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내가 너를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왜 잘못됐냔 말이다.
이 와중에도 온실 공사는 시작되었다. 온실의 기둥을 세우느라 정원을 울리는 망치질 소리는 내 머릿속을 헤집어놓고 있었다.
그 상태로 시나몬 모종을 옮겨 심고 있는데, 관목 너머로 루엘라와 헤리어트의 대화가 들려왔다.
“우리 집 유리로 온실을 만들면 안 돼?”
루엘라가 투정을 부리듯 말하자 헤리어트가 타이르듯 말했다. 말투만 들으면 사촌 남매라기보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연인 같았다.
“그런 사치를 부렸다간 황실에 밉보일걸. 황실과 북부가 편치 않은 사이인 건 너도 알고 있잖아.”
“북부 공작님은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지 않아? 세상에서 가장 강한 분이잖아.”
“그렇긴 해도 나서서 미움을 살 필요는 없지. 이제 너는 북부의 안주인이 될 거니 그런 면도 살필 줄 알아야 해. 까칠한 북부인들은 적을 쉽게 만드니까.”
북부의 안주인이라는 말을 들은 루엘라는 조금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머, 그렇지? 카이런 공작님도 편지에서는 그렇게 상냥하실 수가 없는데 실제로 만나면 왠지 차가우시거든. 북부인의 성정이 그런가 봐.”
“그래……?”
루엘라는 헤리어트의 목소리에 걱정이 깃들자 얼른 말했다.
“하지만 나를 얼마나 정중하게 대해주시는지 몰라. 아마 나에게 실수할까 봐 조심하시는 것 같아.”
“저런, 루엘라. 공작님을 너무 고생시켜드리지 마.”
헤리어트가 안도한 듯 말하자 루엘라는 까르르 웃었다.
“어머, 오빠도. 호호호.”
헤리어트를 만난 루엘라는 정말 즐거워 보였다. 그는 그녀를 다정하게 어르면서도 필요한 충고를 해주었다. 다정한 오빠처럼 말이다.
나는 일어나야 할 타이밍을 놓치고 어쩔 수 없이 그 대화를 듣고 앉아 있어야 했다.
“봄이라는데 이곳은 이렇게 삭막해. 온실이 지어지면 우리 집 정원의 꽃을 가득 키울래.”
“이곳의 겨울이 얼마나 혹독한지 모르는구나. 남부의 꽃은 여기서 키울 수 없어.”
“하지만 해보지 않으면 몰라, 오빠. 날 봐. 남부에서 이곳까지 와 있잖아. 꽃들이라고 못 할 게 없어.”
그들은 내 반대편으로 멀어졌고, 대화는 더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시나몬 옮겨심기를 끝내고 일어났을 때, 관목 너머에는 헤리어트가 서 있었다. 그는 내 존재를 눈치채고 루엘라를 들여보내고 온 모양이었다.
“무례하시군요, 아리엘사 양.”
“프라일 씨, 엿들으려고 한 게 아니고요, 제가 작업하는 데 오셔서, 중간에 인사할 기회를 놓쳐서…….”
“압니다. 루엘라는 사람들을 압도하죠. 사람들이 그 애 앞에서 말하거나 행동할 시기를 놓치는 건 흔한 일입니다.”
그도 루엘라를 둘러싼 아우라를 아는 것 같았다. 하기는, 그야말로 그 아우라에 푹 잠겨 있는 사람이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치마에 묻은 흙을 툭툭 털고 일어나서 연장을 챙겼다. 짙은 모직물 드레스는 흙이 묻어도 털어내면 그만이었다.
그는 그런 나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말했다.
“공작님의 차는 모두 직접 키우십니까?”
“그런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고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두 분은 돈독해 보이시는데 프라일 양이 먼 북부로 오셔서 섭섭하셨겠어요.”
그는 잠시 살풍경한 정원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온실이라도 있으면 낫겠죠. 조금이라도요…….”
