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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64/128)

57화

내 썰매를 밀어주던 체이어스는 내 고함이 시끄러운지 짜증 난 표정을 짓더니 투덜거렸다.

“뭐야, 눈 처음 보는 사람처럼.”

“하하하! 더 빨리, 더 밀어주세요!”

체이어스는 툴툴거리면서도 속력을 높여 내가 탄 썰매를 밀어주었다.

주변에서 썰매를 타던 꼬마들이 아리엘사 누나는 어른이 왜 그러냐고 투덜대는 것 이 스치듯 들렸지만 나는 하나도 신경쓰이지 않았다.

지칠 때까지 썰매를 탄 나는 썰매에서 내렸다가 다리가 풀려 눈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이 싫지 않아 그대로 누워 하늘을 보았다.

체이어스는 열이 올라 얼굴이 벌게진 채로 내 곁에 앉았다.

누워서 그의 입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보니 즐겁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나는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식사는 제가 대접할게요. 따뜻한 걸로요.”

체이어스는 나를 빤히 보더니 헤쭉 웃었다. 약간 불길한 웃음이었다.

“밥은 됐고, 따라와.”

그가 나를 이끈 곳은 술집이었다.

이곳에 올 때마다 유쾌하게 끝난 적이 없었던 탓에 나는 조금 쭈뼛거렸다. 그러나 체이어스는 이미 안으로 들어가서 창밖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술집 안은 후끈할 정도로 더웠다. 바깥 추위에 익숙해져 있던 몸이라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미 술집 안에는 손님들이 꽤 있었고, 우리처럼 첫눈을 즐기고 손발과 볼이 언 어른들이 하나둘씩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그레녹 둘이요.”

체이어스가 말을 하긴 했지만, 주문을 받으러 온 점원은 이미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술잔 두 개를 들고 와 있었다. 그는 바로 술잔을 놓고 돌아갔다.

나는 체이어스가 밀어주는 술잔을 빤히 바라보았다.

따뜻한 술이라니. 부모도 못 알아보게 만든다는 그…….

“추위에는 더운술이 최고지.”

“…….”

이상하게도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직 해가 지기 전인데 취하면 어떡하느냐 든지, 카이런 공작의 똥고집에 대해서는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어쩌면 그동안 북부인들에게 뱃심 같은 것을 배운 것 같았다. 어떤 고난이 닥쳐와도 제자리에서 단단히 버티면서 기회를 기다리는 근성 같은 것 말이다.

오래 참으며 준비한 자가 내보이는 추진력은 무서운 법이다.

나는 술잔을 반이나 비우고 캬아 하고 술잔을 탁 놓았다. 그러자 체이어스는 겁에 질렸다.

“너, 이게 뭔 줄 알고 그렇게 빨리 마시…….”

“뭐 하세요? 잔 안 비우고!”

“헉……. 꼭 게오르그 경처럼 마시네.”

체이어스는 무심결에 실수해버린 듯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나는 얼굴을 붉히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아리엘사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츤데레 아저씨는 매해 첫눈이 올 때마다 아리엘사를 데리고 얼음판을 제패해버렸다. 아리엘사는 그의 격렬한 썰매 운전에 겁에 질려 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오랜 기억에 나는 마음이 따뜻해져서 웃고 말았다. 날이 이렇게 추워지면 그 근육질 기사님도 좀 쉬시려나.

“너무 재미있었어요. 체이어스 경.”

내가 웃으며 말하자 체이어스도 웬일로 웃었다.

“간만에 기운을 차린 것 같아서 좋네.”

“…….”

나는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그가 나를 적대시하고 경계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를 신경 쓰고 있었다니 뜻밖이었다.

나는 김이 서린 술집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거 참 낭만적인 것 같아요.”

“낭만?”

체이어스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나를 보았다. 그 표정은 마치 카이런 공작이 ‘사랑?’하고 코웃음 치던 때를 떠올리게 했다.

북부 남자들 정말.

“첫눈 올 때 모두 나와서 노는 거요. 긴 겨울 동안 눈과 얼음 때문에 살기 힘들어질 텐데도 첫눈을 즐기는 마음을 잃지 않잖아요.”

체이어스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그렇다고 치자.”

“북부인들은 여자의 환심을 어떻게 사요?”

“넌 북부인 아니냐?”

나는 흠칫 찔렸지만 이미 추위에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 있었기 때문에 티가 덜 날 것이라 태연한 척을 했다.

“아니, 남자들이요.”

체이어스의 동공은 급격하게 흔들렸다. 어지간해서는 무너지지 않는 사람인데, 이 술이 독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음……. 아니, 그런 걸 뭐 하러.”

“아니, 왜 그렇게 화를…….”

내 질문이 개인적인 것은 아니었는데, 이렇게 버럭 할 일인지 나는 조금 억울해서 말했다.

체이어스도 조금 과하다고 생각했는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말했다.

“크흠, 흠. 오늘처럼 첫눈 올 때 썰매를 밀어주기도 하고…….”

“에이……. 안 돼요.”

체이어스가 나를 쏘아보았다.

“왜? 왜 안 되는데?”

“썰매는 너무 재미있다고요. 너무 재미있어서 남자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어요. 그리고 친하지도 않은 남자 앞에서 소리 지르면서 신나게 놀 수도 없잖아요.”

“그러……니?”

“또 다른 건요?”

체이어스는 술을 한 모금 마시고 퉁명스레 물었다.

“그게 왜 궁금한데?”

나는 재빨리 변명을 생각해냈다.

