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60/128)

54화

“들개풀 연고는 동상과 화상에 동시에 효과가 좋대요. 북부에서 동상 연고로 사용하는 것뿐이지…….”

“뭐……?”

체이어스는 기가 막혀 더는 말을 못하겠다는 얼굴로 카이런 공작을 쳐다보았고, 카이런 공작은 침음을 흘리며 끄덕였다. 그도 들개풀 연고의 효과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지금 영지 자금 사정도 좋지 않으니까……. 들개풀은 북부에서 가장 흔한 잡초니까, 그야말로 땅 파서 장사하는 거잖아요.”

나는 항변하듯, 그러나 조그맣게 말했다. 체이어스는 이제는 말도 더 섞기 싫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를 쏘아보기만 하던 카이런 공작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래서, 영지 재정을 위해 나를 사칭했다?”

“그게……. 제가 공작님이라고 말한 적은 없고……. 하르펠령에서 관심이 있다고만…….”

“아리엘사!”

버럭 소리친 체이어스에게, 카이런 공작이 싸늘하게 물었다.

“헤리어트라는 자, 어떤 자지?”

“레오르트 후작의 처조카로 유리 공방 관리와 거래를 맡고 있습니다. 후작의 눈치를 보며 가문에 빌붙은 그저 그런 인간입니다.”

평소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화가 난 탓에 체이어스의 표현은 과격했다.

하기는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 헤리어트 놈 때문에 카이런 공작이 겪었던 고초를 생각하면 눈물이 다 날 지경이다.

그런데 하필 그놈이 내 서신에 응답하여 하르펠을 방문한다니, 이것도 원작이 이끄는 운명인가 싶었다.

황태자를 성에 들일 때는 모두가 적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이제는 그를 나 혼자 상대해야 했다. 내가 불러들인 적이니까, 내가 책임져야 했다.

심장이 덜컥거리는 것 같았다.

“비싼 값에 독점공급 해.”

체이어스와 나는 동시에 카이런 공작의 입을 바라보았다.

“들개풀은 북부에서밖에 나지 않는다. 비싸게 팔아.”

“크흠…….”

체이어스는 카이런 공작의 의도를 몰라 침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의 의문은 곧 풀렸다.

카이런 공작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연고를 판 대가로 온실을 원하는 거냐, 아리엘사?”

나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아니오. 저는 단지 영지의 재정에 도움이 되려고 했습니다. 저도 남부 유리 온실이라니, 그런 소리를 입 밖에 낸 게 죄송해서…….”

나는 눈을 살짝 깔며 소심하게 말했다.

체이어스는 내 말에 아주 조금 누그러지는 기색이었지만, 내 목적을 훤히 아는 카이런 공작은 작게 코웃음을 쳤다.

체이어스는 진정하려는 듯 헛기침을 하고 말문을 열었다.

“그러면…….”

“프라일가의 사신을 맞이해. 계약은 최대한 유리하게 맺고, 값을 후려치려고 들거든 팔지 마. 체이어스, 거래는 네가 알아서 해. 나는 그를 만나지 않을 것이다. 프라일 일족과는 말을 섞고 싶지 않다.”

우와, 저렇게까지 말하다니, 나는 조금 기가 질리는 기분이 들었다. 혹시 그에게는 레오르트 후작에 대한 증오가 이미 뼛속에 새겨져 있는 걸까.

“……네. 공작님.”

체이어스는 카이런 공작이 이 거래를 승낙한 것이 몹시 탐탁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는 더 항의하지는 않았다. 카이런 공작의 명령이 이미 내려졌기도 하거니와, 그도 지진으로 영지 재정이 부족한 상황에서 새로운 이익이 창출되는 것을 거절할 정도로 꽉 막힌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상대가 후작의 가신이고, 하르펠령과의 거래라고 생각하고 오는 이상 카이런 공작이 그를 만나주지 않는 것은 일종의 푸대접이었다.

그러니까 카이런 공작은 사정상 이번 거래를 허락하지만, 내 음모에는 휘말릴 생각이 없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 정도면 못 이기는 척해줄 법도 한데, 섭섭했다.

그러나 카이런 공작은 심지어 황실에도 까칠하게 굴 정도로 성질 나쁜 사람으로 악명 높았다.

그러니 그가 헤리어트를 만나지 않는다고 후작 쪽에서 대단한 모욕으로 여기지는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지금 카이런 공작은 하냐크족 토벌로 콧대가 높아진 상황이니까 말이다.

“감사합니다. 공작님. 그럼 의사 선생에게 약을 준비해놓으라고 이르겠습니다.”

나는 표정을 숨기려 입을 꾹 다물고 집무실에서 물러 나왔다.

하지만 카이런 공작이 눈을 흘겼을 때 나는 조금 웃다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그는 혀를 탁 찼다.

재빨리 나와 문을 닫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렸다.

카이런 공작도 체이어스도 살기가 등등한 목소리였다.

-공작님, 아리엘사의 행동을 이대로 두실 겁니까? 이상하게 구는 건 참아줄 수 있지만, 이건 명백히 도를 넘었습니다.

-이문이나 많이 남겨. 액수를 봐서 벌을 정하겠다.

나는 카이런 공작의 서슬 퍼런 목소리에 몸서리를 치며 복도를 걸었다.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비싸게 팔아야 해, 비싸게!’

❄❅❄

헤리어트는 비교적 검소한 모습으로 하르펠 성에 도착했다. 자신은 말을 타고, 비서 하나와 하인 하나가 짐마차로 뒤따랐을 뿐이다.

