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그녀는 천진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순간 혼란스러웠고, 원작에서 그녀의 차 취향이 어떠했는지를 떠올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내가 생각나는 건 천신만고 끝에 그녀를 북부로 데려온 카이런 공작이 그녀를 아기 다루듯 했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무덤덤한 밀라의 얼굴을 한번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최대한 정중하고 자연스럽게 말하려고 애썼다.
“공작님께서 명하시면 그리하겠습니다. 프라일 양의 차는 묽게 타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
나는 혼란을 정리하지 못한 채 방으로 돌아갔다.
루엘라 프라일이 저런 성격이었나?
원작에서는 그녀를 후작의 부를 업고 황녀보다 더 귀하게 자란 영애로서 묘사했다. 카이런 공작과 그녀가 멀리서 스치며 서로를 의식하거나 할 때 말이다.
그러니 그녀의 개성이 드러나는 부분은 헤리어트와 대화하는 부분 정도였다. 하지만 헤리어트는 루엘라의 비위를 거의 완벽하게 맞추었기 때문에, 그녀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나도 처음 경험하는 중이었다.
원작에서는 그녀가 카이런 공작과 함께 하르펠로 왔을 때는 성은 안주인을 맞이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가 된 상태였다. 그러니 그녀는 자기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을 볼 필요가 없었다.
그때도 그녀가 공작의 차 취향을 건드렸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성에 온 당일부터 공작의 차를 자기 취향대로 바꾸려는 행동은 아무리 생각해주어도 좋게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이 성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울 책임이 있었다.
카이런 공작은 그녀의 아버지 레오르트 후작을 혐오하고, 체이어스도 그녀를 화근 덩어리처럼 보는데, 나까지 혼란스러워하는 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카이런 공작이 남부로 가서 그녀에게 구애하는 게 아니라 그녀가 북부로 와서 구애하는 상황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여러 가지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했다.
“다 내 탓이지 뭐.”
나는 혼자 꿍얼거렸다.
“내 탓이지 뭐…….”
❄❅❄
“공작님 차 드세요.”
다음 날 아침 내가 내어준 시나몬 차를, 카이런 공작은 찻물이 튀어 오를 만큼 거칠게 내려놓았다.
“이게 뭐지?”
카이런 공작은 나를 획 노려보더니 내게 들리도록 중얼거렸다.
나는 천장으로 눈을 굴리며 말했다.
“저기, 시험 삼아서 한번 드셔보시라고요. 프라일 양의 취향대로도 한번……, 사실 같은 음식을 함께 먹으면 더 빨리 친해지잖아요. ……별로세요?”
“제길.”
그의 대꾸에 나는 기가 죽어서 말했다.
“남부 음식은 풍미가 강하지 않데요. 게다가 지금 봄이라고는 해도 남부에 비하면 한겨울일걸요……?”
카이런 공작은 침음을 흘리며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나는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분을 만나니까…… 어떠셨어요?”
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사무적이고도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내가 사랑에 빠졌냐고 묻는 건가?”
내가 그렇게 물으려고 했었나 확신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나는 끄덕였다.
“나쁘진 않더군. 뜻밖에.”
“아…….”
카이런 공작은 공중 어디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내가 지금까지 만난 여자들과 분명히 느낌이 달랐어.”
역시, 주인공은 주인공끼리 통한 모양이었다. 아우라를 가진 남자는 아우라를 가진 여자를 알아볼 수밖에 없는 거다.
“그래서요?”
“그녀는 내가 본 여자 중에 가장 미인이야. 그건 부정할 수가 없군. 마주 앉아 있으면 마치 그녀의 피부에서 꽃향기가 배어 나오는 듯 착각이 들어.”
세상에. 여주의 매력과 존재감이 이 정도라니. 나는 좀 더 확실한 고백이 듣고 싶어 그에게 바짝 다가갔다.
“그리고요?”
카이런 공작은 짜증스러운 듯 펜을 탁 놓더니 나를 보았다.
“뭘 기대하는 거지?”
“막 심장이 뛴다든가, 호흡이 불안정해진다든가, 아무것도 안 보이고 그녀만 보인다든가…….”
“내가 병자로 보이나? 그 정도면 당장 쓰러져 죽었겠군.”
“공작님!”
나는 입술을 툭 내밀고 오랜만에 불평을 했다.
“좀 진지하게, 그분의 매력을 애써 부정하지 마시고…….”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건, 레오르트 후작이 저렇게 귀한 딸을 쫓아낼 수 있을 리 없다는 거야. 아리엘사.”
“…….”
카이런 공작은 나를 닥치게 하는 방법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레오르트 후작은 분명 딸을 간단히 추방할 자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 딸이 쪼르르 다른 남자에게 간 것을 두고 볼 사람도 아니었다.
카이런 공작은 오히려 그녀를 경계하느라 더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더듬거리며 말했다. 몹시 바보같이 말이다.
“사, 사랑을 믿으시라고요.”
나는 카이런 공작의 뚫을 듯 한심한 시선을 피해 내 구석 자리로 돌아가 자중했다.
❄❅❄
오후가 되었을 때, 집무실로 밀라가 찾아왔다. 그녀는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께서 공작님을 뵈올 수 있는지 물어보셨습니다.”
“곧 성벽을 둘러보러 나갈 것인데 동행하실 수 있는지 여쭤라.”
“네. 공작님.”