그의 목소리는, 직설적으로 말하면 비 맞은 강아지 같았다. 세상에 의지할 곳을 다 잃은 것 같은 목소리였다.
내가 그를 너무 측은하게 바라보아서인지, 그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나도 민망해서 다른 데를 보았다.
“그러나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돌아본 그의 얼굴은 진실했다. 저 얼굴이 거짓이라면, 그는 엄청난 연기력을 가진 것이다.
“루엘라는 최고의 것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제국에서 카이런 공작님만 한 남자를 떠올릴 수 없습니다.”
그는 사방을 살피더니 작게 속삭였다.
“황태자 전하를 포함해도 말입니다.”
그 부분은 나도 동의한다. 그 인간은 정줄 데가 없었다.
“최고의 미모와 고운 심성을 지닌 루엘라가 최고의 남자를 만났습니다. 제가 뭘 더 바라겠습니까.”
‘그만하라고!’
애써 자조하는 헤리어트가 너무 불쌍해 보여서, 나는 마음속으로 고함쳤다.
“두 분은 분명히 행복하실 거예요. 완벽한 짝이니까요.”
내가 확신에 차서 말하자 헤리어트는 푹 젖은 무거운 미소를 띠었다.
“감사합니다. 아리엘사 양. 제 마음에 적지 않은 위로가 되는군요.”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그동안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깨달았다.
그가 원작에서 카이런 공작을 그렇게 멸시하고 제거하려 했던 것은, 카이런 공작이 루엘라에게 부족한 남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가신을 모두 잃고 자기 영지로 돌아갈 수조차 없는 처지의 카이런 하르펠이 감히 루엘라를 넘본다는 사실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은 가질 수 없는 여자지만, 꼭 월등한 남자에게 보내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애절한 마음 말이다.
지금 카이런 공작은 그가 루엘라를 보내주려고 기다리던 우월한 남자였으니, 악의를 가질 이유가 없었다. 몹시 슬퍼졌을 뿐.
“차 한 잔 드릴까요?”
나는 너무 짠한 마음에 불쑥 뱉고 말았다.
내가 순간 후회하며 거절을 간절히 기다릴 때, 그는 망설이다 말했다.
“그럴까요?”
❄❅❄
나는 성안의 작은 접객실에 차를 내었다. 겨울딸기 차를 진하게 탔다. 나도 최근에는 진정 효과가 좀 필요했기 때문이다.
차를 한 모금 마신 헤리어트가 말했다.
“북부의 음식은 대게 향미가 진한 것 같습니다.”
“보관성을 위해 염장이나 훈증을 많이 하니까 좀 그럴 거예요. 남부의 음식은 어때요?”
“과일이 많이 나니 기분 좋게 시고 단 맛이 흔합니다. 고기 같은 건 더위에 상하는 것을 막으려 설탕이나 강한 향신료에 재어두기도 하니 따지고 보면 그리 다르지도 않을 겁니다.”
“그렇겠네요.”
헤리어트는 조금 망설이다가 물었다.
“그 화상약에 매단 나비 모양은 어떻게 생각해내신 겁니까?”
“아……. 그거요?”
그때는 참 열심이었다. 또 내 마음도 단순할 때였다. 다시 하라고 하면 절대 못 할 것이다.
“루엘라가 북부로 가기로 했을 때, 북부에 그녀와 비슷한 사람이 있어 의지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아니고요, 우리 취향은 엄청 다르고요, 그냥 제가 맞춰준 거예요.
나는 그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그러나 내 뒷머리는 싸늘해지고 있었다.
루엘라가 ‘북부로 가기로’ 했다고? 연애편지가 발각되어 집에서 쫓겨난 게 아니고?
그녀의 가출과 레오르트 후작의 폭탄선언은 처음부터 후작의 계획이었다는…….
나는 그제야 카이런 공작과 체이어스의 루엘라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의심한 것이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하지만 나는 내 동요가 티가 나지 않도록 최대한 애쓰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