편지를 보내 교섭한 것은 체이어스라고 하기로 했다. 그리고 체이어스는 헤리어트를 맞아서 자신의 특기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냉랭하고 사무적인 태도 말이다.

그리고 바늘 끝 하나 들어갈 빈틈이 없어서 상대가 속일 생각도 못 하게 만드는 접대기술도.

나는 물론 이번 거래가 성사되기를 바랐지만, 한편으로는 체이어스가 헤리어트를 짓밟아주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그는 원작에서 프라일 후작가에 몸을 의탁한 우리 남주를 모욕하고 괴롭히는 데 앞장선 악당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후작의 딸인 여주가 카이런 공작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자 질투심에 불타 이런저런 간계를 꾸몄다.

그 때문에 카이런 공작은 작게는 공공연한 모욕부터 크게는 죽을 고생을 해야 했다. 그 스토리는 엄청난 고구마 구간이었다.

아니, 정정해야겠다. 헤리어트는 황태자보다 더한 원작의 악당이고 악마였다.

하지만 그때 카이런 공작이 프라일가의 볼모 신세였기 때문에 헤리어트의 갑질이 먹혔던 것이지, 지금은 어림도 없었다.

무엇보다, 카이런 공작은 지금 여주인 루엘라 프라일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지금 헤리어트가 그에게 원한을 가질 이유도 없는 상태였다.

원작에서 헤리어트가 질투에 영혼이 썩어버린 악당 역할을 한 것 말고는, 다른 부분은 무난한 인간으로 묘사되었으므로, 이번 거래는 순조롭게 끝날지도 몰랐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그를 통해 루엘라를 끌어들여야 할지도 모르는다는 점이었다.

생각만 해도 한숨이 나왔다.

나는 성의 빈방에서 헤리어트에게 내어줄 들개풀 연고를 포장하고 있었다. 그때 체이어스가 헤리어트를 데리고 들어왔다.

실은 나도 헤리어트 앞에 얼굴을 드러내는 것은 꺼려졌기 때문에, 체이어스가 이번 거래를 전담하는 게 반가웠다.

그런데 굳이 내 앞으로 그를 데리고 불쑥 나타난 걸 보니, 체이어스는 나를 괴롭혀주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리엘사. 포장은 끝냈나?”

“네. 체이어스 경.”

나는 낯을 많이 가리는 여자처럼 다급히 머리를 숙이고 방에서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체이어스는 교묘하게 내 앞을 막아서더니 말했다.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게 이 상황이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여기는 공작님의 시녀 아리엘사입니다. 이 약 대부분은 그녀가 만들었어요.”

“그렇군요.”

헤리어트는 내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으니 단지 건성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를 곁눈질해서 보았다. 나를 가장 속 터지게 했던 악당은 뜻밖에도 유순하고 착해 보이는 남자였다.

그의 관심은 정작 다른 데 있었다.

“카이런 공작님은 혹시 일찍 돌아오실 예정이 없으십니까?”

“없습니다. 바쁘셔서요.”

헉. 나는 체이어스가 카이런 공작의 부재를 설명하기 위해 지진피해라던가 하는 복잡한 변명을 들이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아쉬운 듯 말하는 헤리어트에게 그 한마디로 상황을 끝내고 있었다.

“안타깝군요.”

“공작님이 돌아오시기 전에 이 거래를 끝내놓으라고 명령하셔서 시간을 더 드리지 못하는 점 양해하십시오. 헤리어트 님이 거절하셨다면 저는 즉시 서부와 교섭할 생각이었습니다.”

거짓말을 저렇게 눈도 깜짝하지 않고 하다니, 나는 혀를 내둘렀다.

서부에서 약을 사준다고는 안 했을 텐데요?

게다가 카이런 공작은 지금 집무실에 있었다.

하지만 체이어스를 처음 만나는 헤리어트가 속지 않을 방법은 없었다.

“제가 운이 좋았군요.”

생각해보니 서부에는 철이 많이 나서 대장간이 많았다. 심지어 화산도 있었다.

그걸로 헤리어트를 압박하다니, 역시 체이어스는 머리가 좋았다.

“오…….”

내가 싸놓은 약상자를 열어본 헤리어트가 작게 탄성을 냈다.

연고는 운송을 위한 큰 상자 안에 작은 용기에 담겨 차곡차곡 포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작은 용기의 뚜껑에는 종이로 만든 작은 나비 모형을 실에 매달아두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내가 머리를 숙여 시선을 피하며 조그맣게 묻자, 헤리어트는 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물론 속사정을 알 리 없는 체이어스는 그의 급격한 표정 변화에 무언가 심히 석연찮은 얼굴을 했다. 나는 바로 방에서 물러 나왔다.

내 방으로 돌아오면서 기분이 몹시 이상해졌다.

내가 나비 모형 수백 개를 밤새워 잘라 만든 것은 오직 그녀를 위해서였다.

남부의 장미, 루엘라 프라일 영애를 위해서.

꽃처럼 청초한 그녀는 그러한 자신의 이미지와 어울리게도 나비를 좋아했다. 말하자면, 그 포장은 고심해서 만든 취향 저격 패키지였다.

헤리어트도 그녀의 취향을 알기 때문에 좋아라 한 것이다.

‘루엘라, 이걸 봐. 내가 이번에 북부에서 구해온 화상 특효약이야. 이제 우리 유리 장인들은 훨씬 덜 고생하면서 유리를 만들 수 있어. 그래서 후작님께 더 큰 부를 가져다줄 거야. 이 병을 봐.’

그가 이런 소리를 하면 루엘라는 얼굴을 환하게 밝히며 내가 장식한 작은 약병을 들어 보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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