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73/128)

66화

나는 성안으로 가서 의자를 하나 빌려왔다. 돌아오니 이미 카이런 공작이 목을 쳐 피를 뿌린 피리새를 물리고 있었다.

저걸 못 본 건 다행이긴 한데…….

밀라가 사람들을 뚫고 오더니 내게서 의자를 가져가 버렸다. 루엘라는 이제야 살았다는 얼굴로 거기 앉아 밀라에게 귀엣말을 했다.

그리고 밀라는 또 내게 돌아왔다.

“이건 언제까지 하지?”

“이제 사제들이 태양에 바치는 경문을 낭송할 거예요. 좀 걸릴 텐데요.”

“그러면 따뜻한 차라도 내줘. 왜 이 추운 밖에서 이러는지.”

“밀라, 그건 당신이 해야 할 일 같은데요.”

“흥!”

밀라는 몹시 못마땅한, 시비라도 걸려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그런데 우리 아가씨가 자네가 탄 차가 맛있다고 하시더군. 그새 입맛에 익어버리고 말았다고 하시면서 말이야. 잘 없는 일인데 말이지.”

“……알았어요.”

이제는 슬금슬금 화가 났지만 나는 다시 성으로 돌아섰다.

옌델 차를 타서 조심스럽게 바구니에 담아왔을 땐 사제들의 낭송도 끝나가고 있었다.

나는 이번에도 밀라가 바구니를 받으러 올 줄 알았지만 그녀는 루엘라 뒤에서 내게 손짓했다.

“프라일 양.”

내가 바구니를 가져가 열었을 때 낭송이 끝나고 사람들은 즐거운 환호성을 내며 축제의 시작을 맞이했다.

그러자 루엘라는 일어나 제단에서 내려오는 카이런 공작에게 가버렸다. 하필 타이밍이 그랬다.

“카이런 공작님, 고생 많으셨어요. 이제 봄 축제가 시작된 건가요?”

하지만 카이런 공작은 바구니를 들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반듯한 얼굴이라 오히려 표정이 없어 보였다.

루엘라는 그의 시선을 좇아 재빨리 말했다.

“아리엘사 정말 예쁘죠?”

그녀가 기쁜 얼굴로 카이런 공작을 향해 돌아섰을 때, 나는 직감적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하지만 한발 늦고 말았다.

“공작님께서 선물해주신 드레스는 아리엘사에게 주었어요. 그녀가 몹시 가지고 싶어 하기에 마음이 약해졌지 뭐예요. 그래도 되죠?”

‘뭐라, 뭐라고?’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카이런 공작은 시선을 돌리는 것처럼 나를 자연스럽게 흘겨보더니,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루엘라, 당신은 인정이 많군요.”

그의 말에 루엘라는 새하얗게 웃으면서 이만 돌아가자는 듯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나 카이런 공작은 걸음을 옮기지 않고 말했다.

“그리고 나도 인정이 많아요, 루엘라.”

“당연히-”

“-당신 하녀가 내 시녀에게 일을 ‘모조리’ 다 떠넘기고 빈둥거리지 않는다면 그녀에게도 옷 한 벌쯤 선물할 수 있소.”

루엘라는 아직 응달에 쌓인 눈처럼 얼굴이 하얘졌다. 불안하게 굴러다니는 눈동자가 그녀를 퍽 처연하게 보이게 했다.

“루엘라. 당신은 손님이요. 내 시녀는 명예롭게 전사한 내 가신의 딸이고. 그 차이를 구분할 수 있으리라 믿소.”

카이런 공작은 제단에서도 내가 루엘라 때문에 바쁘게 오가는 걸 다 지켜본 듯했다.

나는 아직 멍한 가운데서도, 카이런 공작이 나에게 저런 시선으로 저런 말을 했다면, 아마 죽고 싶은 심정일 거라고 생각했다.

루엘라도 입가를 바르르 떨었지만, 그녀는 놀랍게도 금방 표정을 수습했다.

“당연하지요. 배려에 언제나 감사드리고 있어요, 공작님.”

“성안을 함께 둘러보겠소? 오늘은 퍽 따뜻하니 말이오.”

“네. 물론이죠.”

카이런 공작은 루엘라를 에스코트해 성으로 돌아가면서 내게 말했다.

“너는 집무실에서 대기해.”

나는 나란히 멀어지는 그림 같은 남녀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집무실로 터덜터덜 돌아왔다. 아직 질척한 길에 땅에 살짝 끌리는 그녀의 흰 드레스가 오늘 종말을 맞을 것을 애도하면서.

오늘은 공작도 처리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굳이 집무실에서 대기하라는 건, 나를 야단을 치려는 게 틀림없었다.

❄❅❄

나는 집무실 내 자리에서 엎드리며 중얼거렸다.

“이게 뭐냐고.”

마음이 너무 복잡했다.

루엘라가 나를 하녀처럼 부리려는 태도는 나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곧 북부의 안주인이 될 사람이니 굳이 따질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카이런 공작에게는 그게 대단히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걸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면 사람이 놀라지 않겠느냔 말이다. 오늘을 기점으로 그들의 핑크빛 기류는 한 계절쯤 더 멀어졌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드레스도…….

내가 그걸 ‘몹시 가지고 싶어’ 했다고?

루엘라가 또 마음대로 해석한 것인지 마음먹고 내게 덮어씌운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종종 루엘라가 사람의 말을 멋대로 해석한다는 느낌이 자주 들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말을 듣는 카이런 공작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였다.

그 옷이 원래 내 선물인지도 모르고 헛소리를 하는 루엘라를 한심하게 여겼을까, 아니면 스스로 이런 상황을 불러온 나를 비웃었을까…….

