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알아보니 중부의 여자 옷값은 몇 배나 저렴하더군. 네 봄 축제 드레스 말이야. 물론 내 취향에 맞는 걸로.”
“흡.”
카이런 공작의 말에, 식은땀이 훅 올라오는 것 같았다.
잊고 있었는데!
첫 번째로는 포목점의 벨리아가 카이런 공작에게 대체 얼마나 바가지를 씌운 것인지, 그녀의 안위가 두려웠다.
그리고, 늘 중대사를 결정하느라 바쁜 그가 내 옷을 구하려 상인에게 따로 알아보기까지 했다는 사실이 뜻밖이었다.
내가 하르펠가의 여자도 아닌데, 영지를 다스리느라 늘 바쁘고 힘든 그의 머릿속에 내 드레스까지 공간을 차지했다는 사실이 의아하면서도 이상한 기분이 들게 했다.
하지만 나는 그다음에 떠오른 생각에 재빨리 진정했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그가 마지막에 뭐라고 그랬지? ‘네’ 취향 말고 ‘내’ 취향……?
내 감동 돌려줘!
그는 내가 납득할 수 없이 비싼 노란 드레스를 입고 광장의 불가를 굴러다니는 꼴이 그렇게 보기 싫었던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벨리아가 또 바가지를 씌우면 이번에는 눈감고 넘어가지 못할 것 같아서 이번에는 아예 다른 데서 구해오려는 것인지도 몰랐다. 심정적으로 그녀는 게오르그의 미망인이나 다름없었으므로 화를 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머리 털이 서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내가 그의 뒤에서 저지르고 있는 범죄에 비하면, 그가 남의 취향이나 옷 고를 권리를 침해하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그의 말을 들었다.
방금 내 머릿속에 어떤 생각들이 스쳤는지도 모르고, 그는 덤덤하게 말했다.
“땅이 녹으면 바로 온실을 지어줄게. 너에게는 가혹한 기후였을 거다.”
꼭 그렇지는 않은데……. 나는 북부에서 이번 겨울을 가장 따뜻하게 보낸 사람이었다. 카이런 공작 덕분에 말이다.
실은 최근에는 아무것도 즐겁지 않았는데, 옷 선물에 온실까지 지어준다는 말에, 마음이 봄눈처럼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공작님!”
나는 기쁜 마음 그대로 환하게 미소를 지었고, 카이런 공작은 묵묵히 차를 마셨다.
❄❅❄
그사이에 남부 프라일령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는 한꺼번에 설명하는 게 낫겠다.
어떤 것은 당사자나 주변인에게 들은 것이고 어떤 것은 눈치로 알게 된 것이며, 그 시점도 제각각이기 때문에 종합해서 말하는 것이 이해하기 편할 것 같아서다.
‘남부의 장미 루엘라 양에게 안부를 건넬 기회를 놓쳐 아쉬웠다’는 내 첫 번째 편지는 루엘라를 겁먹고 긴장하게 했다.
마물을 붙잡아 그 자리에서 생이빨로 물어뜯어 마석을 꺼낸다는 카이런 공작이-남부인 상당수는 마석 채취 과정을 그렇게 알고 있다고 한다-자신에게 비밀스럽게 편지를 전한 것은 공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뒤이어 전달된 편지들을 읽고서, 그녀는 뜻밖에 카이런 공작이 다정한 순정남이라는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가슴이 묘하게 떨려왔고 말이다.
나는 여자를 유혹하는 내 뛰어난 능력을 새삼 확인하면서, 동시에 나를 유혹하는 남자가 없다는 사실에 짙은 회의를 느꼈다.
나는 빙의할 장르를 잘못 배정받았던 것은 아닐까…….
어쨌든, 루엘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카이런 공작에게 답신을 쓰지 않는 것은 무례한 일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마침내 답장을 쓴다. 카이런 공작과-나와-편지를 주고받으며, 연심을-나와-키워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에는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 그러나 이 경우는 꼬리가 길어서 밟힌 것이 아니라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케이스였다.
어느 날 카이런 공작으로부터 다정한 답신을 받은 루엘라는 헤리어트에게 그것을 자랑하고 만다. 헤리어트는 외사촌이면서 그녀가 어릴 적부터 가장 친하게 지낸 친구였기 때문이다.
‘헤리어트, 내 감정이 저 정원의 장미 넝쿨처럼 자꾸만 자라가는 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북부의 지배자가 이 먼 곳의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시는 것 같아. 마물로부터 세상을 지켜야 할 분이 내가 있는 남부만 지켜보며 한숨을 쉬고 계시니, 이 일을 어쩐다지……?’
오해 마시기를. 이 대사는 순전히 내가 재구성한 것이다. 실제로 그녀가 뭐라고 말했는지는 나는 전혀 모른다.
그렇게 헤리어트는 프라일가의 유리 장인들에게 북부산 화상 특효약을 제공해주는 대신, 자신의 연심은 벌겋게 데이고 만다.
심지어 그 대상이 여느 귀족도 아니고 황제도 건드리지 못하는 북부의 지배자 카이런 공작이 아닌가.
아마 헤리어트는 그녀에 대한 자신의 절망과 질투를 처음부터 연심으로 의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촌 여동생을 아끼는 사랑 정도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는 단지 분노한 채로 레오르트 후작을 찾아간다.
그 북부의 야만인이 루엘라를 몰래 꼬드기고 있다고. 우리 루엘라를 집적대다니, 그자가 미친 것이 틀림없다고.
