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내가 있지도 않은 용기를 짜내서 ‘프라일 양, 카이런 공작님께서는 프라일 양의 옷 구매에 돈을 더 쓰지 않기로 하셨습니다.’라고 나불거렸다면 나는 완전히 거짓말쟁이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루엘라는 나를 이간질이나 하는 시녀라고 완전히 미워하게 되었을 것이다.
미래 하르펠의 안주인에게 원한을 사게 하면 어쩌라는 거냐고!
그게 아니라면 카이런 공작이 나를 은밀하게 괴롭히는 중인지도 몰랐다. 이런 상황을 만들어서 말이다.
내 마음은 끝도 없이 땅굴을 파고 들어갔다.
이 두 사람, 남주와 여주의 관계가 안정되기만 하면 이만 커플 메이커 역할을 내려놓을 수 있는데, 코앞에 있는 듯한 것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
내가 완전히 의기소침해져 있던 오후에, 밀라가 나를 불러냈다.
그녀를 따라 방으로 갔을 때, 루엘라는 내 팔을 덥석 붙잡았다. 그녀는 패닉에 빠져 있었고 나도 덩달아 긴장했다.
“왜 그러세요, 프라일 양? 무슨 일 있으세요?”
“있지, 있어! 어쩌면 좋단 말이야!”
나는 그녀가 소파에 펼쳐둔 드레스 두 벌을 보았다. 나는 첫눈에 저것이 카이런 공작이 직접 골라주었다는 봄 축제용 드레스인 것을 알았다.
도톰한 연녹색과 맑은 청색 원단에 북부 특유의 기하 무늬가 상의와 치맛단에 새겨져 있는 드레스들은 정말 아름다웠다. 한눈에 화려한 것은 아니었지만, 여밈과 단 구석구석 정성이 들어가 있었다.
게다가 모직물에 밝은 염색이 얼마나 힘든지 아는 나로서는 저 맑은 색상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년에 내가 입었던 노랑 드레스는 어리고 풋풋한 느낌이라면 저 옷들은 나는 멋진 북부 여자라는 자신감이 담긴 옷이었다.
다시 부아가 솟았다. 카이런 공작은 저렇게 꼼꼼하고 고급스러운 옷들을 골라놓고,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하라고 시킨 거지!
그녀가 내 팔을 다시 흔들어 나는 정신을 차렸다.
“치수가 안 맞으세요?”
“치수? 오, 아리엘사.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야. 이건…….”
루엘라는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듯 아름다운 미간을 잔뜩 일그러트렸다.
“네……?”
“흉하잖아!”
“…….”
“저런 걸 입고 어떻게 밖에 나가라는 거야? 북부의 아낙들에게나 어울릴 옷을…….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저런 옷을 입은 적이 없어.”
그녀는 심지어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그녀의 모습을 다시 찬찬히 보니, 저 옷이 그녀의 취향과 멀 것 같긴 했다.
북부의 옷은 지금 입고 있는 반투명할 정도로 은은한 무늬가 새겨진 미색 원단에 큰 주름이 많이 들어간 치맛단이 달린 드레스와 비교하면 극단적인 반대 취향이긴 했다.
하지만 그건 몰라서…….
루엘라는 울먹이듯 말했다.
“찬 바람에 피부가 상한 것 같아 화장품을 들이려고 했더니 상인이 아무리 불러도 오지 않지 뭐야. 그래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더니, 저 옷을 준비하느라 그런 모양이야. 공작님께서 주문한 것이라며 저것만 따로 보내왔거든.”
“아…….”
내 이 상인 양반을 다시 만나면 그냥!
“아니면 공작님께서 내게 화가 나신 일이 있을까? 자네는 그것을 알고 있어? 그래서 부른 거야. 아까 추위를 핑계로 저 옷을 버릴 구실을 만들어 두기는 했지만, 기분 나빠 하실지도 몰라. 나는 그것이 너무 불안해.”
나는 이제야 상황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카이런 공작이 전에 중부에서 주문했다던 내 드레스가 이제야 배달된 모양이었다.
그러나 상인은 그 옷이 누구 것인지까지는 모르고, 거기에 금족령까지 떨어졌으니 최근의 대량구매자에게 배달해버린 것이다.
이따위면서 편지는 어떻게 잘 배달한 모양이네!
카이런 공작이 자기 취향으로 옷을 주문했다기에 정원일 할 때 입을 작업복 정도를 떠올렸던 나는, 그런 생각을 한 것을 그에게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감동했다.
그가 내 취향을 한 단계 끌어 올렸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루엘라의 눈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고, 이미 상황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나는 멍하니 말했다.
“버리……시려고요?”
“그럼 저걸로 뭘 어쩌란 말이야.”
“…….”
나는 소파에 내쳐진 내 아름다운 드레스 두 벌을 만져보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나는 상황을 어떻게든 무마하고 싶었다.
“공작님께서는 저 옷을 틀림없이 고심하여 고르셨을 거예요. 프라일 양.”
그녀는 드레스에서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자네가 어찌 알아?”
“그분은, 작은 일도 허투루 하지 않으시거든요.”
“…….”
“프라일 양, 하지만 이건 제가 본 중 가장 아름다운 드레스랍니다. 이 단의 무늬가 보이세요? 이렇게 정교한 걸 짜려면 족히 일 년은 걸려요. 그리고 이 원단은, 이렇게 도톰한데도 이렇게 부드럽고 가벼워요.”
