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생각해보니 그들이 함께 보낸 시간 탓인 것 같았다.
레오르트 후작은 자신이 억류한 카이런 공작에게 명목상 손님 대우를 하면서도 자신이 처리하기 곤란한 일이 생기면 그에게 떠밀었다. 물론 은근한 협박을 곁들여서 말이다.
그사이 루엘라는 그 유명한 북부 공작을 신기하게 여기며 멀리서 살펴보게 되는데, 그는 당연히 그런 시선을 불쾌하게 여기며 무시한다.
하지만 자신을 무시하는 남자를 처음 만난 루엘라는 충격을 받고, 나중에는 그의 주의를 끌려고 유치한 사건을 벌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은 헤리어트를 자극한다.
카이런 공작이 그래도 자기에게 반응을 하지 않자, 루엘라는 자기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헤리어트를 이용해 카이런 공작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후작의 딸이건 뭐건 까칠하고 도도하게 굴 뿐인 카이런 공작이 그녀의 자존심에 적지 않은 상처를 입혔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둘 사이에는 질척한 애증이 피어난다.
둘이서 혐오와 매혹으로 흔들리는 눈빛을 교환할 때마다 스크롤을 내리는 내 마음도 쫄깃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루엘라가 감정적으로 무너지고, 그 약한 모습에 카이런 공작의 마음의 벽은 허물어지고 만다.
카이런 공작은 그녀를 허물어지고 없는 마음의 벽 대신 그녀의 방 벽에 밀어붙여서……. 흠.
그날 댓글창은 폭발했다.
그러니까 원작에서 그들이 사랑에 빠진 것은 각자의 성격적인 단점을 서로 질리도록 경험한 다음이었다.
강렬한 증오 다음에 미친 콩깍지가 찾아온 것이다. 그러니 사소한 일들은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거금의 옷값이라던가…….
하지만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못한 지금은 그 모든 게 문제였다.
원작에서의 그는 패전하고 도망친 패배자의 모습이었지만, 지금 그는 어느 때보다 강력한 북부의 주인이었다.
그러니 내 편지에 속은 루엘라만 카이런 공작에게 홀딱 빠져 있었고, 카이런 공작은 그녀를 레오르트 후작 때문에 쉽게 쫓아내지 못하는 악성 종양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문제는 공작이었다.
둘이 붙여만 놓으면 눈에서 불꽃을 튀길 줄 알았더니. 원작의 힘은 왜 이때는 가만히 있냐고!
하지만 지금 후회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사실 나는 처음 빙의 시점으로 되돌아간다고 해도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카이런 공작과 이 성의 사람들에게 그런 고난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고, 게오르그나 체이어스의 형도 잃고 싶지 않았다.
‘원래 그러기로 되어 있었거든요.’ 하면서 알면서 모르는 척할 용기가 없었다.
나는 혼자 소리치고 말았다.
“치사해!”
❄❅❄
한번 경험해본 터라, 나는 봄 축제 준비를 훨씬 더 차분하게 지켜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루엘라는 걸핏하면 나를 불러 봄 축제에 대해 묻고 이것저것을 부탁했다. 물은 걸 또 묻고 들은 걸 또 듣고 즐거워했다. 아마도 그녀는 단순히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을 즐기는 것 같았다.
사실 그녀가 작은 입술로 묻고 웃고 하는 모습을 보면 거기 푹 빠져들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게 되었다.
내가 그 복잡하고 격렬한 모닥불가의 춤에 대해 이야기해주자 그녀는 겁을 먹고 흥분하고 말았다.
공작님께서는 참가하지 않으신다고 말해주었는데도 그녀는 ‘댄스파티’에 주인이 참여하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녀 자신이 춤을 즐기는 것 같기도 했고.
“그건 젊은이들의 놀이 같은 거라…….”
“그래도 나는 봄 축제의 춤을 꼭 배워놓고 싶어. 공작님께서도 분명히 좋아하실 거야.”
나는 말하다가 좋은 생각을 해냈다. 이 고통을 나 혼자만 질 수는 없었다.
“모닥불가의 춤이라면 체이어스 경이 가르쳐주실 수 있을 거예요. 춤을 잘 추시거든요.”
“어머, 체이어스 경이?”
고통은 나누어야 맛 아닌가.
루엘라의 방으로 불려온 체이어스는 루엘라의 부탁을 듣더니 나를 죽일 듯 흘겨보았다. 그러나 빠르게 표정을 정리하고 말했다.
“그러죠.”
나는 조금만 구경하는 척하다가 그를 지옥에 던져두고 유유히 방을 빠져나오려 했다. 그러나 루엘라에게 스텝을 가르치던 체이어스는 내가 엉덩이를 떼자마자 말했다.
“너도 배워둬. 그러다 늙어서 못 춘다.”
“어머, 체이어스 경, 농담도. 호호호.”
나는 어처구니가 없는 채로 그들의 춤 연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리고 기분은 더 나빠졌다. 뜻밖에 루엘라는 지금 모닥불가로 뛰어들어도 될 정도로 춤을 금방 습득했다. 심지어 체이어스도 만족하는 미소를 띨 정도였다.
솔직히, 둘이서 손바닥을 맞대고 완벽한 원을 그리며 방 안을 뱅뱅 도는 걸 보니 샘이 날 정도였다.
예쁜데 저것까지 잘해?
무거운 털가죽 옷에 비틀거리지만 않는다면 분명히 그녀가 이번 봄 축제의 여왕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루엘라는 자기가 춤을 잘 춘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만족한 듯 우리를 놓아주었다.
