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63/128)

56화

하지만 그가 그럴수록 내 마음에는 옅은 안도감 같은 것이 찾아왔다.

나는 이제 그의 아우라를 바라보는 게 힘겨웠으니까.

나는 가끔 장부 계산을 돕거나 정원에 심은 시나몬을 돌봤다. 내 일상은 그게 다였다.

그사이 하르펠은 가을의 끝에 들어섰다.

❄❅❄

카이런 공작의 장담은 사실이었다. 그는 자기가 확실히 아는 것만 단언하는 사람이었다.

날이 추워지기 전에 성벽은 전과 다름없이 보수되었고, 추수도 깔끔하게 끝났다.

무너진 집과 축사도 모두 보수되었다. 남부에 화상약을 판 돈이 이 자재를 사들이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한다.

게다가 황실은 이제 자신들의 약점을 잡은 카이런 공작 건드릴 수 없었으니 외부의 적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

모든 것이 다 순조로웠다. 카이런 공작이 자신하던 대로.

그러나 그런 그도 유일하게 안심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북쪽의 마물을 지키는 방벽이었다.

그는 체이어스와 함께 북쪽 방벽의 상태를 점검하고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영지 끝으로 떠났다. 이곳이 추워지기 시작했을 땐, 그곳은 이미 한겨울이라고 했는데.

나는 그동안 시간의 틈에 빠진 것 같은 지루한 몇 주를 보냈다.

그 밤에, 나는 벽난로를 쬐며 이제는 정말로 추워져서 나 때문에 수고스럽게 불을 피웠다고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문득 고개를 드니 컴컴한 창밖에서 눈송이들이 신기루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첫눈이었다.

“아…….”

나는 내 입을 꽉 막았다. 왜인지는 정말 모르겠다. 나는 울컥 울음이 올라왔고, 또 너무 서러웠다. 어쩌면 내가 이 세계로 빙의되어버렸을 때보다 더 서럽고 두려웠다.

그동안 내가 느꼈던 즐거움과 기쁨이 내 곁을 지켜주던 카이런 공작의 존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깨달음이 왜 이렇게 날이 선 듯 내 가슴을 베고 지나가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그가 없으니 이렇게 마음이 무너지는 것도.

물론 나는 그가 무사히 돌아올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가 남부와 교섭을 시작했으니 이 세계는 그에게 다음 시련을 던지기를 망설이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나는 바람이 불어 컴컴한 어둠 속을 헤매듯 흩뿌려지는 커다란 눈송이들을 보며 내가 진짜로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그의 귀환임을 깨달았다.

그가 돌아오면, 나는 그를 보내야 한다.

그때 집무실 문이 열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평소처럼 말이다.

오랜만에 돌아온 카이런 공작은 아침에 나갔다 들어온 사람처럼 보였다.

“공작님!”

“차.”

“……네!”

나는 어두운 집무실을 조금 더 환하게 만든 그의 아우라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조금 멍한 상태로 대답했다.

그는 실내가 덥다는 듯 재킷을 벗어 소파 위에 걸쳤다.

나는 그의 재킷을 가져가 걸어놓은 다음 찻물을 얹었다. 그의 변함없는 아름다운 모습을 확인하고 나니 몇 주간 졸였던 마음이 풀어지며 안도감이 밀려왔다.

조금 전까지 느꼈던 두려움이나 상실감 따위는 온데간데없었다.

나는 찻주전자를 보고 서서 그에게 등을 내보인 채 물었다.

“북쪽은 어떠셨나요, 공작님?”

“방벽은 지진에 흔들리지 않아. 마물들은 태양이 뜨는 한은 영원히 그것을 넘지 못한다.”

그는 자랑스러운 사실을 말하듯 또박또박 말했다.

“눈이 쌓이기 전에 도착하셔서 다행이에요.”

카이런 공작은 창밖을 응시하며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조금 서둘렀어.”

“잘하셨어요.”

“빨리 안 돌아오면 네가 달아나고 없을 것 같아서. 너는 혼자 두면 위험하거든.”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겨우 조그맣게 대답했다.

“농담도…….”

그러자 그는 정말 농담이었다는 듯 낮게 클클 웃었다.

나는 그를 따라 컴컴한 창밖을 바라보았고, 그는 낮고도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눈과 얼음에 굴복한 적 없다.”

나 또한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무것에도 굴복한 적 없는 사람이었다. 사랑 말고는.

내가 술이 깨는 데 도움이 되는 따뜻한 약차를 따라 가져가자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방인.”

그가 나를 그렇게 부른 것이 너무 오랜만이어서, 나는 잠깐 움직이는 것을 잊고 말았다.

“네. 공작님.”

“이리 와.”

그의 얼굴은 조금 피로해 보였으나 평온했다. 나는 그래서 더 두려웠다.

빨리 찻물이 끓어 차를 내놓고, 나도 빨리 돌아가 쉬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거역할 수도 없어서, 조심스럽게 걸어 그의 앞으로 갔다. 그러나 내 움직임이 조심스러워질수록, 심장은 점점 더 빠르게 뛰었다.

그가 내 손목을 붙잡아 당기는 바람에 나는 그의 곁에 앉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벽난로의 불빛에 내 손바닥을 비춰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이제 상처도 못도 없었다.