하지만 그녀는 내 말을 듣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내가 카이런 공작을 칭찬한 것을 내가 자기보다 그를 잘 안다는 과시로 받아들인 듯,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러면 자네가 입지 그래? 나는 이런 걸 입고 북부인들 앞에서 웃음거리가 될 생각은 없어.”
“프라일 양……!”
그녀는 금방 표정을 평화롭게 정리하더니 퍽 다정하게 말했다.
“나는 공작님께서 여자 옷 보는 눈이 없는 걸 조금도 원망하지 않아. 오히려 여자에게 선물을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서 기쁠 정도야. 그분의 정성에는 감사하지만, 역시 나는 저걸 입을 용기가 없어.”
그녀가 다시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러니 자네가 입어. 내 선물이야.”
“네?”
“나는 추워서 저걸 입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으니, 마음을 바꾼다면 공작님은 나를 변덕쟁이로 보실 거야. 그렇다고 버리는 것도 예의는 아니고. 하지만 공작님이 가장 아끼시는 시녀에게 선물하면 나도 좋은 일을 하는 셈이지, 안 그래?”
대체 어쩌다 이런 결론이 난 거지?
나는 멍한 채로 루엘라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녀가 떼를 쓰는 중인지 내게 화를 내는 중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루엘라는 그런 나는 안중에 없이 손짓했고, 밀라는 그 옷을 주섬주섬 접어서 내게 안겼다.
루엘라는 확답을 받으려는 듯 말했다.
“자네는 꼭 이 옷을 입고 축제에 가야 해. 알겠지?”
“…….”
밀라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가씨께서 대답을 기다리잖나.”
나는 아무 자각이 없는 상태에서 ‘네, 프라일 양.’하고는 방에서 나와야 했다. 가슴에는 나를 위해 맞춤 제작된 드레스 두 벌을 안고서 말이다.
❄❅❄
[시간이 지난 후에, 북부인들은 루엘라 공작 부인이 처음 북부에 발을 디뎠을 때, 북부에 비로소 첫 번째 봄이 왔다고 말하곤 했다.
그해처럼 따뜻하고, 환하고, 바람마저 부드러운 봄은 일찍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카이런 공작의 표정과 말투도 그러했다.]
원작의 한 구절을 떠올리며, 나는 내 방 침대에 침울하게 누워 있었다.
공작이 선물해준-루엘라가 선물해준? 나도 모르겠다-내 새 드레스들은 옷장에 소중하게 걸려 있었다.
그저 끝없이 속상할 뿐이었다.
남부 프라일령은 지리적 여건 탓에 내륙까지 세를 뻗치지는 못했으나, 상행위와 무역으로 번성했다. 부만으로 꼽자면 제국에서 으뜸가는 영지가 분명했다.
어쩌면 그녀가 유리 공방을 독점 사업으로 삼는 집안에서 자란 탓에, 그녀의 눈에는 광채를 띠고 반짝이는 것만 귀한 것으로 보이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내 드레스 여밈의 은은한 금사로 된 덧씌움 장식을 만들기 위해 어떤 수고를 들여 금사를 뽑아내는지, 여자들이 한 뼘의 띠를 직조하기 위해 몇 날을 목이 빠지라 베틀에 매달리는지 알지 못했다.
북부 여자들이 빙빙 도는 춤을 출 때, 그 띠와 특별히 가공한 꼰실로 만든 술장식이 날리며 얼마나 매력적으로 보이는지도.
내가 보기엔 카이런 공작이 한 벌 값으로 여러 벌을 주문했다는 것도 거짓말 같았다.
화사하고 밝은 색상이 아니어서 그렇지 보면 볼수록 내 작년 노랑 드레스와는 비교가 안 되는 고급품이었다.
나는 북부인들이 밝은색 옷을 피하는 것이 눈 녹은 물로 질척해진 길에서 흙탕물이 쉽게 튀기 때문이라는 것을 살면서 알았다. 게다가 나는 정원일도 자주 하므로 그런 색들로 고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루엘라도 그것을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나도 어떤 유리가 고급이고 아닌지 구분하지 못한다. 반짝이면 좋은 건가 보다 하고 불투명하면 질이 떨어지나 보다 할 뿐이다. 하지만 유리의 품질은 그렇게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그녀도 나도 잘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가 분명했다. 단지 그런 경험의 차이가 이런 식으로 부딪히는 것은 너무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나는 기이한 방법으로 내 품으로 찾아온 카이런 공작의 선물을 기뻐하며 입을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속상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카이런 공작은 루엘라가 언급한 드레스가 무엇인지 보지는 못했으나 상황을 짐작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했다. 루엘라의 엄청난 사치품의 대금도 치르지 않았는데 더 도착할 주문품이란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단지 그녀가 그것을 내게 버렸다는 것은 아직 모르겠지만.
루엘라는 축제날 내가 그 옷을 입었는지 아닌지 확인하려 들 것 같았다. 남은 방법은 카이런 공작의 눈에만 띄지 않는 것뿐이었다.
어차피 그는 그녀와 시간을 보내느라 바쁠 테니까.
나는 소심하고 비겁하기까지 한 해결 방법을 찾아낸 것으로 만족하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여주만 하르펠 성에 데려다 놓으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고 홀가분해질 줄 알았다. 하지만 정작 여주를 데려다 놓고 보니 하나하나가 다 고비였다. 나는 금방 진이 다 빠지는 기분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하는 것마다 꼬이는지. 원작의 그녀는 분명히 청초하고 조금 예민한 전형적인 미인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