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카이런 공작은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입을 열었다.
“너는, 내가 연서를 쓰면 이런 소리를 지껄이리라고 믿었던 건가?”
“…….”
나는 ‘많이 틀렸나?’라고 생각했지만 입을 꾹 다물고 눈을 내리깔았다.
카이런 공작은 편지를 벽난로 안에 던져버렸다. 나는 놀라 벽난로로 손을 뻗었지만 이미 편지는 재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이방인.”
그의 살벌한 부름에, 나는 눈을 슬쩍 치떠서 보았다.
그러고 보면 나는 그날 이후 카이런 공작을 진심으로 무서워한 적이 없었다. 정원에서 내 정체를 발각당하고 죽을 뻔했던 그날 이후에는.
하지만 지금 그는 완전히…… 돌아 있었다.
“너는 포기할 줄을 모르는군. 그렇지?”
“죄송……합니다.”
그는 나를 싸늘하게 노려보다가 말했다.
“넌 실은 죄송하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숨을 쥐어짜듯 말했다.
“두 분은 오히려 저에게 감사하셔야 해요.”
“하……!”
카이런 공작은 기가 차다는 얼굴이었고, 나는 울적하게 말했다.
“원래라면 하냐크전에서 패전하고 도망친 공작님께서는 레오르트 후작님에게 몸을 의탁하게 돼요. 그때 루엘라 양을 만나지만 공작님의 처지가 처지인 만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물론 방해하는 사람도 많고……. 레오르트 후작님은 공작님을 장기말로 쓰고 버릴 생각이었던 데다…….”
“…….”
카이런 공작이 이를 바드득 가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들려서, 나는 쏟아내듯 빠르게 말했다.
“그때는 하냐크전이 황태자 전하의 농간으로 일어났다는 증거를 후작님이 쥐고 그걸로 공작님을 조종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죠. 후작님이 딸을 데려갔다는 이유로 공작님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대책만 세우면…….”
“그건 네가 생각해두지 않았나 보지?”
“…….”
카이런 공작의 빈정거림에 나는 고개를 푹 떨궜다.
애지중지 키운 딸을 몰래 꼬드겨냈으니 레오르트 후작이 분노할 것은 뻔했다. 전쟁을 선포한대도 할 말이 없었다. 체이어스가 흥분한 것도 분명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두 분은 운명이니까 모든 문제는 결국 해결될 거예요. 아니, 공작님이 결국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거예요. 그러면 제 역할도 끝나고요!”
나는 울컥 소리쳤지만 카이런 공작이 이를 빠드득 가는 소리에 입을 꾹 다물었다.
“너는……. 끊임없이 한심한 소리를 늘어놓는군. 대체 저 여자가 뭐라고!”
카이런 공작의 고함을 처음 들은 나는 놀라서 한 걸음 물러나고 말았다.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내가 원하던 일이 이루어졌는데, 그리고 그것은 옳은 일인데,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상황이 싫었다.
카이런 공작은 내 반응 때문인지 숨을 몰아쉬며 흥분을 다스리려고 했다.
“루엘라 프라일은 지금 즉시 돌려보내겠다. 레오르트 후작에게는 보상금을 치르겠어. 그자가 그것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방벽에 가서 마물을 마차 가득 잡아다가 실어주지. 남부에서 실컷 날뛰도록!”
나는 숨이 막혀 가슴을 눌러야 했다.
저렇게까지 화를 낼 줄이야…….
울고 싶다고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아서 내가 우는 걸 깨달았다. 내 치마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서러움에 압도당했다가,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해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가 화를 내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나도 힘들게 내 일을 해낸 것이었다.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카이런 공작과 마주 섰다.
“공작님.”
나를 외면하고 책상으로 돌아가려는 그의 팔 옷깃을, 나는 꽉 붙잡았다. 그가 어금니를 사리무는 게 보였다.
“저 때문이에요.”
카이런 공작은 엄청난 자제력을 쏟아부어 입을 꾹 다문 채 나를 바라보았다.
“전에 제가, 공작님께 왜 애처럼 그러시냐고, 자기 생각만 하시냐고 했었죠? 다 공작님 때문이라고…….”
그는 그때 생각이 난 듯 코웃음을 쳤다. 마치 ‘너는 그때부터 건방지기 짝이 없었어.’라고 말하듯이.
“작년의 지진은…… 저 때문에 났어요.”
“너는 체이어스 말대로 미쳤…….”
하지만 카이런 공작은 말을 잇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공작님이 후작님에게 억류된 다음 하르펠은 지독히 황폐해져요. 하지만 제가 하냐크전에 개입하면서 그 과정을 모두 뛰어넘게 해버렸죠. 그래서 이 세계가 지진을 일으켜 대신 하르펠을 황폐하게 만든 거예요.”
카이런 공작의 눈썹이 매섭게 일그러졌다.
그는 이 사이로 말했다.
“이방인…….”
“공작님은 남부의 장미, 루엘라 프라일 양을 만나야 해요. 공작님이 그분과 사랑에 빠지면, 이 세계에는 행복한 결말이 찾아올 거예요. 그러지 않는다면, 자꾸만 원래의 흐름대로 가려는 재앙들이 일어날 거예요.”
“무슨 헛소리를-”
“-공작님은 남부의 사막에 혼자 버려지고, 북쪽 끝 설산에서…….”
내가 붙잡은 카이런 공작의 팔은 단단하게 경직되어 경련하고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문 채 침묵했다. 다만 나를 노려볼 뿐이었다.