나는 손목을 틀어 빼려다가 그가 놓아주지 않아 포기하고 말았다. 이 사람을 자극하는 건 현명한 행동이 아니라는 걸, 나는 잘 알면서도 종종 잊곤 했다.

“하지만 두려웠어.”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두렵다는 고백을 평생 처음 하는 자의 것이었다.

“다시 신이 분노하여 이 방벽에 금이 간다면, 다시 신이 분노하여 나의 성과 땅이 폐허가 된다면, 그래서 백성들이 굶주려야 한다면……. 나 때문에.”

“…….”

그는 내 말을 뇌리에 박아두었던 게 틀림없었다. 북쪽 방벽에 다녀온 몇 주간 그는 내내 나의 말을 곱씹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나는 하르펠이다. 이 땅의 산 것 모두를 지키는 자이기에 그들은 나를 ‘위대한 그’라 부른다. 그런데…….”

이제 내 심장은 더 느리고 확실하게 뛰었다. 쿵. 쿵. 쿵.

“공작님.”

“하지만…….”

나는 괴로운 듯 말을 멈춘 그를 애원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공작님이 그녀를 사랑해주지 않는다면 당신이 두려워하는 그 일들이 결국 일어날 거예요.’

하지만 나는 그에게 그런 말을 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똑똑한 그가 스스로 깨달아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누군가를 사랑하라고 협박하는 게 대체 가능한 일인가.

그는 말을 멈춘 채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침묵 속에서 나를 쏘아보기만 했다.

“나가.”

“……?”

“이만 돌아가라. 피곤하군.”

카이런 공작은 나를 무시하듯 튜닉의 끈을 풀어 내렸다. 나는 막 끓으려던 주전자를 내려놓고 잰걸음으로 집무실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내 가슴이 왜 그렇게 아팠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그가 동요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해야 했다.

마물을 막는 북쪽의 방벽만큼이나 단단한 그의 고집이 조금이라도 허물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조금씩 허물어트리다 보면, 내가 북부 지배자의 의지를 꺾는 날도 오지 않을까.

내 가슴이 얼마나 아프건…….

나는 용기를 내야 했다.

“세상에!”

다음 날 아침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 나는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늘 시커멓게만 보이던 성 밖의 침엽수림은 오늘 새하얀 담요를 덮고 있었다.

도톰한 눈이 검은 숲을 무겁게 감싼 광경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나는 오싹 추워서 내 어깨를 감싸 떨면서도 창밖의 광경을 한참 눈에 담았다.

“공작님! 좋은 아침입니다.”

출근한 나는 카이런 공작에게 활기차게 인사했다.

계속 그와 어색하고 불편한 공기 속에서 지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분위기를 흩어버리는 건 언제나 내 몫이었다.

카이런 공작은 그런 내가 못마땅한 듯 바라보았고, 나는 그가 입을 열기 전에 말했다.

“차를 내오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콘솔 테이블로 가는 대신 창가에 멈춰 서고 말았다. 성벽과 성탑 위에 두꺼운 눈이 쌓인 모습이 너무 멋있었다.

순찰을 도는 병사들은 고생스럽겠지만.

어느 틈에 카이런 공작이 내 뒤에 서 있었다.

“이것은 너에게도 첫눈이겠군.”

나는 조금 미안해졌다. 어색하고 불편한 공기를 흩어버리려고, 그가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 너무 멋져요.”

“흥. 곧 질리게 될 거야. 올겨울은 눈과 얼음을 양손에 쥔 신이 잔뜩 성질을 부릴 테니까.”

“그래도 북부인들은 지금까지처럼 집안에서 이 겨울을 잘 견뎌낼 거잖아요. 공작님이 지켜주시니까요.”

“…….”

나는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곧 몸을 돌렸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었다.

“릴리스 차를 내겠습니다.”

내가 차를 낸 뒤에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놀란 아이처럼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오후에 눈이 그쳐서 섭섭해하고 있을 때, 체이어스가 집무실로 왔다.

“공작님, 눈 피해는 없습니다.”

“좋아.”

“아리엘사를 잠시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경, 북부에 무사히 다녀…….”

체이어스에게 인사를 하던 나는 울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남부에 화상약 납품을 끝낸 뒤로는 지겨울 정도로 아무도 내게 일을 시키지 않았는데, 하필 눈 오는 날 뭘 시키려고!

그러자 카이런 공작은 몹시 못마땅한 기색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저기, 저는, 바빠서…….”

그러나 체이어스는 내가 들고 있는 수틀을 보더니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따라 나와, 아리엘사. 든든히 입고.”

나는 목도리에 귀마개에 장갑까지 중무장을 한 채로, 입을 댓 발이나 내밀고 그를 따라 나갔다.

그러나 나는 조금 후에 악을 쓰고 있었다.

“아하하! 너무 재미있어요! 체이어스 겨엉! 아하하하!”

북부인들은 생존에 집중력을 발휘하는 만큼이나, 짧은 순간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첫눈에 맞추어 광장의 반에 물을 뿌려 열렸다. 그 위에 눈까지 쌓여 얼어서 천연 눈썰매장이 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어른들도 쏟아져나와 아이들과 섞여서 썰매를 타고 놀고 있었다. 첫눈에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나와 노는 북부의 풍습이 분명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