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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68/128)

61화

카이런 공작이 더없이 우아하고 여유로운 얼굴로, 빙긋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가져갔을 때, 나는 분노하고 말았다.

평소에 내가 차를 타줬을 때, 단 한 번이라도 저런 얼굴을 하고 받아먹었으면 화가 안 났을 거다!

루엘라도 카이런 공작의 정제된 미소에 빨려들어 가는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찻잔을 들고 있었다.

“콜록! 콜록! 어머……!”

예쁘게 입을 가리고 기침을 한 루엘라는, 나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나는 재빨리 말했다.

“입맛에 맞지 않으셨습니까?”

“차를 이렇게 진하게 타다니…….”

카이런 공작은 안면에 건 은은한 미소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채로 말했다.

“시나몬이 입맛에 맞지 않으십니까, 프라일 양?”

루엘라는 카이런 공작과 시선을 맞춘 채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 끝에 걸린 미소는 투명한 호선을 그린 것 같았고, 금발은 빛을 내는 실타래처럼 은근히 물결쳤다.

아무리 주인공 버프라지만 비현실적인 비주얼이었다.

“아니에요. 공작님이 좋아하시는 걸 제가 안 좋아할 리가 없어요. 다음에는 제 하녀에게 차를 제대로 타라고 할게요. 꽃에서 직접 따낸 꿀을 넣어서요. 공작님께 드릴 선물로 가져왔답니다.”

“프라일 양은 상냥하시군요.”

별 얘기 아닌 것 같은데, 그녀는 순식간에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눈을 내리깔았다.

살짝 수줍어하는 몸짓이, 여자인 내가 봐도 애간장이 녹을 것 같았다.

“루엘라라고, 불러주세요. 공작님.”

“루엘라.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하지만 루엘라.”

“네, 말씀하세요. 공작님.”

그녀의 목소리는 비단처럼 부드럽고 레이스가 사각거리는 듯 명랑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이미 빠져 들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목소리였다.

그녀는 그렇게 대답하고 눈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카이런 공작을 향해 집중하듯 상체를 조금 숙였다.

“제 차는 제 시녀가 탈 겁니다.”

카이런 공작의 목소리는 너무나 차분하고 담백해서, 그 안에 담긴 매서운 선긋기와 거절이 마치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일인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루엘라의 얼굴이 순간 살짝 경직되는 걸 보고 나는 잠깐 아득한 기분을 느꼈다.

사치 속에서 곱게 곱게만 자란 남부 영애에게 카이런 공작의 까칠함은 마치 코트 없이 맞는 북풍처럼 느껴질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녀는 후작의 딸답게 표정을 재빨리 회복했다.

“그러면 제가 공작님의 시녀에게 꽃꿀을 맛있게 타는 법을 가르쳐줄게요. 걱정 마세요.”

나를 ‘공작님의 시녀’라고 부른 루엘라는 아마 내 이름을 잊어버린 듯했다.

어쨌든 카이런 공작은 그 외교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기대해보겠습니다. 루엘라.”

그 웃음이 얼마나 기쁜지, 루엘라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북부의 몇 년치 봄을 끌어모은 것 같은 미소였다.

“저는 공작님을 만나기를 얼마나 기대했는지 몰라요!”

나는 고개를 숙이고 슬쩍 집무실에서 물러 나왔다.

문을 닫고 다시 돌아서서 보니 이제 그곳은 내 일터가 아닌 것 같이 느껴졌다. 발을 들이는 순간 자기 영역으로 만들어버리는 루엘라의 보이지 않는 힘은 주인공만의 것이었다.

“너도 쫓겨났어?”

복도에 팔짱을 끼고 기대 있던 체이어스가 불쑥 다가왔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쫓겨나긴요, 눈치껏 자리를 비킨 거죠.”

체이어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난 쫓겨났는데?”

뜻밖이었다. 체이어스는 자기가 어디서 쫓겨났다는 말을 농담 삼아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도 갑자기 나타난 ‘카이런 공작의 여자’라는 충격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도저히 곁에서 지켜볼 수가 없던데?”

그는 나를 새삼 째려보더니 말했다.

“너, 이리 따라와.”

❄❅❄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나는 이제는 퍽 익숙한 술집 안 풍경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내 앞에 앉은 체이어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가 나를 취조실에 데려가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내 태도가 뚱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저 가서 프라일 양 침실을 봐드려야 하는데요.”

“그건 내가 했어.”

“체이어스 경이요?”

내가 몹시 미심쩍다는 얼굴로 바라보자, 그는 나를 세상에 또 없는 멍청이를 보듯 응시했다.

“내가 너라면 프라일 양 곁에 안 갈 텐데.”

“……네?”

“가문에서 추방당한 처지에 의지할 것은 공작님뿐이다. 네가 예뻐 보일 리가 없지.”

나는 헉하고 입으로 가져가던 잔을 공중에 멈추었다.

“제가 뭘, 추방이요?”

체이어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못마땅하게 노려보았다.

“그럼 프라일 양 혼자서 공작님을 만나러 왔을까 봐? 어느 가문에서 그런 걸 허락해준단 말이야.”

“펴, 편지가 들켜서……?”

체이어스는 창밖으로 눈이 녹아 제법 색이 다채로워진 거리를 응시했다.

“이때다 하고 공작님을 찾아 북부로 달려온 모양이지. 그녀에게도 하녀가 있으니 너는 딴생각 말아.”

“…….”

내가 기가 푹 죽은 얼굴을 하자 체이어스가 추궁했다.

“왜?”

“그분이……. 제 차를 안 좋아해요.”

“설마.”

나는 체이어스를 다시 생경하게 바라보았다.

“체이어스 경도 제 차 안 좋아하시잖아요.”

