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70/128)

63화

“헉, 공작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내가 발끈하자 그가 못마땅한 듯 나를 외면하며 혀를 찼다.

“보, 봄이 되면, 날이 더 풀리면 훨씬 나아지실 거예요. 사막과 멀지 않은 땅에서 자란 분인데, 여기는 얼음의 땅이라고요. 조금은 이해해주셔야 하잖아요.”

나는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변명하고는 내 자리로 돌아갔다.

저런 여자를 북부의 안주인으로 만들려고 목숨을 걸고 사막을 가로지르고 설산을 올라간 사람은 자기였으면서.

나는 루엘라 편을 들었지만 실은 속으로는 마음이 매우 복잡했다. 나도 내 여주가 자기가 어디로 찾아왔는지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를 여기로 불러들인 것은 내가 자초한 일이었다. 그녀는 우리를 고난에서 구해줄 부적 같은 존재였다.

나는 그렇게 단단히 마음을 먹어야 했다.

❄❅❄

“상황을 보고 와.”

정원을 돌보던 나를 찾아온 체이어스가 그렇게 말했을 땐,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루엘라의 방에 갔을 땐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상인의 하인들이 커다란 상자를 줄지어 들고 그녀의 방에 들어가고 있었다. 흡사 누가 이사라도 들어오는 것 같았다.

열린 문 안에서 루엘라는 밀라의 시중을 받아 새 외투와 드레스, 방한화 따위를 신어보고 있었다. 아직 열지 않은 상자가 산더미 같았다.

그녀는 나를 발견하자 활짝 웃었다. 나는 얼른 다가가 인사했다.

“프라일 양.”

“공작님께서 내 케이프가 얇아 보인다고 사라고 하셨거든. 이 정도면 북부의 겨울을 나기에 충분할까?”

나는 정신적으로 좌절하고 말았다.

그거 아닌데. 카이런 공작은 그냥 친절한 척하느라고 케이프가 얇다고 한 것뿐인데. 이렇게 루엘라 세 명이 나눠 입어도 될 만큼 쇼핑을 하라는 건 눈곱만큼도 아니었는데요!

하지만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기로 했다. 이 시점에 내가 카이런 공작이 검소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소리였다.

우리 남주는 부자다. 이따위, 혼수 준비라고 치면 될 게 아닌가.

“물론이에요. 곧 봄이 올 거거든요. 봄 축제 때 프라일 양이 독보적으로 돋보이실 게 분명해요.”

그러자 루엘라는 눈을 반짝였다.

“봄 축제?”

“네. 긴 겨울이 끝나고 북부인들의 삶이 시작되는 시기를 축하하는 거랍니다.”

“그렇구나! 알려줘서 고마워.”

내가 밖으로 나오자 나를 발견한 상인이 얼른 내 곁으로 붙어 서더니 내 팔을 툭 치며 속삭였다. 그는 루엘라에게 내 편지를 전해준 자였다.

“요즘 하르펠이 내 최고의 고객이야. 하하하.”

❄❅❄

집무실로 돌아가니 카이런 공작과 체이어스가 소파에 마주 앉아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들 중간의 탁자 위에는 상인의 청구서가 놓여 있었다.

흘끔 가서 보자…….

“헉.”

내가 내 입을 틀어막자, 카이런 공작이 나지막이 말했다. 분노할 가치도 없다는 싸늘한 냉소가 담긴 목소리였다.

“아리엘사, 나한테 물었던가? 내 심장이 막 뛰는지, 호흡이 불안정해지고 눈앞에 그녀만 보이지 않는지. 이 청구서를 보고 나니 내가 지금 그런 것 같은데.”

체이어스는 잔뜩 골이 난 사냥개처럼 이만 드러내고 으르렁대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건 복수입니다. 그녀가 가짜 편지로 자신을 놀린 걸 복수하는 겁니다.”

카이런 공작은 주먹으로 관자놀이를 괸 채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녀가 왜 이런 짓을 벌이는지 내가 직접 확인해보아야 할까, 아리엘사?”

“저기, 그게 프라일 양이 공작님의 말씀을 오해하셔서…….”

체이어스가 양손을 공중에 번쩍 들어 올렸다.

“오해!”

“공작님께서 지난번에 입고 있는 케이프가 얇아 보인다고 말씀하신 것을, 프라일 양은 필요한 걸 구입하라는 뜻으로 이해하셔서……. 그분은 북부의 추위를 많이 걱정하고 계셔서…….”

“하!”

“끄읍.”

카이런 공작은 헛웃음을 쳤고, 체이어스는 신음을 흘렸다.

체이어스는 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남부 여자들은 그래? 쯧. 네가 알 리가 없지.”

북부 토박이 아리엘사가 남부 귀족 영애가 어떻다고 말해줄 수 없는 건 맞는데, 체이어스의 신경질은 좀 마음이 상했다.

체이어스는 딱딱하게 말했다.

“공작님, 제가 찾아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선대의 어느 공작 부인도 이런 사치를 하신 적은 없습니다. 하물며…….”

‘있는데요. 카이런 공작님이 사모님이 사달라고도 안 한 걸 마구 사다 안기면서 온갖 사치를…….’

하지만 나는 머릿속으로만 불평할 수밖에 없었다.

카이런 공작은 내 머릿속까지 읽은 듯 나를 바라보며 가늘게 이를 갈았다. ‘내가 그랬을 리가 없잖아!’라고 말하는 듯이.

그리고 그는 나를 빤히 보며 체이어스에게 말했다.

“체이어스. 내가 여자 옷값을 치르지 못할 정도로 궁핍하던가?”

체이어스는 재빨리 흥분을 가라앉히고 대답했다.