성벽 위를 둘러보는 건 그리 오래 걸리는 일이 아니었다. 좀 길게 시간을 보낼 것이지, 나는 카이런 공작이 루엘라를 푸대접하는 것 같아서 속이 상했다.
루엘라는 곧 집무실로 찾아와 금실 같은 금발을 늘어트리며 인사했다. 어깨를 감은 은사가 들어간 케이프가 퍽 아름다웠다.
“오늘도 공작님을 뵈니 기뻐요.”
루엘라가 눈을 반달처럼 접어 인사하자, 카이런 공작은 그 달빛을 받아 피어난 꽃처럼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북부의 찬 공기가 루엘라 양의 살결을 상하게 할까 두렵습니다.”
“어머,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루엘라는 얼굴을 환하게 밝히며 웃었다.
“성벽 위 순시라니 기대돼요.”
“케이프가 얇아 보입니다.”
카이런 공작은 루엘라의 뒤로 돌아서더니 자기 케이프를 그녀의 어깨 위에 걸쳐주었다. 그녀의 숄은 밀라가 얼른 받아갔고, 루엘라의 얼굴에는 숨기지 못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가는 몸이 슬쩍 휘청하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훌륭하게 균형을 회복하며 카이런 공작을 향해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카이런 공작의 가죽이 덧대진 케이프가 무겁기는 할 테지만…….
“무겁지 않으십니까?”
루엘라는 고개를 크게 저었다.
“아니에요. 공작님.”
아, 저 눈웃음…….
나는 우리 이슬 같은 여주가 카이런 공작과 나란히 나가는 걸 위태위태한 기분으로 바라보아야 했다.
“남자들이란.”
나는 무심결에 뱉고는 실소하고 말았다. 대체 내가 뭘 걱정했는지 말이다.
나는 카이런 공작이 그녀와 최대한 짧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루엘라를 성벽 순시에 데리고 갔다고 생각했다. 동선을 짧게 잡으면 십여 분 만에도 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한 시간이 다 되어가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도 루엘라에게 하르펠 성안까지 구경시키는 중인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돌아왔을 때, 나는 추위로 발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볼을 보고 얼른 차를 준비했다. 몹시 밍밍한 시나몬 차를.
“곧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프라일 양.”
많이 추웠던지, 그녀는 조금 멍해서 내 말이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카이런 공작은 그녀의 어깨에서 자신의 케이프를 벗겨주며 말했다.
“먼저 장작을 좀 더 넣겠나? 루엘라가 추워하고 있어.”
그들은 눈치채지 못했을 테지만 나는 잠깐 멈칫하고 말았다. 원작의 대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루엘라가 추워하고 있어. 다시 출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저 북쪽 끝 설산에 잠든 눈과 얼음을 양손에 쥔 신을 살해하러.”]
나는 드디어 캐붕이라는 비난 댓글까지 달렸던 그의 지독한 ‘루엘라 병’을 구경하게 되는 걸까?
나는 헛기침을 해 목을 고르며 대답했다.
“네, 공작님.”
나는 재빨리 벽난로를 뒤집어 불길을 피워 올리고 장작을 더 넣었다.
그러자 루엘라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공작님, 성벽 순시는 몹시 즐거웠답니다. 하지만 조금 쉬고 다시 뵈어도 될까요? 북부의 한파는 정말 상상 이상이로군요.”
“그렇게 하세요. 루엘라. 원하는 만큼.”
카이런 공작의 가식적으로 친절한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목구멍이 텁텁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바로 나가기에 방금 넣은 장작이 천천히 타도록 불가로 밀어냈다.
한파라니, 추위를 많이 타는 나도 저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그녀가 나간 후, 나는 좀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서 말했다.
“저렇게 추위를 많이 타는 분이랑 성안을 다 돌고 오시면 어떡해요.”
“쯧.”
카이런 공작은 내 말을 자르듯 책상으로 가더니 짜증스럽게 뱉었다.
“차.”
그가 오랜만에 까칠해진 터라, 나는 더 토 달지 않고 진하게 탄 시나몬 차를 내어갔다.
카이런 공작은 한 모금을 들이켰는데 미간에 주름이 잡혀 있었다.
아차, 겨울딸기 차를 낼걸.
속으로 진땀을 흘리는데, 카이런 공작이 신경질적으로 뱉었다.
“성벽만 둘러보았어. 고집은 어찌나 세던지!”
카이런 공작은 도저히 못 참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
“십 분이면 한 바퀴를 돌 것을, 남부 여자들은 추우면 다리가 고장 나나? 왜 제대로 걷지 못하는 거지?”
나는 그제야 그녀가 신고 있던 굽이 얇은 구두가 생각났다. 게다가 흰 직물 소재라 눈 녹은 물을 밟는 것이 지극히 꺼려졌을 것이다. 아차…….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설마 내성벽을 따라가는 가장 짧은 경로를 도는데 이렇게 오래 걸렸다고?
나는 더듬거리며 변명했다.
“얼음, 살얼음 위에서 잘 걷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질척하게 녹은 눈을 피하다 보면 균형을 잡기가 힘들기도 하고…….”
“그러면 고집부리지 말고 들어가자고 할 때 들어가야 할 것 아닌가.”
카이런 공작은 나를 째려보며 말했다.
“저런 여자가 북부의 안주인이었다고? 믿을 수가 없어. 계속 그렇게 주장한다면 너야말로 황제가 보낸 간자가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