나는 언젠가 그가 내가 잘못 우린 릴리스 차를 뱉어버린 걸 기억하고 있었다.

“가끔 한 번씩 이상하지, 그 외에는……. 왜, 뭐라고 했길래?”

“진해서 별로라고……. 하지만 시나몬 차는 진해야 효과가 좋은데…….”

내 착각인지 아닌지, 체이어스는 웅얼대는 나를 잠시 불쌍하게 바라보았다.

“시나몬 차는 찌인하게 타는 거야. 남부인들이 뭘 알아.”

“그러게요. 남부에선 다르게 마시나 봐요.”

나는 그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딸을 쫓아냈다고는 하지만 레오르트 후작님께서 가만히 안 계실 텐데…….”

“하. 웃겨 죽겠네. 그걸 이제야 걱정해!”

체이어스는 내게 꿀밤을 놓으려 주먹을 쳐들었다가 멈칫 손을 내렸다.

나는 꿀밤을 맞아도 불평을 할 수 없는 입장이라 쭈구리처럼 머리를 떨구고 앉아 있었다. 그것은 지금 머리끝까지 화가 난 체이어스에게도 불쌍한 모양새인 것 같았다.

“왜 그랬어?”

나는 그의 표정이 묘하다고 생각했다. 화가 나는데 안도하는 듯도 보이고, 짜증이 나 미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묘하게 즐거워 보이기도 했다.

“지진 때문에 여기저기서 공사를 하는 동안 상인들이 많이 드나들었잖아요. 그 사람들에게 중부랑 남부의 여러 가지를 들었는데……. 체이어스 경은 왜 그렇게 사람이 무심해요?”

내가 갑자기 화살을 돌리자 체이어스는 정말로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했다.

“우리 공작님처럼 멋있는 분이 아직도 미혼이신데, 왜 아무도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느냐고요. 하르펠가의 대가 끊겨도 좋아요?”

“그거야, 그…….”

체이어스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중얼거렸다.

“위대한 그분의 짝이 쉽게 눈에 띌 리가 없잖아.”

나는 이쯤에서 일어나야 했다. 이야기가 더 깊어지면 내게 불리했다.

그러나 체이어스는 은근슬쩍 사라지려는 나를 불러 세웠다.

“아리엘사 로크만.”

“네?”

“네가 하르펠에 뭘 불러들였는지, 부디 알고 있길 바란다.”

“…….”

성으로 돌아가니 실내에서도 털목도리를 두른 중년의 여자가 나를 보고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남부인의 옷차림으로 나는 그녀가 루엘라의 하녀인 것을 바로 알아보았다.

그녀는 퍽 무뚝뚝했다.

“나는 밀라라 해. 아가씨가 찾으시네. 어서 따라와.”

나는 그녀를 따라가며 묘한 기분을 느꼈다. 공작님이나 체이어스 아닌 다른 사람이 오라 가라 하는 것이 처음이라, 기분이 묘하고 어색했다.

하지만 적응해야 하는 건 내 쪽이었다. 그녀는 이 성의 안주인이 아닌가.

밀라가 멈춘 곳은 언젠가 황태자에게 내어주었던 손님방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체이어스는 그녀에게 가장 좋은 손님방을 내준 모양이었다.

“저를 찾으셨습니까, 프라일 양?”

내가 들어가자 루엘라는 얼른 일어나더니 내 손목을 잡아끌어 자기 옆에 앉혔다.

“아리엘사 로크만. 공작님의 전속 시녀, 맞지?”

그녀는 그사이 하르펠 성의 사정에 대해 많이 알아낸 모양이었다.

하기는 하르펠 성의 하인들도 갑자기 나타난 영애에 대해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었을 테니, 밀라가 내려가 그들과 말을 섞기만 하면 정보를 모으는 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맞습니다.”

“아버지는 죽은 훈련대장이었고. 그 공으로 공작님께서 아끼신다지?”

“……그렇습니다.”

루엘라는 내 ‘죽은 아버지’를 언급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내가 이해해야 했다. 그녀는 워낙에 곱게만 자라서……. 그녀는 말 그대로 온실 속의 꽃처럼 자란 여자였다.

순수해서 아름답고, 순수해서 또 위험한 그런 여자.

그녀는 내 두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빛을 내는 하얀 손이, 손가락은 또 어찌나 가늘고 예쁜지, 내 손과 나란히 바라보니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녀는 설레어하며 말했다.

“마침 잘 되었어. 내게 카이런 공작님에 대해 말해줘. 그분은 어떤 분이셔? 정말 마물을 단칼에 베어내시는 분이야? 자네도 보았어?”

루엘라는 질문을 쏟아냈고,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것은 공작님과 차차 알아가셔야 하지 않을까요? 시녀가 공작님에 대해 어떻다 말하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라…….”

내가 말끝을 흐리자 루엘라는 몹시 실망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녀의 그런 얼굴을 보자, 나는 순간 머릿속에 있는 아리엘사의 기억까지 다 털어서 불어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이 그녀가 가진 주인공으로서의 인력이었다. 모두를 매혹하고, 그녀를 사랑하게 만드는 힘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바로 얼굴을 바꾸더니 결심한 듯 말했다.

“아니야. 자네가 옳아. 아랫사람이 그래서는 안 되지. 자네 입장에서는 내가 낯선 이인데. 내가 무리한 걸 부탁했어.”

“그리 이해해주시니 감사드려요. 프라일 양.”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나를 향해 끄덕여주었다.

“그럼 앞으로 공작님과 내 시나몬 차는 아주 옅게 타주겠어? 실은 아까 뱉을 뻔했지 뭐야. 자네가 나를 괴롭히려고 그러는 줄 알았을 정도야. 지금까지 아무도 내게 그런 차를 타준 적은 없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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