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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76/128)

69화

나는 잠시 내 책임도 내려놓고 순수한 관객의 입장으로 애석한 마음을 가졌다.

그리고 다시 아리엘사로 돌아와 자연스럽게 물러났다.

“그러면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대화가 끝난 후에 하녀가 헤리어트 님의 침소를 안내해드릴 겁니다.”

“고마워요. 아리엘사.”

헤리어트가 내게 인사하기에 나는 머리를 가볍게 숙이고 나왔다.

복도를 혼자 걸으니 천천히 현실감이 돌아왔다.

나는 해낸 것이다.

이제 나의 남주와 여주는 결혼할 수 있었다.

“겨우 해냈어…….”

집무실로 돌아왔을 때, 실내 분위기는 싸늘했다. 나는 카이런 공작과 체이어스에게 겨울딸기 차를 푹 우려서 내주었다.

진정 효과 성분이 더 많이 우러나도록 말이다.

나는 묘한 승리감과 약간 멍한 고양감을 느끼고 있었다. 내 기척에 귀신같이 예민한 카이런 공작은, 역시 그런 내 모습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나는 눈치를 보며 말했다.

“두 분은 사이가 몹시 돈독하세요. 프라일 양은 헤리어트 씨에게 공작님에 대해 자랑하며 기뻐하고 계세요.”

카이런 공작은 나를 무시하고 체이어스를 향해 물었다.

“체이어스, 내 책사로서 말하라.”

“네. 공작님.”

“내가 왜 그녀를 살려야 하지?”

나는 헉 하며 체이어스를 바라보았다.

체이어스의 눈동자는 잠시 흔들렸다. 그의 낮게 깔린 음성은 평소에 없는 무게를 담고 흘러나왔다.

“첫째, 프라일가는 그 부를 동원해 용병과 하냐크족을 매수하여 북부에 대한 전쟁을 장기화할 겁니다. 이것은 심증이지만, 지난번 헤리어트는 돌아가면서 동부를 들러서 갔습니다. 석회 광산 말입니다.”

카이런 공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석회는 유리의 재료이기도 했다. 남부에서 수입에 의존하는 많은 재료 중 하나였다.

결혼은 성사시키지 못하더라도, 레오르트 후작은 전쟁으로 석회만 탈취해가도 큰 이득이었다. 결국 이 수의 목적은 그것이었다.

“전력상 결국은 우리가 승리할 테지만 하르펠의 피해도 심각할 것입니다. 둘째, 이 일은 하르펠가의 불명예로 기록되어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체이어스의 말에 카이런 공작은 발끈한 기색으로 날카롭게 물었다.

“셋째도 있나?”

체이어스는 허리를 펴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셋째, 선사에 무고한 여자를 죽인 하르펠은 없었습니다.”

카이런 공작은 벌떡 일어나 창가로 갔다. 그는 우리를 등진 채 말했다.

“그녀를 죽일 리가.”

체이어스는 그의 뒤로 다가가 섰다.

“레오르트 후작을 아시지 않습니까. 전쟁의 명분이 필요하다면 흠집 난 딸 정도는 충분히 희생할 겁니다.”

카이런 공작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나를 향해 노성을 내었다.

“이제 만족하나!”

나는 터지려는 울음을 틀어막은 채 집무실에서 달려 나왔다. 그의 분노가 내게 매질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 마음도 산산이 부서지는 듯싶었다.

나는 세상에 완전히 혼자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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