그러나 자신과 같이 분노하여 하르펠에 전쟁이라도 선포하려 들 줄 알았던 레오르트 후작은, 뜻밖에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후작은 헤리어트에게 함구할 것을 명령한 다음 돌려보내고, 그때부터 헤리어트는 탈모가 올 만큼 고심한다.
아, 탈모 부분은 내 논리적인 추론이다.
그러나 현재 카이런 공작의 위세는 어느 때보다 더 드높아진 상태였다.
사람들은 카이런 공작이 하르펠을 방문한 황태자를 땅바닥에 처박았다는 소문이 돌자 공작가와 황가에 흉흉한 갈등이 생길 것을 예상하며 두려워했다. 그런 일은 절대 묻고 넘어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이런 공작이 다른 귀족의 지원도 없이 북부 병력만으로 단기에 하냐크족을 물리치는 전공을 세우자, 아무도 그런 과거는 기억하지 않게 되고 말았다.
따라서 이 시점의 레오르트 후작은 카이런 공작을 절대 멸시할 수 없었다. 오히려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 온 상황에 가까웠다.
헤리어트는 혼자서 분을 삭이고 괴로워해야 했다.
레오르트 후작이 침묵 속에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는 걸, 이 시점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후작은 단지 딸의 비밀 연애를 못 본 척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내 계획이 몹시, 어쩌면 지나치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만 믿고 있었다. 원작의 힘에 이끌려 두 사람이 필연적으로 가까워지는 중이라고 믿으면서.
하지만 그 착각은 냇가를 덮은 두껍고 투명한 얼음에 막 금이 생기기 시작한 이른 봄에, 그 얼음처럼 쩍 금이 가고 말았다.
❄❅❄
“공작님, 루엘라가 왔어요!”
루엘라 프라일이 성 앞에서 마차에서 내려서 그렇게 말했을 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북부인은 아무도 없었다.
마침내 얼음이 녹기 시작한 봄의 아침. 사람들은 창고에서 장작을 꺼내오거나 가축을 몰고 들판으로 나가느라 저마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성 앞을 지나던 이들은 북부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화려한 백색 마차가 성 앞에 도착한 걸 보고 신기해서 흘끔 보았을 뿐이다.
그 마차에서 내린 엄청난 미녀와 처음 눈이 마주친 북부인이 체이어스라는 사실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마차에서 내린 루엘라는 남부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강추위에 몸을 오싹 떨며, 자신의 마차처럼 새하얀 눈이 반사하는 빛이 눈 부셔 눈을 질끈 감았다.
아침 경비 상황을 보고하러 공작의 집무실로 가던 체이어스는 마차에 새겨진 프라일가의 장미 덩굴 문양을 보고 당혹하고 말았다.
나도 그날 평소처럼 집무실로 향하다가, 복도 창을 통해 성 입구에 세워진 새하얀 마차를 보았다.
나는 카이런 공작의 일정에 대해서는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저런 고급 마차를 타고 올 손님이 있다는 것이 뜻밖이었다.
그래서 유심히 살펴보니 익숙한 덩굴장미 문양이 보였다. 프라일가의 장미 문양이.
내가 미친 듯 달려가 집무실 문을 열었을 때, 이미 안에 있던 체이어스는 말 그대로 달려와 내 멱살을 붙잡았다.
“너! 너! 너……!”
체이어스가 내 멱살을 마구 흔들기를 멈추었을 때, 나는 카이런 공작이 손에 쥐고 있는 편지를 보았다.
나는 그것을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 편지들은 내가 그의 이름으로 루엘라 프라일에게 보낸 것들이었다.
“흐…….”
숨이 잘 쉬어지지 않으니 이상한 숨소리만 흘러나왔다.
“아리엘사, 의사 선생이 뭐라건 상관없어. 널 가둬놓겠다! 미친 거야. 너는 돌아버렸어!”
이번에는 카이런 공작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애써 호흡을 조절하고 있었지만, 어떤 경우에도 평정을 잃는 일이 없다는 그가 저 정도로 씩씩거린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 치면 난동을 부릴 정도로 흥분했다고 봐야 했다.
체이어스는 심지어 말을 더듬었다.
“이, 이 필체는 너야. 그렇지? 네가 이 편지를 프라일가 영애에게 보냈어?”
나는 거의 개미가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물었다.
“프라일 가에서 항의하러 사람을 보냈어요?”
“항의? 이게 항의로 끝날 일 같아?”
체이어스는 입술을 달달 떨며 말했다.
“프라일 후작의 딸이 직접, 직접 왔다.”
체이어스가 숨을 쉬지도 않는 것처럼 보여서, 나는 재빨리 물을 떠 왔다. 체이어스는 물잔을 내 손에서 채어서 단숨에 마시더니 말했다.
“그녀가 공작님께 몸을 의탁하러 왔다.”
“헉…….”
“헉? 놀랐어? 놀랄 거면서 이런 짓을 해? 하르펠이 이제 막 안정을 찾았는데-”
“-체이어스.”
카이런 공작의 목소리가 흘린 살기는 우리 둘을 동시에 입 다물게 했다.
체이어스는 숨을 한 번 쉰 다음 대답했다.
“네, 공작님.”
“나가 있어. 아리엘사와는 내가 얘기하겠다.”
“크흠……. 네.”
체이어스는 이를 악문 채 나가버렸다. 나는 그제야 다리가 풀려서 소파에 털썩 앉았다.
하지만 카이런 공작은 그 자리에 서서 내가 쓴 편지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읽어도 읽어도 믿을 수가 없는 듯했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내가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방 안에 우레처럼 울리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