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나는 울컥해서 말했다. 말을 골라야 하는데, 나야말로 저 둘 사이를 중재해야 하는 사람인데, 말이 전혀 골라지지 않았다.
“저라고, 저라고 누가 버린 걸 좋아서 입겠어요? 제 기분이 어땠는지는 아세요?”
나는 조금 씩씩대며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예쁜, 소중한 옷을 어떻게 그냥 버려요! 공작님이 특별히…….”
말을 하다가 멈추기는 했지만, 나는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여버린 후였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벌을 받겠구나,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내 지독한 무례에도, 뜻밖에 그의 얼굴은 편안해졌다.
그는 나를 가볍게 무시하더니 말했다.
“나가.”
추, 추방인가?
나는 눈이 튀어나올 듯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네?”
“나가서 즐겨. 북부 놈들은 다 늑대니까 함부로 엮일 생각 말고. 오늘 너 좀 지나치니까.”
“예? 어떤-”
“-예쁘다고.”
나는 내가 방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올해는 내가 놀아주려고 했는데, 나는 춤 못 춘다고 공언을 해버렸으니 어쩔 수 없겠어.”
그리고 그는 돌아앉으며 중얼거렸다.
“성탑에 다시 불을 지를까.”
나는 아무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내성을 나왔다. 목적이 있어서 나왔다기보다, 카이런 공작이 나가서 놀라고 해서 무심결에 나왔다가 정신을 차리니 광장이었다.
아직은 광장은 한산했다. 나도 놀 마음도 놀 사람도 없어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서 있었다. 방금 집무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얼떨떨하기만 했다.
“이봐, 시녀. 나 좀 봐.”
밀라는 조금 헐떡이고 있었다. 나를 찾아 여기저기 급히 돌아다닌 모양이었다.
❄❅❄
“흑. 흐흑.”
두 손을 내 입으로 꼭 틀어막았지만, 울음이 그쳐지지 않았다.
서러움 같기도 하고 당혹 같기도 하고, 이 빌어먹을 빙의 생활에 쌓인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한 번에 밀려 나오는 것 같았다.
나는 속치마 차림으로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무슨 나쁜 일을 당한 건 아니다. 아마도.
밀라가 불러서 루엘라의 방으로 갔을 때, 루엘라는 소파에 엎드려 울고 있었다.
그녀는 내 드레스를 젖은 눈으로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더니 다시 얼굴을 묻고 울었다.
“모르겠어. 공작님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겠어. 너를 그런 눈으로 보시는 걸 보면, 이런 게 정말로 그렇게 예쁜 걸까?”
나는 겁을 집어먹은 채로 밀라를 쳐다보았고, 밀라는 내게 사납게 말했다.
“공작님께서 우리 아가씨가 북부 여자 옷을 입기 원하시니 돌려줘.”
“……예?”
울먹이던 루엘라가 고개를 들었다.
“내 실수야, 아리엘사. 그분이 저토록 섭섭해하실 줄이야. 내가 부주의했어. 여자를 많이 접해보지 않은 분이 여자 마음을 잘 이해하실 수 있을 리 없는데.”
그게 그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나는 그 말을 듣고 잠깐 멍해졌다.
“아리엘사, 나는 정말로 그분에게 사과하고 싶어. 나는 그분이 정말로…… 좋거든.”
“옷을 어서 벗어.”
밀라는 내 옷을 강제로 벗기기라도 할 기세로 말했다. 내가 그녀에게 뭐라고 말하기 전에, 루엘라가 다시 엎드려 크게 흐느꼈다.
“밀라, 그렇게 말하면 못써. 흐흐흑.”
“…….”
하는 수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내 옷을 벗어놓고 나왔다.
나는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복도로 향했다. 이 길이라면 누구와 마주칠 일은 없었다. 속치마는 드레스 속에 받쳐 입는다 뿐이지 얇은 드레스나 다름없어서 춥지도 않았다.
하지만 무언가 자꾸 서러워졌다. 하지만 억울한 기분이 강해질수록 이게 다 내가 자초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입이 열리지 않았다.
“흑…….”
하지만 내 눈물은 쏙 들어갔다.
복도에서, 카이런 공작과 체이어스가 나란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딱 좋은 내 꼴을 깨닫고 숨을 멈추고 말았다.
체이어스는 내게 주먹이라도 날릴 것처럼 격한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망토를 벗어 둘러주었다.
그리고 나를 확 돌려세우더니 내 양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입 닫고, 딱 이름만 말해. 넌 더 말할 필요 없어.”
내가 몹쓸 짓을 당한 게 아니라고 하기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가 생각하는 몹쓸 짓은 아니었다.
나는 아직 눈물이 굴러떨어지는 눈으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카이런 공작은 다가와 내게서 체이어스의 망토를 확 벗기더니 그에게 내밀며 말했다.
“돌아가라. 필요하면 부르지.”
그리고 그는 자기 망토를 내게 덮었다. 체이어스는 이를 악문 채로 카이런 공작을 보더니,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체이어스의 끄덕임은 피를 보는 일은 나보다는 공작이 더 낫겠지, 하는 느낌이어서 나는 더 겁을 먹고 말았다.
“공작님, 그런 게 아니라…….”
“따라와.”
카이런 공작은 성큼성큼 앞장서 집무실로 들어갔다.
나는 재빨리 내 자리로 가서 거기 두었던 내 망토를 걸쳐 여미고 카이런 공작의 망토를 돌려주었다.
그러나 나를 노려보는 그의 시선이 너무 무서워서, 오도 가도 못 하고 서 있다가 생각난 말은 이것뿐이었다.