나는 고함치듯 말했다.
“두려우시다면서요! 이 땅을 지키지 못할까 봐 두려우시다면서요. 루엘라 프라일이 바로 공작님의 모든 것을 지키는 방법이에요!”
“…….”
내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을 본 카이런 공작은 시선을 돌려 집무실 공기 중 어디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괜히 눈물을 닦으며 그에게서 조용히 물러났다.
“온실에 나비 푸는 것 잊지 마세요. 그분이 좋아하세요.”
나는 카이런 공작이 루엘라 프라일을 가지기 위해서 사막에서 맞을 뻔한 죽음을 피한 채 해피엔딩을 맞이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치러야 할 대가가 있었다. 카이런 공작은 불명예를 감당해야 했고 후작가와의 갈등에서 변명해야 하는 위치에 처하고 말았다. 그리고 아마 그는 앞으로 나를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슬펐다. 몹시.
❄❅❄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도 없는데, 체이어스가 나를 깨웠다. 그는 아직도 화가 안 풀렸는지 숨결이 거칠었다.
“공작님께서 프라일 영애를 받아들이기로 하셨다. 심지어 그 편지도 공작님이 쓴 것으로 해야 하니 입단속 하라고 하셨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너는 알지?”
체이어스는 거의 나를 증오하는 눈길로 쏘아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상대할 기력까지는 남아 있지 않았다.
카이런 하르펠 공작이 자기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운명에 따르기로 했다는 사실은, 이상하게도 내게 아무런 위안도 주지 않았다.
나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래요? 잘됐네요. 마침내 하르펠에도 안주인이 생겼네요.”
그 말을 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울컥 솟아서, 나는 숨을 꼭 참고 침대에서 나왔다.
다 잘 되었는데, 다 원작대로 되고, 고생 없이 해피엔딩으로 나아갔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카이런 공작에게 느껴지는 이 감정은 설마 배신감일까…….
하지만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내가 원한 것이었잖아.’
나는 바보같이 굴지 않기로 했다. 저 혼자 세상의 희생자이자 피해자인 듯한 시늉은 관두기로 했다. 그러지 않으면 나는 다시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말 것만 같았다.
체이어스는 내가 매무새를 정리하는 동안 몸을 돌려 섰다. 그의 등은 화가 나 있었다.
“집무실로 가. 네가 끌어들인 여자니까 네가 감당해.”
❄❅❄
집무실 문을 열자 내가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카이런 공작이 누군가를 향해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 앞에 마주 앉은 사람은 말도 안 될 정도의 금발 미인이었다.
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 미인, 루엘라 프라일의 몸에서는 카이런 공작처럼 은은한 광채가 깃들어 있었다. 주인공의 아우라였다.
그녀는 무슨 말인가에 웃다가, 방금 들어와 우뚝 선 나를 향해 여전히 웃는 채로 눈을 돌렸다.
그녀는 자신의 연인을 만나서 잔뜩 들떠 있었다. 그리고 카이런 공작은 아마 루엘라의 환상을 깨지 않으려고 연기하는 중인 듯했다.
내게도 낯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나는 재빨리 문을 닫았다. 그리고 시녀가 안주인에게 하듯 깍듯하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프라일 양. 저는 공작님의 시녀 아리엘사라 합니다.”
내 태도에 담긴 의미를 읽은 카이런 공작의 눈매는 순간적으로 날카로워졌다.
그는 시선을 내리깔고 자기 표정을 감추었다.
자기를 둘러싼 세 사람의 복잡한 심경도 모르고, 루엘라는 한껏 기쁘게 말했다. 가볍고 맑아서 새가 지저귀는 듯 들리는 목소리였다.
“아리엘사, 예쁜 이름이네. 공작님의 시녀는 이름도 예뻐요!”
“차도 잘 탑니다.”
“어머, 정말이요? 북부에도 차가 유명하던가요?”
“아리엘사의 차는 그럴 겁니다. 아리엘사. 프라일 양에게 시나몬 차를 준비해줘.”
“네, 공작님.”
나는 얼른 머리를 숙이고 물러났다.
카이런 공작이 그녀에게 처음으로 대접하기 위해 고른 차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시나몬 차라는 사실에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진심인 것이다. 해피엔딩 루트로 가기로 마음을 굳힌 것이다.
하기는, 카이런 공작이라면 자기 선택에 따라서 영지에 어떤 재난이 찾아올지 모른다는 말을 듣고서 무시하지는 못할 터였다. 하르펠가는 북부의 수호를 목숨처럼 여기는 자들이었다.
게다가 남자치고 이 세계의 여자주인공 루엘라에게 반하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시끄럽던 머릿속이 차를 타다 보니 조금 안정되었다.
일어나기로 되어 있던 일이 일어나는데, 일일이 슬프고 기쁘고 할 필요가 어디 있다고…….
차도를 배운 것도 아닌데, 매일 차를 타며 내 마음도 수양이 된 모양이었다.
나는 한결 안정된 마음으로 두 잔의 시나몬 차를 따랐다.
찻잔을 받쳐 들고 소파로 가는데 빛을 내는 두 사람이 앉아 있으니 눈앞이 산란했다.
이 세계에는 선글라스가 없습니까?
나는 매우 조심스럽게 테이블에 차 두 잔을 올려놓았다.
금방까지 차를 타며 상당히 진정했다고 생각했지만, 내 평정은 금방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