근했는데도 말이다.
나는 그 깨달음에 조금 놀라서 집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이제 곧 카이런 공작의 곁을 떠날 것이라는 사실보다, 그의 곁에 남을 내 흔적이 이토록 얕고 초라하다는 사실이 내게 깊은 상처를 내는 듯했다.
나는 조금 웃고 말았다.
내 흔적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저 벽난로. 추위를 잘 타지 않는 카이런 공작이 늘 나를 위해 불필요하게 불을 피워둔 벽난로는 분명 내 흔적이었다.
언제나 타서 재가 되는 중이라 그렇지.
추억을 확인하듯 벽난로 앞에 퍼질러 앉아 손을 쬐고 있을 때, 그가 들어왔다.
만찬이 이렇게 일찍 끝나다니.
하지만 나는 이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결혼식 전날에 찾아가 말하려고 했는데, 마침 둘이서 말할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카이런 공작은 서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여기 있지?”
“…….”
이상했다. ‘그러게요, 제가 좀 꾸물거렸나 봐요.’라고 대답하려고 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언가가 내 배 속에서 목소리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문득 아리엘사의 기억이 떠올랐다.
꼬마 아리엘사를 괴롭히는 남자아이들을 쫓아준 카이런 공자는, 아리엘사가 꼭 지금처럼 감사 인사를 머뭇거리자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려 사라졌다.
그러나 카이런 공작은 몸을 돌려 떠나는 대신 벽난로 앞으로 와서 내 곁에 섰다.
그는 좀처럼 불을 쬐지 않는 사람인데.
그가 열기가 퍼지는 것을 막아주어서인지 내게로 향하는 열기가 조금 더 강해진 기분이 들었다.
나는 천천히 심호흡하고 꼬리를 놓쳐버리기 전에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공작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
오늘 밤은 이상했다.
나는 그가 분명히 ‘닥쳐’라고 말할 것이라서 얼른 내 말을 이어야지 했는데, 그는 침묵하고 있었다.
마치 내가 말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아니, 그는 어쩌면 내가 떠난다고 말하면 바로 ‘그렇게 해.’라고 답하려고 기다리는 중인 걸까?
그런 생각을 하자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거기에 배 속이 뜨뜻해지는 기분이 들어 나는 몸을 조금 웅크렸다.
눈물이라도 글썽거리게 되면 내가 너무 비참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나는 필사적으로 기분을 바꾸려 노력했다.
마지막 인사는 가볍고 산뜻하게. 웃으면서.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힘을 내어 불쑥 뱉었다.
“저 이제 갈래요.”
그는 ‘그렇게 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숨결이 조금 거칠어지며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냄새로 그가 술을 조금 마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만찬이 그에게 퍽 괴로운 자리였다는 사실도.
그에게서 나는 옅은 술 냄새와 잘 들리지 않는 숨결 같은 것으로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동안 이런 식으로 내 속마음을 알아챘던 것일까?
“저는 원래 이방인이잖아요. 그러고 보니 요즘은 절 그렇게 부르신 적이 없네요.”
“흥.”
그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낮았다.
“오늘은 너도 나도 피로한 날이었다. 가서 자.”
그는 내 말을 못 알아들을 사람이 아닌데.
나는 한번 심호흡을 하고 말을 이었다.
“저, 찻집을 열고 싶어요. 공작님 시녀 노릇은 이만 은퇴하려고요.”
“…….”
그가 여전히 ‘그래, 그렇게 해.’라고 말하지 않아서, 나는 자꾸만 막히는 목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새 시녀는 공작 부인께서 준비해두셨을 테고, 앞으로 북부는 모든 게 순조로울 테니까-”
“-모든 게 순조로워?”
그의 말투가 베이도록 날카로워서, 나는 조금 주눅이 든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벽난로 불치에 일렁이는 그의 찌푸린 모습은 평소보다 몇 배나 무섭게 보였다.
“루엘라 공작 부인이 계신 한은 북부는 늘 풍요롭고 평화로울 거예요. 올해 소출이 얼마나 늘어났는지 보세요.”
“아니, 작년이 더 좋았어.”
그가 꼭 떼를 쓰는 것처럼 들려서, 나는 그를 의아하게 다시 올려다보았다.
하긴 그의 말이 맞았을지도 모른다. 지진이 다 망쳐놓았기에 의미 없는 일이었지만.
카이런 공작은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그래서 어디로 가게, 살 집은 있나?”
“음…….”
“흥. 네가 날 떠날 수 있을 리가-”
“-집은 구해두었어요.”
카이런 공작의 눈동자가 동요하는 것을 나는 선명히 볼 수 있었다. 세상에 그를 동요시킬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생경했다. 그리고 그가 나 때문에 동요한다는 사실에 조금 가슴이 아팠다.
그는 목소리마저 살짝 떨렸다.
“내 앞에 거짓을 고하고 멀쩡하기를 바라다니. 나를 등 떠밀어 결혼까지 시켰으니, 이제는 거짓말도 뭐도 멋대로 해도 될 것 같나? 은퇴라니, 가당치 않은 소리를 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