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나는 핑계를 생각하느라 눈을 굴리며 더듬거렸다.
“아, 음, 네, 그것이-”
“-온실에서 허브를 뽑아버린 게 한참 전인데도 차 맛이 변하지 않아서 신기해서요.”
내 말을 가로챈 루엘라가 웃었다. 마치 변명하지 못하게 하려는 듯한 행동이었지만 나는 난감해서 눈을 감고 말았다.
제발.
“……어째서?”
카이런 공작의 얼굴이 완벽하게 평온했다. 루엘라는 천진한 미소를 띤 채였지만, 내 눈에는 현란하게 반짝이는 적색 경고등이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제 온실을 꽃으로 가득 채웠거든요. 그 안에 나비도 풀어둘 거예요. 개화하면 공작님을 제일 먼저 초대할게요. 정말 아름다울 거예요!”
어떻게든 분위기를 무마하고 싶어서 끼어들었는데, 긴장한 탓에 나는 조금 더듬어버렸다.
“오, 온실은, 원래 꽃을 키우는 곳이니까요.”
“그럼. 아리엘사. 남부의 꽃은 정말 아름답단다. 너는 본 적 없지?”
“네, 프라일 양. 기대되네요.”
그녀가 ‘제 온실’이라고 한 말이 괜스레 가슴에 콕 박혔지만, 나는 얼른 자리로 돌아가 차를 끓였다.
그것은 당연히 카이런 공작의 온실이었고, 앞으로 그녀의 온실이 될 터다. 내가 언제 하르펠령의 재산에 지분이 있었다고 섭섭하고 말고 하는지.
내가 섭섭해할 일이 아니었다. 내가 여기서 뭐라고.
다행히 그날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하지만 나는 그 사건 뒤로 이상한 상황을 보게 되었다. 카이런 공작이 루엘라에게 집착적으로 차를 먹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원래 루엘라가 차를 마시거나 말거나 전혀 간섭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후부터 카이런 공작은 루엘라가 차를 남기지 못하게 했다.
그녀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조금 찌푸리기라도 하면 즉시 나를 불러 그녀에게 다른 차를 고르게 했다. 그러면 그 차는 그녀가 다 마셔야 했다.
루엘라는 처음에는 당혹하면서도 웃음을 유지했는데, 최근에는 그가 자신을 괴롭힌다는 걸 자각했는지 말수조차 줄어들 정도였다.
그가 왜 그러는지는 뻔했다. 그녀가 온실에서 자기 차의 재료인 허브를 다 뽑아버린 것이 괘씸해서.
그날도 루엘라가 끝내 다 식은 차를 원샷해버리고 집무실에서 나갔을 때, 나는 결국 물어보고 말았다.
“공작님…….”
“시끄러워.”
그는 내가 무슨 질문을 할지 보인다는 듯 말을 잘랐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체이어스를 졸라서 남부산 차를 급송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앞으로는 남부의 차를 낼게요. 그건 괜찮죠? 공작님도 새로운 차를 맛보시는 것 나쁘지 않으시잖아요.”
“너는…….”
“네?”
“됐어.”
“…….”
내가 입을 툭 내민 채 가만히 서 있자 그가 먼저 말했다.
“내가 하는 짓이 꼴사납나?”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조금요.”
“제기랄.”
카이런 공작은 복잡한 얼굴이었다.
여전히 그의 마음속에서 루엘라는 쫓아낼 수 없는 침입자 이상도 이하도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자신의 삶을 휘젓기 시작한 상황이 용서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같은 행동이 치졸하다는 자각도 있어서 더 괴로워할 수밖에 없었다.
“프라일 양도 시간이 지나면 공작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에 관심을 가지시게 될 거예요.”
“과연 그럴까?”
그의 대꾸는 냉소적이었고, 나는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빨리라곤 안 했다.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말이다.
그 전에 콩깍지가 쓰이겠지!
“차 한 잔 더 드릴까요?”
“네가 키운 건가?”
“네. 제가 키운 옌델 차 어떠세요?”
“좋아.”
나는 재빨리 내 방에서 키운 옌델 허브 차를 대령했다. 카이런 공작은 고맙다는 말도 입맛에 맞지 않다는 말도 없이 우아하게 마셨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설핏 웃고 말았다.
아무렴 어떠랴. 저렇게 아름다운데.
그리고 내가 주는 건 착하게 다 잘 마시는데.
나는 그제야 그와의 적절한 거리를 찾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열 발짝쯤 떨어져서 지켜보는 지금 같은 거리감 말이다.
어쩌다 그의 더운 손과 품의 느낌을 좋다고 기억하고 말았을까.
나는 뒤늦은 후회를 이제는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온실 사건이 그럭저럭 잘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한 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나는 그 착각을 상당히 충격적인 방식으로 깨달아야 했다.
카이런 공작의 집무실에서 나온 나를,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밀라가 거칠게 붙잡았다. 마치 도둑을 붙잡는 것 같은 몸짓이었다.
“왜 이래요!”
나는 붙잡힌 팔이 아파서 조금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는 더 사납게 말했다.
“자네,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해? 어서 가서 아가씨께 빌어!”
“아파요, 놓으라고요. 제가 무슨 짓을 했다는 거예요!”
집무실로 가려던 체이어스가 인상을 쓰며 다가오자 그제야 밀라는 나를 놓았다.
나는 팔을 주무르며 밀라를 노려보았고, 그녀는 아주 당당한 태도로 체이어스에게 말했다.
“마침 공작님의 가신께서 오셨으니 이 일을 고발해야겠군요. 순순히 용서를 빌면 용서받을 수 있었을 것인데!”