루엘라와 함께 있을 땐 속을 알 수 없는 완벽한 표정을 짓는 카이런 공작에게도 원망이 들었다.

❄❅❄

카이런 공작은 오후 볕이 약해질 때쯤 돌아왔다.

“공작님, 순시는 어떠셨어요?”

나는 내가 시나몬 차를 꽤 짙게 탔다는 것을 깨달으며 차를 내어갔다.

그는 잠시 향을 맡더니 차를 마셨다.

“순시는 잘 다녀왔다.”

“프라일 양은 돌아가셨나요?”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 길이 젖어서 드레스를 망치고 말았거든.”

“저런.”

그가 담담하게 대답하는 걸 보니, 루엘라와 보낸 시간이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의 날카로움이 한결 무뎌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안도하며 말했다.

“즐거우셨어요?”

“그래. 그녀는 유쾌한 여자야. 같이 있으면 사람을 퍽 즐겁게 만들어.”

지금 그녀가 몹시 귀찮은 존재임에도 그가 저 정도로 평가를 내리는 걸 보면, 원작이 나를 돕고 있는 건 틀림없었다. 지진처럼 티가 팍팍 나지 않았을 뿐이지.

나는 잠시 더 안도했다.

그리고 그는 허공 어디를 보며 말했다.

“그 상인 놈은 앞으로 북부 출입을 금하겠어.”

안도라니. 카이런 하르펠 앞에서 말이다.

내 드레스를 잘못 배달하는 바람에, 상인은 큰 거래처를 잃고 말았다.

나는 분위기를 무마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바로 그때 노크 소리가 났다.

-공작님, 루엘라 왔어요.

원작에서 그녀는 카이런 공작을 처음 보고 그를 하대한다. 초라한 모습에 레오르트 공작이 들인 기사로 생각한 것이다. 그는 그 모욕감을 오래 잊지 못했다.

그 순간에 비하면 그녀의 애정 가득한 아이 같은 말투는 큰 발전이었다.

아름다운 새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온 루엘라는, 오늘 가본 성의 다른 편과 마을, 가축을 풀어놓은 초지 따위를 구경하고 온 감상을 조잘거렸다.

다행히 아까 공작이 쓴소리를 한 건 다 잊은 모양이었다. 가만히 보면 나를 은근히 투명인간 취급하기 시작한 것 같긴 했지만.

카이런 공작은 자기가 데리고 다녀왔으면서도 마치 처음 듣는 이야기인 양 호응해가며 들어주었다.

나는 그가 황실과 수도의 귀족 사교계와 담을 쌓고 산 이유를 이제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려고만 들었으면 수도의 사교계도 휘어잡으셨겠는데 말이다.

“있다 춤추러 가실 거죠, 공작님? 저 공작님과 축제의 밤을 즐기기 위해서 춤도 배워뒀어요!”

그녀가 말했을 때, 그는 왜인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당황해서 말했다.

“차를, 더 드릴까요?”

“그래.”

그는 좀 예민해진 기색으로 내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루엘라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루엘라. 나는 성탑에 불이라도 붙지 않는 한 춤을 출 생각이 없습니다.”

“어머, 공작님도!”

루엘라는 마치 아주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고, 재빨리 포기했다.

그 모습은 무례하기보다 신선하고 아름다워서, 나는 예쁜 것들은 뭘 해도 예뻐 보인다는 진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저는 북부의 모든 것을 알아가고 싶어요. 또 체험하고 싶고요. 공작님이 계신 곳이니까요. 하지만 북부의 주인께서 백성들과의 춤판에 어울리시는 것도 당치 않으시네요. 옳아요.”

카이런 공작은 맹세코 약간의 불쾌한 기색도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뜻밖이군요. 북부의 의상에는 관심이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만.”

“아…….”

어우 씨.

나는 속으로 그렇게 소리치고 말았다.

카이런 공작이 꼬집은 것은 내 드레스에 대한 것만이 아니었다.

루엘라가 새 옷을 대거 사들이면서도 철저히 남부식 복식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그는 북부 문화에 대한 무시나 무관심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루엘라의 짙은 속눈썹에 얹혀 있던 고운 눈웃음은 순간 증발해버렸다.

그녀는 당황을 숨기려, 마치 카이런 공작처럼 가면 같은 미소를 짓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당하신 말씀이에요, 공작님. 그럼 인사를 드렸으니 이만 물러갈게요.”

“부디 충분히 쉬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귀족다운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루엘라가 나가자마자, 나는 공작의 앞으로 달려가서 주먹을 붕붕 휘두르며 속삭였다.

“공작님은 정말, 그냥 좀 못 넘어가세요?”

카이런 공작은 당장 가면을 치우고 내게 도끼눈을 떴다.

“뭘 넘어가야 한다는 거지? 내 집에서 내가 뭘 하면 안 된다는 건가, 아리엘사.”

하지만 나도 흥분해버린 후였다.

“공작님! 여자잖아요! 황녀만큼이나 귀하게 자란 대부호 후작의 외동딸이라고요. 조금은 더 너그럽게 대해주셔도 되잖아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나는 말문이 막혀 가만히 있어야 했다. 그리고 카이런 공작은 누구에게도 너그럽게 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오호. 너는 속이 그리 너그러워서 제 옷을 빼앗기고도 한마디도 못 하다가, 버린 걸 또 넙죽 받아 입었나? 그러면 그녀가 네 마음을 알아줄까 봐?”

“헉…….”

그는 내 사정이나 내 기분을 봐줄 생각이 전혀 없이 돌격하고 있었다. 마치 그와 전쟁을 하는 기분이었다.

나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고, 뭐라고 쏘아붙여야겠다고 생각할 때 그가 말했다.

“그 꼴을 보는 내 기분이 어떤지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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