“저도 시집가야죠.”

“읏!”

체이어스는 술잔을 너무 쾅 내려놓았고, 술잔은 위로 방울지어 튀며 그의 손을 적셨다. 마침 지나가던 점원이 행주로 닦아주었다.

나는 뾰로통하게 말했다.

“봄 축제 때에도 데이트 신청 못 받았는데 알아두기라도 해야죠. 설마, 체이어스 경도 연애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는 거예요?”

“미치겠네.”

“맨날 나만 보면 미치겠대.”

나는 혼잣말처럼 투덜대며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내가 시집간다는 게 그렇게 충격적인 일인지. 사람을 어떻게 보고 그러는지, 나는 정말로 기분이 좀 상해서 말했다.

“안 알려주실 거면 이만 가볼게요.”

그러나 체이어스가 먼저 벌떡 일어났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너 시집 못 가.”

“헉! 무슨 악담을 그렇게 대놓고…….”

경악하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체이어스는 돈을 치르고 나가버렸다.

“눈치 없는 여자애들은 시집 못 가.”

❄❅❄

체이어스와의 첫눈 맞이 썰매는 어이없이 끝나버렸지만, 차라리 그게 잘된 일이었다.

방으로 돌아왔더니 갑자기 다리가 풀려서 나는 조금 비틀거리며 침대에 쓰러졌다.

썰매 타기는 생각보다 격렬한 운동이었고, 거기에 취기까지 더해지자 몸이 너무 노곤했다. 나는 금방 잠들고 말았다.

내가 잠을 깬 건 한밤중이었다. 나는 그제야 불을 켜고 외투를 벗고 책상 앞에 앉았다. 술이 상당히 깼지만 아직은 나른한, 환상적인 상태였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서 지필묵을 꺼냈다. 아니, 종이와 펜을 준비했다.

내 마음은 경건했고, 몸과 마음의 상태는 최적의 조건에 맞추어져 있었다.

취기의 도움을 빌어 몹시 감성적이고, 조금 무모한 상태 말이다.

역시 취기와 깊은 밤의 감성은 연애편지를 쓰기에 최고의 재료였다.

<오늘 북부에는 첫눈이 왔소. 하르펠의 백성들은 광장에서 썰매를 타면서 첫눈을 축하했습니다.

아름답고 순수한 존재가 멀리서 다가와 모든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광경을 바라보며, 나는 당신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눈이 어디서 태어나 이 땅에 내려오는지 북부에서 나고 자란 나조차 모르는 것처럼, 당신이 먼 남부에서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 자라왔는지 나는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이 나타났을 때 내가 얼마나 순수한 마음으로 기뻐할 것인지만은 확신할 수 있으므로, 기꺼이 이 바보 같은 마음을 종이에 적습니다.>

나는 편지를 다시 읽으며 한숨을 폭 쉬었다.

나는 루엘라 프라일 영애에게 편지 한 통을 배달하기 위해, 내 일 년 급여의 반 정도를 써야 했다.

유리 생산 기술을 특급 기밀로 취급하는 프라일가의 영애에게 몰래 이런 편지를 전하는 위험부담에 대한 대가였다.

하르펠 성과 중부를 드나드는 상인이 프라일가에도 드나든다는 말에 그런 거금을 주고 편지 전달을 부탁했지만, 생각해보니 꼭 한 번에 한 통일 이유는 없었다.

첫 번째 편지는 대략, 내가 하필 이때 영지 시찰을 나가는 바람에 이번에 화상약을 거래하게 된 프라일 후작가의 영애에게 안부를 전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남부의 장미라 불리우며 아름다움과 고결함으로 이름 높은 루엘라 양에게 안부를 전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느라 나는 밤을 새우고 말았다…… 따위의 민망한 내용이었다.

물론 이 모든 편지의 발신인은 카이런 하르펠 공작이었다.

잡힌다면 목이 두 번 잘릴 짓이었다.

어쨌든, 답장이 오고도 남을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는 두 통을 함께 보내보기로 했다.

배달해주는 상인에게는 자기 사정으로 두 통이 쌓였다고 말하라고 하면 된다.

배달비가 이 정도 거액이라면 마음 같아서는 편지를 박스째로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너무 뜸해서 한번 찔러보는 것처럼, 혹은 너무 잦아서 질척대는 듯 느껴져도 안 되므로 속도 조절이 중요했다.

게다가 첫눈이 온 오늘은 연애편지를 쓰기에 적당한 밤이었으므로.

<나는 지금 하르펠령의 북쪽, 인간들이 갈 수 있는 땅의 최북단에 있습니다.

마물을 지키는 방벽에서 친애하는 프라일 양에게 편지를 쓰게 될 줄은, 맹세코 상상한 적이 없습니다.>

“암요. 상상한 적이 없으실 겁니다.”

나는 기분이 깨지기 전에 얼른 이어서 썼다. 하지만 내가 그 방벽에 가본 적이 없어서 쓸 말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곳은 이미 한겨울이라니 그것에 대해서 쓰면 쉬울 것 같았지만, 계절 소재는 이미 이 앞 편지에서 사용해버리고 말아서 망설여졌다.

<나는 이 방벽을 완벽히 지킬 것을 맹세합니다. 그것이 곧 당신이 있는 남부도 마물로부터 보호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면 그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매우 조심스럽게 펜을 놓았다. 혹시라도 펜에서 잉크 방울이 튀어 편지를 망치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온몸을 떨며 몸서리쳤다.

“어우, 어우, 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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