“아닙니다, 공작님. 절대.”

“그러면 내버려 둬. 아리엘사.”

“네, 공작님!”

“가서 그녀에게 말해. 털가죽 케이프를 열 벌씩 가진 북부 여자는 없다고. 네가 못한다면 내가 하지. 물론 나는 그 말을 웃으면서 하지는 못할 거다.”

나는 기겁해서 대답했다.

“네, 전하겠습니다!”

❄❅❄

그날 이후 나는 카이런 공작과 눈을 마주치는 일을 슬슬 피하게 되었다. 용기를 내어 루엘라의 방에 몇 번 가기는 했다.

그러나 그녀의 순수한 눈을 보며 그녀에게는 상식적인 일이 북부에서는 사치일 수도 있다는 말을 절대 할 수가 없었다.

지금 그녀는 세상에 결핍이나 부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배우기 전이었다. 카이런 공작이 없는 세상이 갑자기 얼마나 공허해지는지 경험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니 그런 말을 들으면 카이런 공작이 자신을 푸대접한다고 여길 게 뻔했다.

서로 갈등하고 시련을 겪는 단계를 뛰어넘어서 주인공을 맺어주었더니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결국 내 책임이었다. 그들이 맺어지기만 하면 모든 게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나는 통탄했다.

복도에서 혼자 울먹거리는 나를 발견한 체이어스는 나를 구석으로 밀어붙였다.

“너, 프라일 양에게 말했어?”

“네, 네, 그럼요. 했죠.”

나는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그는 몸을 돌려 내 앞을 막아섰다.

내 대답은 게오르그를 처음으로 아빠라고 부를 때만큼이나 조잡했다. 그러니 빨리 도망가야 했다.

“말했냐고.”

“그럼요……. 흑, 할 거라고요!”

“언제?”

“내일……쯤이요?”

체이어스는 나를 한심하게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됐다. 네가 말은 무슨 말을 해.”

“흑. 저는 적절한 때를 보아서 하려고…….”

“얼씨구.”

세상에서 적당히 끝낼 수 없는 남자가 있다면 체이어스였다.

“흑…….”

“말 안 해도 돼.”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그 상인에게 앞으로 아가씨가 불러도 가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녀도 눈치가 있으면 알아채겠지.”

음……. 글쎄요?

하지만 과연 체이어스였다. 직접 말하지 않고도 해결하는 방법이 있었던 것이다.

고맙기는 너무 고마운데, 나를 멸시하듯 바라보는 체이어스가 얄밉기도 얄미워서 나는 뚱하니 말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말 못 한 거.”

“저 응석받이 영애께서 그런 소릴 들었으면 울고불고하지, 조용할 리 없잖아.”

‘응석받이’라는 체이어스의 정의를 부정할 마음은 들지 않아서, 나는 머리를 툭 떨어트리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체이어스 경.”

그는 돌아가려는 내 어깨를 붙잡았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그는 나직이 말했다.

“그녀는 우리 성의 손님으로 머물다 갈 거다. 잘해주려고 하지 마.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

“…….”

돌아오면서 속이 갑갑했다. 어째 다들 나보다 더 똑똑하고, 나보다 내 속을 더 잘 아는 것 같았다.

❄❅❄

카이런 공작의 집무실로 갔을 때, 루엘라가 방문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는 한결같이 명랑하고 화사하고 예뻤다.

내가 그녀를 바라보느라 잠시 정신을 팔았을 때, 그녀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리엘사, 차를 내오겠어? 새로운 걸로, 자네 판단력을 믿어볼게.”

“네, 프라일 양!”

나는 재빨리 그들에게 옌델 차를 내어주었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묽기 때문이다.

루엘라는 신이 나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린아이와 여자의 매력이 그렇게 황금 비율로 섞인 여자가 눈앞에서 눈을 반짝이며 웃고 있으니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카이런 공작의 아우라는 이제 느끼지 못할 만큼 익숙해졌지만, 루엘라의 아우라는 적응하기에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았다.

내가 이런데 남자들은 어떻겠냐고.

하지만 나는 차를 놓고 물러나는 나를 흘겨보는 공작의 순간적인 시선을 느꼈다.

또 뭐가 심통이 난 건지.

하지만 루엘라는 조금 들떠 있어서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저는 공작님과 봄 축제에 갈 게 너무 기대돼요! 거리 행렬은 어디로 이어지나요?”

카이런 공작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행렬은 없습니다. 아침에 태양께 바치는 제의를 치르고 밤이 되면 광장에서 젊은이들은 춤을 춥니다. 늙은이들은 먹고 마시죠.”

“아, 그렇군요.”

남부의 축제가 퍽 화려하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는 걸 보면, 북부의 봄맞이는 그녀에게 몹시 간소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약간의 실망을 미소로 훌륭하게 감춘 다음 말했다.

“그래도 그때는 꼭 공작님께서 사주신 봄 축제용 드레스를 입을게요. 공작님께서 직접 골라주셨다는 말씀을 듣고 너무 기뻤어요, 공작님.”

“……그렇군요. 루엘라.”

루엘라는 슬쩍 카이런 공작의 눈치를 보며, 조금 처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남부에서 자란 제 체질에는 조금 추울 듯싶어서 입기가 두려워져요……. 봄 축제 시기가 되면 북부는 매우 따뜻해지겠지요?”

그는 내가 봄에도 얼어 죽을 것처럼 굴던 게 생각났는지 나를 흘끔 보더니 루엘라에게 말했다.

“생각보다 따뜻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뜻대로 입으십시오.”

구석의 내 자리에 있던 나는 입을 쩍 벌렸다.

그가 봄 축제 드레스를 따로 골라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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