함께 돌아오는 복도에서 나는 그가 좀 얄미워서 말했다.
“춤을 그렇게 좋아하시는지 몰랐어요, 체이어스 경.”
그는 그동안 일관되게 반루엘라 파였기 때문에 좀 민망한 얼굴을 했다.
“프라일 양에게 가정교사가 열이 넘었다는군. 습득이 빠를 만하지. 크흠.”
“작년엔 춤도 못 추게 해서 죄송했어요. 올해는 꼭 춤 잘 추는 아가씨랑 가서 즐기세요.”
“…….”
체이어스가 내 생각보다 더 얼굴을 굳혀서 나는 조금 미안해졌다.
그는 카이런 공작의 집무실 앞에 도착했을 때 물었다.
“너는 올해 누구와 가게?”
“아리엘사는 운동신경이 꽝이라 춤을 추지 않아요. 모르셨어요?”
나는 웃으며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말하고 보니 거짓말을 한 것을 깨달았다.
나는 작년 축제 날에 성탑이 타오르는 커다란 불길을 보며 카이런 공작과 춤을 추었으니까.
이제 다시 할 수 없을 경험이었다.
‘다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저절로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가슴이 조금 뜨거워졌지만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다. 이미 그도 그렇게 결정한 일이었다.
❄❅❄
봄 축제가 시작되는 날 아침. 제의에 참석하는 카이런 공작의 준비를 도우러 갔을 때, 그는 잠시 멈추어 나를 응시했다.
“공작님……?”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않고 내가 옷을 입혀줄 수 있도록 벽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마도 평소와 똑같은 내 차림새를 살핀 것 같았고, 뭐라고 타박을 놓을지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포기한 것 같았다.
실은 나도 내 차림을 의식하고 있었다.
예쁜 옷이 있는데 입지도 못하고 눈치만 보아야 한다니.
카이런 공작도 침묵하는 걸 보니 자기 짜증거리를 더 늘리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문득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앞으로는 이런 특별한 날 내가 그의 옷차림 준비를 도와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의 목욕시중을 들거나 간호하는 일도. 이제 그것은 기본적으로 루엘라의 일이었다.
“아리엘사?”
“네. 공작님.”
“정신 차려.”
“…….”
내가 묵묵히 그의 외투를 걸쳐주고 있을 때 루엘라가 들어왔다. 카이런 공작이 강제로 사준 화사한 드레스와 흰 털가죽 케이프를 걸친 모습은 마치 봄의 여신처럼 보였다.
“공작님. 북부의 봄을 함께 축하하고 싶어 왔으니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
루엘라는 내게 눈길도 주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에게 머리 숙여 인사했다. 카이런 공작은 그녀를 향해 은은하게 웃고 있었다.
그 미소가 너무 완벽하게 아름다워서, 나는 그가 지금 짜증이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난겨울은 매우 혹독했습니다. 그러나 봄은 유달리 빨리 따뜻해지는군요. 그 시작을 루엘라와 함께 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카이런 공작의 부드러운 언변에 루엘라는 볼을 발갛게 물들였다.
“어머, 공작님도…….”
나는 마음속으로 헉 소리를 냈다. 저런 얼굴로 저렇게 얼굴을 붉히면 어떤 남자가 안 반하겠는가. 여자인 나도 심장이 쿵 떨어질 지경인데.
그녀는 민망하여 화제를 돌리듯 나를 보더니 말했다.
“어머, 아리엘사. 너는 제의에 참석하지 않는 거니?”
“아닙니다. 지금 공작님을 모시고 갈 거예요.”
“그러고서?”
나는 그 한마디로 루엘라가 뼛속까지 귀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권위적이고 경멸적인 태도를 단호하고도 거칠지 않은 한 마디에 실어 보낼 줄 알았다.
그리고 그녀가 내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도 깨달았다.
“옷을……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루엘라는 그제야 만족한 듯 환하게 웃었다.
“그러렴, 아리엘사. 공작님께서 너그러우시다고 그리 생각 없이 다니면 안 된단다.”
카이런 공작은 그녀와 나를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루엘라는 카이런 공작을 향해 말했다.
“그러면 공작님은 제가 모시고 갈까요?”
“어디인지 아십니까?”
루엘라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웃었다.
“그러면 공작님께서 저를 데려다주세요.”
“그러지요.”
나는 두 사람이 나란히 나가버린 집무실에서 망연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루엘라가 원하는 대로 카이런 공작이 만들어준 드레스를 입고 성 밖으로 나갔다.
내가 너무 예뻐 보여서, 밖으로 나가서 맞는 찬 공기가 상큼하게 느껴져서, 오히려 슬펐다.
카이런 공작은 이미 사제들과 제단에 올라 있었다. 사제들은 막 돋아난 어린 가지로 불을 피우고 있었고 밝은 얼굴로 차려입은 사람들은 그것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무리로 다가가자 누군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밀라였다.
“자네, 아가씨를 저리 둘 셈이야?”
나는 제단 가까운 곳에 조금 비껴 서 있는 루엘라를 보고 다시 밀라를 돌아보았다. 태양 아래서 그녀는 예뻤고, 부족한 것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사제들을 압도하는 아름다움이 문제일 정도였지.
“서 계시지 않아.”
나는 제의가 끝날 때까지 모두가 서 있는 거라고, 지금 카이런 공작님도 서 계시는 거 안 보이냐고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남부 여자에게도 이곳이 북부라는 의식은 전혀 없는 듯했다. 나는 꾹 삼키고 대답했다.
“의자를 가져다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