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만난 적도 없는 남자에게 이렇게 민망한 연애편지를 받으면 무서워서 도망가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내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 남부 영애와 북부 공작이 만나도록 등을 떠밀려면 최소한 중간에 길은 닦여 있어야 했다.
그러니 그 둘이 운명적인 사이라는 사실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진짜 운명의 짝이라면 이름만 불러도 반해야 하는 것 아닐까?
나는 억지로 그렇게 믿으며 두 개의 편지를 봉하고 잠들었다.
그리고 새벽에 일어나 카이런 공작의 집무실에 가서 몰래 그 봉투에 카이런 공작의 사무용 인장을 찍었다.
❄❅❄
그리고 몇 주 후, 내가 프라일가에 배달을 맡긴 상인이 나를 몰래 찾아왔을 때, 주방 창고에서 차를 꺼내던 나는 심장이 툭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순간 이성을 잃고 그의 멱살을 붙잡았다.
“안 들켰어요? 들킨 거예요?”
그러나 덩치 좋은 노인은 몸을 흔들흔들하면서 만면에 너털웃음을 흘렸다.
“얼마나 짭짤한 벌이인데 들키면 안 되지요.”
나는 손을 놓고 몹시 찜찜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게 편지를 내밀었다.
“답장을 받아왔습니다.”
“…….”
나는 ‘끕’ 비슷한 소리를 내며 숨을 참았다.
드디어, 드디어 일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클라이맥스로 가는 서막이 열린 것이다.
“뭘 그리 놀라요?”
“이, 이게, 그분이 직접 쓴 답장이 맞아요?”
그는 클클 웃으며 가버렸다.
나는 그가 덩달아 매우 행복해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문득, 그가 루엘라에게도 배달료를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 부수입이면 그가 입이 찢어질 만도 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어서, 나는 차도 잊고 얼른 내 방으로 달려가 편지를 뜯어보았다. 장미 문양이 그려진, 은은한 향기까지 나는 편지였다.
<북부의 위대한 지배자의 명성은 이곳 남부까지 전해져 있으니 불미한 여인이 공작님의 이름을 못 알아들을까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
가슴이 너무 둥둥 뛰어서, 요즘은 이러다가 내가 부정맥으로 일찍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어서, 나는 잠시 두 손을 겹쳐 가슴을 누르며 누워 있었다.
성공했다! 나는 두 사람을 연결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나는 편지를 계속 읽었다.
루엘라는 이번 화상약 거래에 대해서 전해 들었고, 북부 사람들은 무섭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예쁜 약병을 만든 걸 보니 몹시 친근하게 여겨졌다고 했다.
“으으으!”
나는 환호성을 지를 뻔한 것을 이를 꽉 악물어 참았다.
약병마다 그녀의 취향인 나비 장식을 오려서 달아주느라, 나는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일 뻔했다. 그런데 그것이 좋았다고 언급하니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그녀는 자기 생각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카이런 공작에게 무례하다거나 불쾌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수줍고 소심했을 뿐, 카이런 하르펠의 구애를 기꺼워하는 게 분명했다.
저절로 숨이 찼다.
그녀의 필체는 부드럽고 아기자기했다.
이런 게 진짜 귀족 아가씨의 필체구나.
나는 상단에 장미 덩굴이 장식된 편지지를 뚫어지라 보다가 처음처럼 곱게 접어서 내 서랍에 넣고 잠갔다.
침대 위에 앉아 내려다보니 무릎 위에 둔 내 손은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결국 남부의 장미는 북부의 ‘위대한 그분’의 존재를 인지하고 말았다. 그동안 그렇게 힘차게 밀어도 꿈쩍 않던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가 마침내 회전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눈을 꼭 감고 심호흡했다.
솔직히, 정말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름다운 편지지에 차곡차곡 쌓인 루엘라의 글자들을 바라보며 그 글자의 양만큼 내가 카이런 공작을 잃어가는 듯 느꼈다.
“아주 바보같이.”
나는 심호흡을 한 번 더 해서 빨라진 심장을 다독였다. 내가 이렇게 바보 같고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걸 알면 게오르그가 실망할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게오르그도,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정답을 향해 나아가야 했다.
❄❅❄
집무실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루엘라에게 보낼 편지의 문구를 생각하다 보면 하루가 금방 갔다.
그 길다는 북부의 겨울도 그렇게 성큼성큼 멀어져갔다.
그간 나는 ‘얼어붙는다’는 말이 실제로 어떤 것을 말하는지를 확실히 알게 되었지만, 북부인들은 절대 눈과 얼음에 지지 않았다.
그사이 한 가지 독특한 풍습을 알게 되었는데, 이번 겨울처럼 추위가 혹독한 해에는 폭설에 집이 파묻히거나 강추위에 문이 얼어붙어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다. 예전에는 그렇게 굶어 죽는 사람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때에 사람들은 집안에서 피리를 불었다. 사람들은 그런 날씨가 지나고 난 다음에는 의무적으로 마을을 돌아다녔고, 피리 소리를 들으면 집을 파내주었다. 그러면 그 집 주인은 함께 다른 집을 살펴보러 다니며 도왔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나로서는 끔찍한 일이었지만, 나는 추위를 불평하는 북부인들을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심지어 들개풀 동상약을 푹푹 발라대면서도 말이다.
