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남부로는 언제 돌아가세요?”
“공작님께서 약혼서를 써주시는 대로 출발할 겁니다.”
“그렇군요.”
그때 체이어스가 불쑥 나타났다.
“아리엘사.”
“체이어스 경.”
헤리어트가 인사했지만, 그는 헤리어트를 무시하고 내게 짜증스럽게 말했다.
“쯧. 집무실 비워두고 노닥거리다니.”
“어, 얼른 가볼게요. 그럼 프라일 씨. 안녕히 가세요.”
“헤리어트라고 불러요.”
체이어스가 작게 코웃음 치는 소리를 들은 것 같기는 한데, 나는 카이런 공작의 집무실로 다급히 돌아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야 할 것 같기도 했다. 레오르트 후작은 내 빙의자로서의 자만심을 무참히 깨어버렸다.
내가 의도하지 않게 헤리어트에게 쓸데없는 소리라도 하지 않도록 집무실로 돌아가는 게 나았다.
카이런 공작의 집무실로 들어가니 처음 보는 상인이 들어 있었다. 새로 찾아낸 상인인 모양이었다.
카이런 공작은 나를 보더니 한쪽 눈썹을 살짝 일그러트렸다.
“네가 해.”
내가 우물쭈물하고 그를 쳐다보고 있자 나이 지긋한 상인이 부드럽게 말했다.
“카이런 공작님께서는 약혼 예물을 고르고 계셨습니다.”
“아. 네…….”
나는 체이어스가 약혼서와 값비싼 예물을 함께 보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하지만 그걸 내가 고르게 될 줄이야.
상인은 테이블 위에 덮개를 양쪽으로 펼치는 상자를 열어 보였다.
“어머…….”
거기에는 없던 물욕도 생기게 하는 귀금속이 들어 있었다. 보석 목걸이와 팔찌, 장신구들이 벨벳 위에 누워서 반짝이고 있었다.
상인이 차분한 목소리로 내 정신을 차리게 했다.
“모두가 약혼 예물로 어울리는 것들입니다. 어떤 것으로 권하시겠습니까?”
상인은 내가 잘 볼 수 있도록 상자를 살짝 기울여주었다.
나는 상자를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남부에는 보석만큼이나 아름다운 유리 세공품이 많아요. 그러니 광채로 눈을 현혹하는 것은 적당치 않아요. 어머나…….”
나는 검은 벨벳 위에 놓인 미색 브로치를 집어 올렸다.
“이건 뭐죠?”
“북부 들소의 뿔로 깎은 것입니다. 지금은 멸종되어 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브로치를 제자리에 돌려놓으며 말했다.
“들소 뿔에 뿔이 아름다운 사슴이 새겨져 있다니, 재미있네요.”
뿔 달린 사슴은 하르펠가의 문장이었다.
이걸 하르펠가에서 구매하지 않으면 누가 사겠는가. 상인은 이번 거래를 상당히 벼르고 온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루엘라가 ‘뼈’를 마음에 들어 할 것 같지 않아서 나는 아쉬운 얼굴로 그것을 내려놓았다.
“이 오색 광채가 나는 진주는 어디서 온 건가요?”
“그것은 하냐크족이 사막 조개에서 얻은 것입니다.”
“음, 프라일령은 사막과 가까우니 이걸 신기하게 여기지는 않을 것 같아요. 공작님의 예물은 특별해야 해요.”
“과연 공작님의 시녀답게 꼼꼼하십니다.”
상인이 카이런 공작을 향해 미소를 짓자 카이런 공작이 자르듯 말했다.
“그 브로치로 하지.”
나는 아직 상자의 반밖에 살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뾰로통하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상인은 두꺼운 천으로 브로치를 싸서 꺼내놓고는 상자를 닫았다.
“청구서는 재정관님께 드리세요.”
그는 나를 향해 빙긋 웃고는 돌아갔다.
하지만 나는 좀 걱정스러웠다.
“물론 귀하고 비싼 물건이지만, 색을 화려하게 사용하는 남부인 눈에는 소박해 보일까 봐 걱정이에요. 결혼 예물은 좀 더 화려한 것으로 고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북부 들소가 왜 사라졌는지 아나?”
내가 알 턱이 없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자 그가 말했다.
“하르펠가의 선조들이 모두 사냥했기 때문이다.”
“아……. 네.”
아무리 내 남주지만, 동물을 멸종시킨 게 자랑은 아닐 텐데…….
“방벽이 닫히기 전에, 마물들이 들소 무리를 미치게 만들어 마을로 내모는 일이 잦았다. 다 큰 수컷 들소는 키가 말보다 컸다고 한다. 그러니 마을 하나가 끝장나는 것도 잠깐이었지.”
“어머나…….”
“그래서 그 사냥에는 큰 희생이 따랐다. 하르펠가의 남자들을 포함해서.”
“그렇군요.”
하지만 그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무덤덤하게 옛날이야기를 하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그가 참 잘생겼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곧 세상에서 가장 잘생긴 새신랑이 되겠지.
‘나는 은퇴해도 되겠고.’
내가 무심히 떠올린 생각에, 심장이 조금 죄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를 떠난다는 생각은 해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이런 공작은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었다.
“그 뿔 조각은 하르펠가의 북부에 대한 헌신과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는 루엘라도 그 일부가 되어야 하는.”
“네. 공작님.”
나는 그가 등 떠밀려 결혼하게 된 프라일가에 무엇을 전달하고 싶은지 이해할 수 있었다.
