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손에 물도 묻히지 않는 루엘라에게는 전혀 필요 없는 약이지만, 그녀는 포장에 반해서 연고 한 병을 갖고 싶다고 조심스럽게 조르기도 할 거다.
그러면 헤리어트는 조금 망설이는 듯하다가 ‘이거 곤란한데 네가 청하니 어쩔 수 없잖아. 후작님께는 비밀이야.’ 하면서 내밀겠지.
물론 그 약병은 미리 받아둔 여분이었을 거고. 샘플 말이다. 샘플.
그는 철저하고 지독한 레오르트 후작을 두려워해서 그를 숫자로 속이는 짓은 절대 하지 않았다.
나는 밑도 끝도 없이 그가 남부로 돌아가 일어날 일들을 상상했다. 아니 솔직히 망상을 펼쳤다.
하지만 영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원작에서 헤리어트는 루엘라를 그런 식으로 다정하게 대하며 그녀의 곁을 맴돌았기 때문이다.
루엘라의 방에는 그가 공방에서 가져다준 최고급 유리 공예품들이 벽 가득 장식되어 있었다. 모두가 ‘비밀’인 반짝이는 유리 공예품들이.
자기 사촌을 짝사랑하다니. 저건 또 무슨 비극적인 운명인지.
그가 루엘라에게서 카이런 공작을 떼어놓기 위해 한 짓들은 이가 갈리지만, 또 이렇게 한발 물러나서 보면 측은하기도 했다.
❄❅❄
밤에 내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그것이 체이어스임을 직감했다.
그러고 나서 이제 내 방에 찾아올 사람은 체이어스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자 조금 슬퍼졌다.
체이어스는 내 방에 들어오더니 나를 빤히 바라보았고, 나는 배시시 웃었다. 그의 얼굴은 분명히 화가 나 있지 않았다.
“얼마나 받으셨어요?”
“흠.”
체이어스가 웃음을 숨기지 못해서 나는 마음을 턱 놓고 말았다.
“체이어스 경?”
“뭐, 적당히. 그 대금은 요긴히 썼다. 무너진 집 백 채 정도는 네가 수리했다고 생각해도 돼.”
“헉, 정말요?”
나는 탄성을 내놓고는 그를 조금 미심쩍게 보았다.
이번 거래를 주선한 내 목적은 프라일 후작가와 인연을 맺는 것이었기 때문에 큰 이득은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너무 뜻밖이었다.
나는 체이어스를 살짝 흘겨보았다.
“대체 얼마나 바가지를-”
“-추가물량 만드는 건 너도 도와.”
“네?”
“네가 준비한 양의 두 배를 계약했어. 네가 포장한 건 그 프라일 놈이 가져갔고, 나머지 물량은 다음 달까지 보내야 한다. 네가 저지른 일이니 너도 도와.”
“흑…….”
“내일부터는 들개풀 뜯으러 다녀야겠구나. 들개처럼. 크크크.”
들개풀은 북부에서 들개가 돌아다니는 곳에서는 어디든 자란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했다. 당분간은 나도 땅만 보고 다녀야 할 모양이었다.
이런 걸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체이어스는 진심으로 즐거운 듯 킬킬대며 울상을 한 나를 바라보았다.
“이 거래는 앞으로도 계속 우리에게 이득을 안겨줄 거야. 그런 생각은 어떻게 해냈지?”
“사실은…….”
내가 입을 열자 체이어스는 혹해서 집중했다.
“사실은, 이문이 많이 남으면 온실을-”
“-하! 내가 너한테 무슨 기대를!”
체이어스는 신경질을 내며 나가버렸다.
실은 그것은 체이어스를 쫓아내려고 한 말이었다. 눈치가 귀신같은 그가 내가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걸 눈치챌까 봐서 말이다.
이제는 온실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내년에 영지 사정이 나아지면 예전의 평범한 온실만 지어주어도 좋았다.
체이어스를 쫓아낸 나는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제부터가 난관이었다.
나는 카이런 공작을 모르는 루엘라가 그에게 반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영지를 지키는 것 말고는 관심이 없는 카이런 공작이 ‘뱃속이 마물이나 다름없는’ 혐오스러운 남자의 딸에게 반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세상 최고의 난이도다.”
나는 이불에 얼굴을 파묻으며 혼자서 중얼거렸다.
❄❅❄
다음 날부터 내 생활은 상당히 바뀌었다. 아침 일찍 집무실에 가서 처리할 장부가 없는지 확인한 다음, 차를 끓여놓고 성 밖으로 나갔다.
그것은 카이런 공작이 출근하기 직전 시점이었기 때문에, 그러면 오히려 그는 딱 알맞게 식은 차를 마실 수 있었다.
그리고 종일 마을 여자들과 들개처럼 쏘다니며 들개풀을 베었다.
며칠은 풀을 베고, 조를 바꾸어 며칠은 그걸 가공해서 연고를 만드는 식으로 작업했다.