나는 왜 북부에서는 죽은 전사들이 하늘에서 굴러가는 태양을 지키는 소임을 맡게 된다고 믿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태양이야말로 이곳의 삶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이며 늘 그립고 바라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랑하고 의지했던 이들이 자신의 삶을 여전히 지켜주고 있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다행히 하르펠 성은 북부의 추위에 대한 저항본부 같은 건축물이었다. 내 방이나 카이런 공작의 집무실에는 늘 난방이 넉넉하게 되었기 때문에, 나는 큰 고생 없이 겨울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북부도 올해 바위가 얼어붙은 기록적인 추위-무슨 뜻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였다고 했음에도, 가축 몇 마리가 동사하고 동상약이 동난 것 말고는 무탈하게 보냈다.
평소처럼 벽난로 장작을 뒤집고 있던 어느 저녁, 카이런 공작은 갑자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방인.”
나는 놀라서 방 안을 흘끔 돌아보았다.
물론 집무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내가 최근에 몰래 편지를 쓰면서 들킬까 봐 불안증이 생긴 탓이었다.
“요즘 무슨 꿍꿍이지?”
이 남자, 버거웠다. 검술도 신의 경지라더니, 촉도 귀신같았다.
“네? 무슨……. 하하, 차 드릴까요?”
나는 카이런 공작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시나몬 차를 타왔다.
찻잔을 책상에 놓으며 활짝 웃자 그는 인상을 썼다.
그리고 그는 창밖으로 눈 쌓인 성탑을 보며 차를 홀짝였다.
“솜씨가 점점 나아져.”
“감사, 합니다.”
“북부의 삶도 어지간히 익숙해진 게지.”
“네. 공작님. 덕분에 언제나 열심히 지내고 있어요.”
실은 즐겁게 지내고 있다고 인사치레를 하고 싶었는데 말이 이상하게 나오고 말았다. 몰래 그의 편지를 꾸며내는 일이 적잖이 힘들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카이런 공작도 나를 흘끔 돌아보았지만 토를 달지는 않았다.
“봄이 오면 영지 순시를 갈 거다. 따르지.”
“제, 제가요?”
‘안 되는데요! 그러면 편지를 못 보내는데요?’
내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리자 카이런 공작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겁먹지 않아도 돼. 체이어스에게 너를 잘…….”
카이런 공작이 갑자기 말을 멈추어서, 나는 다음 말을 기다리며 그의 입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는 무엇이 생각난 듯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체이어스는 제 할 일을 잘하니까 너도 네 할 일 잘하며 따라와. 크게 고생스럽지 않게 할 테니.”
“체이어스 경이야 원래…….”
하필이면 하르펠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과 나를 비교할 건 뭐란 말인가.
나는 울고 싶은 심경이다가, 퍼뜩 새로운 생각을 해냈다.
편지를 미리 많이 써두었다가 상인에게 한 번에 한 통씩만 배달해달라고 하자. 아니 두통이나 세 통씩만.
아니다. 이 정도면 정기배송인데 계속 그렇게 비싸게 받는 건 말이 안 된다. 내가 파산하기 전에 협정요금으로…….
그는 안중에 없이 내 머릿속에서 다른 생각이 팽팽 돌아가고 있는 게 티가 났는지, 카이런 공작이 불쾌한 헛기침을 했다.
“네. 공작님. 감사합니다. 공작님.”
나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말했다.
“우리 겨울은 잘 난 거지요?”
그러자 그는 좀처럼 짓지 않는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내가 그렇다고 하지 않았나.”
그도 이 혹독한 겨울이 무사히 지나간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봄이 오면 또 축제가 열리나요?”
“또 울면서 돌아오려고?”
“제가 언제 울었다고…….”
작년 봄 축제에서, 나는 최고로 예쁘게 꾸미고도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빠른 댄스 행렬의 속도에 엉덩방아를 찧고 울면서 돌아오고 말았다.
게다가 내 파트너는 벌로 나를 데리고 나온 체이어스였다.
그때는 왜 그렇게 서러웠던지.
하지만 나쁜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불타는 성탑을 우리 둘만의 모닥불 삼아 카이런 공작과 단둘이 춤을 추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가만히 보면, 그는 이따금씩 돌발적인 행동을 하곤 했다. 한결같은 까칠하고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채로 말이다.
“올해는 춤을 제대로 추게 만들어주지.”
“……!”
잠시 추억에 빠져 있던 나는 그가 툭 뱉은 말에 정신을 차렸다.
말의 내용으로는 남들 앞에 선보일 수 있을 만큼 춤을 제대로 가르쳐주겠다는 뜻 같았는데, 어쩐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왠지 제대로 못 했다간 죽을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어…….”
하지만 벽난로가 조용히 타오르는 실내의 평화로운 공기가 내 공포감을 이기는 바람에, 나는 가만히 있었다.
아무렴 어떠려고.
나는 벽난로의 장작을 뒤집어주었다.
작년에 입었던 그 노란 드레스를 다시 입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 옷에는 너무 많은 추억이 서려 있었다. 게오르그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내가 그 옷을 입고 밖에 나가기만 하면 어느 늑대 같은 사내놈에게 물려가서 시집가게 되리라고 믿던 게오르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카이런 공작이 불쑥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