카이런 공작은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의 선택은 오직 북부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그녀 또한 그런 자신을 선택한다면 북부의 수호자 가문의 일원로서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나는 가슴이 찡한 기분이 들었지만, 한편으로 속이 상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루엘라는 분명 약혼 예물로 낭만적인 의미를 담은 선물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원작에서 그녀는 아무도 살아서 건넌 적 없다는 사막을 건너서라도 자신에 대한 사랑의 징표인 꽃을 꺾어달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저렇게 무거운 뜻이 담긴 예물을 받으면 내심 실망할 것이다.
나 때문이었다. 내가 이야기에 너무 많이 간섭하는 바람에, 목숨을 건 사랑을 했던 둘의 관계가 가문간의 정략결혼이나 다름없이 되어버린 탓이다.
설명하기 힘든 엉망인 기분이 내 가슴을 짓눌렀지만, 나는 카이런 공작을 향해 미소를 지어야 했다.
그가 의연하게 버티고 있는데 내가 먼저 불평할 수는 없었다.
❄❅❄
다음 날 아침에 헤리어트는 약혼서와 예물을 가지고 떠나기 전에 나를 불러냈다.
“아리엘사 양, 저는 남부로 돌아갑니다. 곧 다시 올 거예요. 루엘라가 외로울까 봐 걱정이거든요. 아, 물론 공작님이 계시니, 제가 섭섭해서 다시 오는 거겠군요.”
나는 짝사랑을 잃은 남자가 횡설수설하는 모습이 다시 안쓰러워졌다.
“아리엘사 양에게 선물을 하나 가져오고 싶은데 좋아하는 걸 말해보세요.”
“어머, 선물이라뇨! 저는 그런 걸 받지-”
“-뇌물 아닙니다. 단지……. 루엘라에게 친절하게 해주시라는 부탁이 담긴 뇌물입니다. 그녀는 외로움을 많이 타거든요. 음. 뇌물이 맞는군요.”
이 아저씨 정말, 짠해서 못 보겠다. 전직 악당이었는데 지금은 어째…….
나는 그의 두 손을 덥석 붙잡고서 말했다.
“드세일 씨, 걱정 마세요. 저는 공작님을 모시기 위해 늘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프라일 양의 행복이 공작님의 행복이니까 당연히 그분께도 잘해드릴 거예요.”
잠시 내 손을 내려다본 그는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고맙습니다. 아리엘사 양.”
❄❅❄
헤리어트의 마음이 얼마나 짓무르는가와는 상관없이, 루엘라에게는 최고의 봄이 찾아오고 있었다.
북부에도 최고의 봄이.
겨울이 혹독했던 것만큼 봄은 포근했고, 속사정이야 어떻든 북부인들은 위대한 그분의 약혼을 축하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운 분위기 속에서, 그녀는 매일 얼마 동안 카이런 공작과 산책을 한다든가 집무실에서 담소를 나누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푸근해진 날씨 탓인지, 그녀가 북부의 생활에 적응해서 그러는지, 그녀의 미모는 하루하루 더해졌다. 심지어 그녀의 아우라마저 강해지는 착각이 들었다.
그녀는 이제 몹시 당연하다는 듯 공작 부인으로 처신하고 있었고, 밀라는 공작 부인의 비서관인 것처럼 위세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밀라가 루엘라의 품위 유지를 위해 그 상인을 다시 데려오라고 강력하게 요구했을 때, 체이어스는 그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글쎄요, 그 상인이 가다가 얼어 죽은 모양인데요. 북부가 좀 그렇습니다.”
세상에.
가만히 보면 참 신기한 것이, 하르펠 성의 하인들도 루엘라를 보면 넋을 놓곤 하는데, 이 체이어스만은 그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이 인간의 감정뇌는 콩알만 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화가 난 밀라는 프라일가에 전갈을 띄웠고, 프라일가는 루엘라의 생활집기와 치장품을 마차에 실어 보냈다.
그 마차는, 모양이 후줄근하기만 했다면 피난 행렬로 보일 정도의 규모였다. 그녀의 화려한 물건을 구경하려 성내의 여자들이 다 몰려와 짐을 푸는 걸 기웃거릴 정도였다.
하늘거리는 얇은 드레스나 레이스 가운은 실내에서도 입기 적당치 않았는데 다 가져온 걸 보면, 그녀의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용도 같았다.
그러나 카이런 공작은 그 꼴이 정말로 보기 싫었는지 영지 순시를 떠나겠다고 했다. 체이어스는 그녀와 같이 떠나든지, 아니면 가면 안 된다고 막았다.
지금 시점에 약혼녀를 푸대접한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어쩐 일인지 루엘라는 나를 점점 더 싫어했다. 물론 루엘라 본인은 늘 나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밀라가 나를 향해 도끼눈을 뜨는 건 점점 더 노골적이 되었다. 그녀의 행동이 루엘라의 속마음을 대변한다는 것쯤은 나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정말로 그녀를 위해주고 있는데…….
나는 집무실 창밖으로 막 성문 앞에 도착한 프라일가의 마차를 보고 있다가 말했다.
“휴, 공작님. 저건 진짜 마지막 마차 같아요.”
책상에서 서신을 작성하던 카이런 공작은 냉소했다.
“설마. 남부와 하르펠은 마차가 줄을 이어서 연결되어 있을 것이야. 그것이 끝날 리가 없어.”
“……풋. 죄송해요. 공작님.”
카이런 공작이 투덜거리는 것을 처음 듣는 것 같아서, 나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가 펜을 놓고 허리를 펴기에 나는 그가 화가 난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아리엘사.”
“차, 올릴까요?”
그는 대답 대신 서랍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책상 위에 놓았다. 그것을 연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