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세상에, 내가 여자 속옷을 훔친 도둑이라니.
내가 말을 잃고 멍하니 선 사이, 카이런 공작은 나로부터 시크하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벽난로로 걸어가 가운을 던져버렸다.
원래 거미줄 소재라서 그런지, 가운은 마치 마술사들이 공중에서 태우는 종이처럼 한순간에 화르륵 타서 사라졌다.
카이런 공작은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루엘라에게 물었다.
“지금도 화가 나셨소? 지금은 화를 낼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데.”
“공작님!”
나는 루엘라의 새된 음성을 처음으로 듣고 조금 놀라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카이런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매우 화가 남’에서 ‘화가 나서 조금 돌았음’의 경계를 넘어간 눈빛은, 실은 조금 광기가 도는 것처럼 보였다.
루엘라도 그것을 느꼈는지 일어나 문 쪽으로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그녀는 뒷걸음질 치면서 말했고, 그래서 방 안의 풍경은 좀 더 기이해졌다.
“어째서, 어째서 도둑질한 하녀를 그냥 두세요? 어째서 아무렇지도 않게…….”
카이런 공작은 완벽하게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그래서 더 소름 끼쳤지만.
“첫째. 그녀는 내 하녀가 아니라 시녀요. 둘째. 그녀는 내 곁을 지키다 태양의 곁으로 간 하르펠의 방패의 딸이오. 다시 말하면 그녀는 존중받아야 하지. 이것들은 이미 지적했을 텐데?”
그것은 상당히 묘한 화법이었다.
‘너도 하르펠이 될 생각이라면 내 시녀를 존중해라.’
루엘라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말이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멍한 상태로, 북부 이들이 첫째, 둘째하고 말하면 그것을 반드시 심각하게 여겨야 함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카이런 공작이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남자라는 사실도.
“셋째. 나는 거짓말을 용납하지 않소, 루엘라. 이것은 앞으로 두 번 지적하지 않을 테니 그리 아시오.”
루엘라는 입술을 깨문 채 중얼거렸다.
“공작님은…….”
루엘라는 달아나듯 나가버렸다. 물론 밀라도 다급히 따라 나갔다. 그녀의 마지막 표정은 내가 본 중 가장 덜 아름다운 것이었다.
집무실 안의 인구밀도가 낮아지자 나는 조였던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체이어스가 말했다.
“환기할까요?”
“그래.”
나는 체이어스가 집무실의 모든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걸 보며 천천히 걸어가 소파에 앉았다.
카이런 공작은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이었고, 나는 이제야 가운을 태운 냄새가 조금 메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째서…….”
나는 말을 하다가 말았다.
그의 행동이 내가 누명을 썼다는 걸 알았기 때문인지, 도둑질은 했지만 루엘라와 밀라가 나대는 꼴이 보기 싫어서였는지가 분명하지 않았다.
“공작님, 그래도 태워버리신 건 좀……. 그게 얼마짜린지나 아십니까? 저도 그런 게 있다는 소리만 들었지 처음 봤습니다.”
창을 열고 돌아온 체이어스의 말에 카이런 공작은 코웃음을 쳤다.
“저것이 솜털처럼 가벼운 주제에 그렇게 튼튼하답니다. 저 천으로 아머 내피를 만든다면 환상적일 것 같지 않습니까?”
“불화살 한 방에 다 타죽게?”
“흠. 그렇군요.”
체이어스는 안타깝다는 얼굴을 했고, 나는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제가 안 그랬어요!”
두 사람은 그제야 내가 방 안에 있는 걸 깨달았다는 듯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카이런 공작이 툭 뱉었다.
“알아.”
“어떻게…….”
그러자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너, 나를 뭐로 보는 거냐.”
체이어스가 피식 웃었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아리엘사가 도둑질 같은 걸 할 리가 없다는 걸 어떻게 모르냐는, 그런 얼굴이었다.
이상한 불쾌감과 안도감이 함께 느껴졌다. 그리고 이 남자들이 조금 좋다는 기분도.
카이런 공작은 짧게 말했다.
“차.”
“네, 공작님!”
“나도.”
“네, 체이어스 경.”
나는 달콤한 옌델을 타서 내갔고 나도 한 잔 마셨다.
왠지 차를 마시니 모든 게 다 해결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방금까지 도둑 누명을 썼던 작은 재판이 이렇게 말 없는 티파티로 끝날 줄은 몰랐는데, 나쁘지 않았다.
창밖으로 북부의 조용한 오후가 언제나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
내가 방으로 돌아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체이어스가 문을 두드렸다.
“아까 많이 놀랐냐?”
“그냥 좀…….”
나는 머뭇대며 말했다.
“체이어스 경은 처음부터 제가 그러지 않았다는 걸 아셨어요?”
“네가 그런 쓸모없는 천 쪼가리나 훔치고 다닐 애냐? 그리고 네 범죄는 그 가짜 편지로 끝나야 한다는 걸 모를 만큼 멍청하지 않으니까.”
살짝 겁을 주는 것 같기도 했지만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그가 들어온 문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카이런 공작의 선물도 있고 해서 방은 꼭 잠그고 다녔는데, 밀라가 들어갔다는 것을 보면 열쇠 자체가 허술하거나 그녀가 열쇠를 손에 넣었다고 생각해야 했다.
사실 가운을 내 방에서 발견하는 장면을 본 사람도 없기 때문에 방에 들어오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찜찜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제 방 열쇠, 바꿔주실 수 있어요?”
“당장 사람을 보낼게.”
“아니, 당장은 말고…….”