이따금 체이어스가 작업장에 나타나 나를 흘겨보고 비웃을 때는, 정말로 달려가 그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하지만 당연히, 나는 체이어스를 향해 썩은 미소만 보내고 말았다. 모든 일의 원흉은 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밤에 돌아와서는 방에서 수백 마리의 작은 종이 나비를 오렸다.
나비, 나비, 나비!
나는 차츰 나비 혐오자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상태가 더 위험해지기 전에 모두의 도움으로 기간에 맞추어 납품을 마칠 수 있었다. 남부와의 첫 거래를 성공적으로 완료한 것이다.
남부로 떠나는 동상약, 아니 화상약 배송 마차를 배웅하고 집무실로 돌아온 나는 뻐근한 어깨를 두들겼다. 며칠간 커다란 솥에 녹인 연고를 젓느라 어깨에 무리가 가서였다.
책상에 앉아 있던 카이런 공작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시끄러워.”
나는 좀 서러워서 입을 내밀고 뭐라고 말대꾸를 하려다가 말았다.
내가 들개풀 연고를 만드는 일에 투입된 건, 지금은 아이들도 다 나와 일을 할 만큼 모두가 바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 내가 몰래 프라일가에 편지를 보낸 벌이기도 했다.
“죄송합니다.”
“아리엘사.”
나는 주눅이 든 채로 카이런 공작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오늘 연고를 다 보냈다지?”
“네. 저도 정말 힘들게 벌을-”
“-벌을 받아야지?”
“……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저, 저기, 벌로 일주일 넘게 하루 종일 들판에서 허리도 못 펴고 풀 베고, 연고 솥 온종일 젓고, 밤에는 포장하고, 지금 제 어깨가 아주……. 게다가 나비……. 그 수많은 나비…….”
“나비?”
카이런 공작은 내가 헛소리라도 하는 것처럼 찌푸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아서, 카이런 공작이 내 손을 붙잡아 가져간 것도 한 박자 늦게 알아차렸다.
들개풀을 베느라 내 손바닥에는 자잘하게 긁힌 상처가 가득했고, 몇 시간씩 솥을 주걱으로 저으면서 못이 박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무슨 벌을 더!
“…….”
카이런 공작은 내 손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의 후끈하리만치 더운 손바닥의 체온을 느끼며 갑자기 울컥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잔뜩 찌푸린 얼굴은 마치 나를 걱정하는 듯도 보였다.
그가 가끔 이러는 게 너무 싫고 또 미웠다. 세상 까칠한 사람이 왜 나한테만, 남들 안 볼 때 가끔씩 이렇게만 다정하게…….
공작이 침음을 냈을 때, 나는 그만 서러움이 복받쳐서 울음을 삼켰다.
“흑…….”
요즘 왜 감정적으로 자꾸만 무너지는지, 나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벌이 뭐라고 말한 적 없는데.”
나는 카이런 공작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체이어스는 연고 추가 물량을 나더러 책임지라고 했을 뿐이고, 연고 만드는 게 힘드니까 그것이 벌이라고 믿어버린 건 나였다.
“흡……. 흐흐흑!”
결국 울음을 터트렸을 때, 내 턱이 치켜 올라갔다. 카이런 공작이 손끝으로 내 턱을 치켜들고 있었다. 내 오른손은 아직 그에게 붙잡혀 있었다.
나는 끅끅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분노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오히려 너무 차가워서 살짝 한기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나는 그가 화가난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손이 이 지경이 되도록?”
“흑…….”
“다 나 때문이라고 했지? 아리엘사.”
나는 고개를 푹 떨궜다. 아니, 떨구려고 했다. 하지만 카이런 공작이 내 턱을 놓아주지 않아 눈을 꼭 감아버렸다.
“대답해.”
나는 몸을 빼내려고 했지만, 대신 그가 붙잡고 있던 손이 그의 몸쪽으로 확 당겨졌다.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거지? 설명해.”
나는 그를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거부할 수도 없을 것이다.
마음속에 자포자기하는 기분이 들었다.
“공작님 앞에 예정된 일들은 공작님 혼자만 겪으시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들…… 북부인들이 다 함께 겪게 될 일이에요. 공작님이 그녀를 만나시기만 하면 일어나지 않을…….”
나는 신음을 내지 않으려고 이를 꽉 문 채 버텼다. 내 손목을 지나치게 세게 붙잡았다는 걸 깨달은 카이런 공작은 나를 확 놓고 돌아섰다.
나는 고개를 푹 떨군 채 중얼거렸다.
“벌, 내려주세요.”
“됐어. 이제는 네 말을 듣고 싶지 않다.”
나는 그의 등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이불 속에서 한참 울었다.
왜 슬픈지 설명하라면 할 수 없는데, 확실한 건 몹시 서러웠다. 앞으로 많은 난관을 이겨내야 할 그도, 그리고 그의 한 발 뒤에 서서 그것을 지켜보아야만 하는 나도…….
나는 이제야 내가 진짜 벌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