“차…… 드릴까요?”
“앉아.”
그의 명령에 소파로 가서 털썩 앉았다. 헐벗은 차림을 한 것은 나인데, 내가 시선을 어디 두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빼먹지 말고 말해.”
나는 잔뜩 눈치를 보며 말했다.
“화내지 마세요.”
“호오. 너는 내가 등신으로 보이는 모양이군.”
카이런 공작은 정말로 화가 난 게 틀림없었다.
나는 소스라쳐서 대답했다.
“무슨 그런 말씀을-”
“-내 성에서 너를 모욕해도 되는 자는 없다.”
“…….”
잠깐 눈앞이 어지러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까 공작님께서 프라일 양에게 북부 여자의 의복을 입으라고 핀잔을 주셨잖아요. 프라일 양이 그것 때문에 놀라서, 공작님이 화가 나셨으니 얼른 자기 옷을 돌려달라고 한 것뿐이에요. 모욕이나 그런 건…….”
“미친.”
“헉.”
나는 입을 쩍 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따지고 보면 카이런 공작은 어휘가 상당히 부족한 사람이었다.
‘따라와.’ 정도만 말해도 ‘내가 너를 용서할 줄 알았나? 끌고 가 목을 치겠다.’ 정도의 의미를 기세에 실어 전달할 수 있으므로, 애초에 말을 길게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체이어스가 입에 달고 사는 ‘미쳤구나’는 들은 적이 없어서, 나도 많이 놀라고 말았다.
자포자기하는 심경으로, 나는 울컥해서 말했다.
“공작님은 왜 거기 계셨던 거예요? 체이어스 경과 축제 준비 확인하러 나가 계셨어야 하잖아요!”
“준비가 너무 완벽해서 일찍 들어왔다. 그게 잘못인가?”
“흑. 아니요.”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가 다시 빳빳이 쳐들고 말했다.
“제 방은 코앞이었어요. 원래대로라면 저는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고 제 방으로 돌아갔을 거라고요.”
“원래대로라면 루엘라 프라일은 내 눈에 띄지 않았을 여자지.”
“아니거든요!”
내가 싸우겠다는 태도를 보이자, 카이런 공작은 짜증스럽게 시선을 돌려버렸다. 이제 너와 대화는 끝났다는 태도였다.
“너는 방으로 돌아가. 나머지 드레스도 그 여자에게 줘버려. 축제가 끝나는 대로 돌려보낸다.”
“공작님-”
“-한마디만 더 하면 용서하지 않겠다.”
나는 기가 질린 채 겨우 조그맣게 말했다.
“화내지 마세요. 그분은 집을 떠나본 게 처음이에요. 누군가 자기에게 반하지 않는 것도…….”
“이방인.”
칼 같은 목소리에 나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나는 그의 외면을 뒤로하고 비참한 꼴로 집무실을 떠났다.
❄❅❄
체이어스는 저녁에 내 방으로 찾아왔다. 아련한 메아리처럼 울리는 광장의 음악 소리가 그를 따라 들어왔다가 문을 닫자 사라졌다.
나는 나머지 새 드레스도 밀라에게 전하고 돌아와 침대 속에 웅크리고 있던 참이었다.
체이어스는 그런 나를 혀를 차는 듯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더니 의자를 당겨 앉았다.
“춤추러 아직 안 간 거예요, 갔다가 온 거예요? 둘 다 시간이 애매하네.”
“내가 방금 못 볼 꼴을 봤다. 이건 다 내 책임이야.”
이번에는 체이어스에게 비난을 받을 차례인가 싶어 나는 금세 눈물이 글썽글썽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체이어스는 뜨끔한 표정을 짓더니 훨씬 차분하게 말했다.
“아까 참다못해서 다시 집무실에 갔더니 프라일 양이 와 있더군. 네 옷을 입고.”
“아…….”
체이어스는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천장을 향해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여자 목소리를 과장되게 흉내 냈다.
“‘공작님, 입어보니 북부 여인의 옷이 제게도 몹시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호호호. 이걸 모르고 제가 미숙한 판단을 했지 뭐예요. 용서해주실 거죠? 호호호.’”
체이어스가 흉내 내는 루엘라는 상당히 혐오스러웠다. 오히려 내가 그녀에게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나는 조그맣게 항변했다.
“공작님 때문이에요. 공작님이 북부 여자처럼 입으라고 그분한테 면박을 줘서요. 그분은 그런 걸 당해본 적이 없다고요.”
“너 그 여자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한다?”
체이어스가 ‘그 여자’라고 부르는 말투를 보니 어지간히 속이 뒤틀린 것 같았다.
“그런 건, 아닌데……. 체이어스 경이 여자 마음을 뭘 알아요.”
“흥. 그런 너는. 네가 남자 마음을 뭘 알아.”
체이어스는 나를 혐오하기라도 하는 눈으로 흘기더니 벽을 째려보았다.
“공작님의 시녀의 옷을 벗겨? 감히 제가 누군 줄 알고. 왜 자기가.”
나는 뭐라고 끼어들 말이 없어서 눈치만 보았고, 체이어스는 다시 생각해도 분한 듯 내게로 고개를 획 돌렸다.
“나도 공작님께서 후작가와 혼맥을 만들면 적지 않은 이득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건 아니야.”
“그렇죠? 엄청난 이득이 될 거라고요. 동상약, 아니 화상약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고요!”
내가 흥분해서 말하자 체이어스는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난 네가 공작님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네?”
나는 헉 하고서 그대로 서 있어야 했다. 체이어스가 이 정도까지 말할 줄은 몰라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