잠시 후 카이런 공작의 집무실에서는 약식 재판이 열렸다. 피고는 나 아리엘사 로크만, 원고는 카이런 공작의 약혼녀 루엘라 프라일 영애였다.
젠장.
밀라가 하필 집무실 앞으로 와서 체이어스와 마주친 것도 일을 이렇게 크게 벌이려고 그런 것 같았다.
밀라가 설명한 원고 측의 주장은 이렇다.
그녀는 이번에 프라일가에서 마차에 실어 보낸 루엘라의 옷을 계절과 용도별로 정리했는데, 분명히 서랍에 넣어두었던 레이스 가운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 레이스 가운은 초고가의 수입품으로, 마법에 걸린 거미가 토한 실로 짠 것이라 무게가 거의 없으리만큼 가볍고, 얇고, 하늘거린다고 한다. 그 가운을 입으면 어떤 추녀도 루엘라 아가씨처럼 아름다워 보이게 한다나.
무슨 소리지?
어쨌든 그 귀한 가운을 찾다가, 내가 다른 여자들과 몰려와 짐 구경을 하면서 그 가운을 눈여겨본 것이 떠올라 석연치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몰래 내 방을 뒤져보니 서랍에서 이 가운이 나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도둑년 아리엘사 로크만은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밀라가 카이런 공작 앞에서 나더러 ‘도둑년, 죽어라!’ 하지는 않았지만, 도끼질이라도 가능할 듯한 그녀의 눈빛과 불만에 가득 찬 말투는 내 해석을 확신하게 했다.
반면의 피고 측의 주장은 볼품없었다.
“아니요, 제가 안 그랬어요! 정말이에요, 공작님.”
정말로 절박하게 말했지만, 실은 나도 말하면서도 한심한 기분이 들었다.
훔쳐놓고 훔쳤다고 할 도둑도 세상에 없는 법이고, 누명을 썼다면 좀 더 그럴듯한 말로 해명을 해야 할 것인데, 내 언변은 고작 이 정도였다.
정말 나는 원작을 읽은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걸까?
루엘라는 이런 일을 당해서 속상해서 죽을 것 같다는 얼굴로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소파에 앉아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맞은편에 앉은 카이런 공작은 방 안의 모두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고, 체이어스는 그의 옆에 서 있었다.
밀라는 카이런 공작 앞으로 희고 나풀거리는 무언가를 꺼내 펄럭거렸다.
“이걸 보셔요! 이걸 보고 욕심을 내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단 말이여요.”
너무 하늘거려서 공중에서 부풀어 오른 가운의 레이스 깃이 카이런 공작의 얼굴을 스치기 전에, 체이어스가 팔을 확 뻗어 잡아챘다.
밀라는 다시 도끼눈을 뜨고 말했다.
“촉감을 보셔요. 북부에서는 입지 않는 것일 테지만 정말 귀한 옷입니다. 여자라면 눈이 돌만 하지요.”
이 아줌마가 원래 이렇게 말이 많았구나.
나는 그녀를 보면서 그렇게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추운 북부에서 한여름 밤에나 어울릴 저 습자지 같은 가운이 무슨 쓸모가 있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 회의적인 입장은 필연적으로 그 가운에 대한 가치 절하의 감정을 동반했다.
그러니까 저런 거 그냥 줘도 안 갖는다고!
나는 한숨을 쉬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지금 제 눈이 돌아갔는지 보시라고요…….”
순간 체이어스가 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는 얼굴에 힘을 꽉 주고 웃음을 참고 있었다. 점점 얼굴이 벌게지는 것이, 그는 상당히 괴로워 보였다.
하지만 지금 나보다 괴로우려고.
카이런 공작은 체이어스로부터 그 가운을 받아들더니 한 겹을 양 손끝 사이에 넣어 살짝 문질러보았다.
그리고 감탄하듯 말했다.
“마법을 이런 식으로도 사용한다는 건가? 거미에게?”
루엘라는 카이런 공작이 자신의 가운에 감탄하는 기색을 드러내자 눈을 반짝였다. 몹시 기쁜 모양이었다.
아니면, 자신의 옷을 카이런 공작이 조심스럽게 만져주어서 기쁜 걸까?
가만히 보면 그녀는 자기 감정을 정말로 숨기지 못했다. 이 신분제 사회에서 살다 보니 나는 그 이유를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남의 감정이나 욕구에 민감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신경 써야 하는 사람은 자기보다 더 신분이 높은 사람뿐인데, 그 수가 너무 적었다.
그들의 감정에 민감해져야 하는 것은 그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신분이 낮은 자들이었다. 거기서 더 나아가면 그들의 필요를 자신의 감정으로 승화시키는 스킬을 가지게 된다.
바로 저 밀라처럼.
카이런 공작은 가운을 들고 일어나 루엘라를 바라보았다.
“루엘라. 아리엘사가 이 가운을 훔쳐 가서 화가 나셨소?”
루엘라는 하얀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화를 억누른 듯 단호하게 끄덕였다.
“네. 공작님. 공작님을 지근에서 모시는 시녀가 어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요. 이것은 저와 공작님을 동시에 능멸하는 짓이 아닐까요?”
카이런 공작은 다시 턱을 획 꺾어 나를 바라보았다.
“아리엘사, 할 말 있나?”
그 말투가 너무 싸늘해서 나는 등줄기가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 시대의 재판이란 별것 없었다. 영주의 논리와 판단이 법이고 판결이었다.
카이런 공작은 매우 단호하게 ‘아리엘사가 이 가운을 훔쳐 가서’라고 말했고, 그것은 결론이나 마찬가지로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