나는 말을 잇기도 포기하고 침대에 앉아버렸다. 이제는 내가 뭘 원하는지 아닌지도 분간하기 힘들었다.
“너 진짜 프라일 양에게 약하구나. 이 지경인데도 화를 못 내? 나한테는 성질만 잘 부리더니.”
“제가 언제 경에게…….”
체이어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이제는 더듬어가기도 힘들었다.
체이어스는 미간을 좀 찌푸리더니 말했다.
“괜찮아?”
“넵! 괜찮습니다.”
내가 허리를 쭉 펴고 군인처럼 답하자 그는 침대 위의 내 곁에 앉았다.
“나는 남부인이 싫어. 설명할 수는 없는데 그렇다.”
논리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심정적으로는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었다.
카이런 공작과 가신들이 남부에서 어떤 고생을 했는지는 마치 전생의 기억처럼 그들에게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도 몰랐다.
나는 한숨을 쉬며 속으로만 웅얼거렸다.
“그런데 남부인이 내 식구를 건드리는 건 더 싫어.”
“…….”
뭐랄까, 좀 감동적이었다. 세상 정 없는 인간이 그래도 나를 식구라고 부르며 챙겨준다는 데 마음이 따뜻해졌다.
“악!”
체이어스는 내 머리에 꿀밤을 놓고 일어났다.
“하지만 내가 가장 싫어하는 건 당하고 말도 못 하는 북부인이다, 아리엘사. 열쇠 갈러 사람 보낼 거니까 자지 말고 기다려.”
“흐이…….”
나는 머리를 문지르며 체이어스를 째려보았다. 그러나 미워할 수는 없었다.
조금 있으니 하인들이 와서 내 문짝을 완전히 새 걸로 만들어놓고 갔다.
그 덕에 늦게 자서인지, 긴장이 풀려서인지, 그날 밤은 푹 잤다.
❄❅❄
가운 사건이 내게 어떤 충격을 준 것은 사실이었다. 아마 원작에서의 존재감 없는 아리엘사였다면 이런 계략은 그녀를 지하 감옥으로 직행시키고도 남았을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결과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동안 마음속에서 맴돌기만 하던 생각에 결론을 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루엘라는 그 뒤로 며칠간 공작을 찾아오지 않았다. 카이런 공작은 그것에 아무 불만이 없는 기색이었고 나는 애가 탔다.
“공작님, 소풍이라도 가지 않으실래요?”
내가 불쑥 말하자 카이런 공작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루엘라는 더 반성해야 해.”
역시, 그는 내가 루엘라와의 만남을 주선하려는 걸 바로 간파했다. 나는 솔직하게 나가기로 했다.
“프라일 양은 공작님이 용서해주시기를 기다리실 거예요.”
“그녀가 뭔가를 기다릴 줄 알게 되었다니 상당한 발전이군.”
“공작님!”
이미 말하기로 결심한 바이지만, 루엘라를 우습게 여기는 카이런 공작의 태도를 보니 내 생각이 더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두 주인공의 방해물이었다. 이미 그들의 결혼이 예정된 이상, 내가 빠져줘야 둘의 관계가 안정될 수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공작님.”
“꺼져.”
“헉, 왜요.”
“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든 듣기 싫어. 그건 확실해.”
이건 초능력이 확실했다. 이 초능력을 왜 루엘라에게는 쓰지 않는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했다.
“공작님께서 결혼하시면 저도 성에서 나가서 살고 싶어요.”
카이런 공작은 내 말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눈도 깜빡이지 않다가, 잠시 후에 물었다.
“왜지?”
“원래 성안에서 공작님과 같이 산 건 늘 공작님 곁을 24시간 지켜야 하는 아빠 때문이었는데 이제는…….”
“…….”
“집을 하나 봐뒀어요. 아빠가 남겨주신 돈이 좀 있어서 그 집으로 이사 가려고요.”
“요즘 그래서 외출이 잦았나?”
“에이, 결혼식 준비 때문에 바빴어요.”
“그렇게 해.”
“…….”
뜻밖의 선선한 대답에, 나는 오히려 조금 충격을 받고 말았다.
섭섭함인지도 모를, 설명하기 힘든 묘한 기분에 휩싸였지만, 나는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그의 반응이 나쁘지 않아서 고백해도 될 것 같았다.
“실은 오늘 잔금 치르는 날이라서요. 오늘은 이만 들어가도 될까요?”
“……그렇게 해.”
나는 집무실에서 물러 나왔다.
나는 내심 내가 한 층 거리에 있는 방에서 마을로 이사 나간다고 하면, 그가 약간은 섭섭해하거나 싫은 티를 낼 줄 알았다.
그런데 그가 ‘오늘은 시나몬 차’ 하듯이 선선하게 대답하니 헛헛한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는 곧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나는 이방인이다. 이제는 게오르그도 없고, 배타적인 북부인인 그에게 내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었겠는가.
실상 그는 차를 마시는 것 말고는 남의 손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그의 옷을 입혀주고 이것저것 해다 바치는 것은 관습적인 것에 가까웠다.
게다가 그가 앞으로도 계속 차를 마실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내가 저렇게 싫어하는데…….
솔직히는, 나는 이제는 그의 차를 타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그 둘을 맺어줌으로써 이 세계에 개입한 책임은 다 한 셈이었다. 부부 사이의 이런저런 갈등을 지켜보는 것은 내 몫이 아니었다.
온실 사건과 가운 사건으로 나는 그것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늦은 감이 있었다.
카이런 하르펠과 루엘라 프라일이 부부가 되는 순간, 이 세계는 완성된다.
그러면 나도 그림자처럼 희미한 엑스트라로 돌아가는 게 순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