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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58/128)

52화

하지만 어떠랴. 여주가 본가에서 보던 온실을 여기서도 가진다면, 타지에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녀는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틀림없이 그의 준비와 정성에 감동할 것이다.

“물론 그것이 많이 비싸다고 들었어요. 그러니 견본과 견적을 받아봤으면 싶어요.”

최소한 이 과정에서 유리 공방을 독점하고 있는 프라일 후작이 공작과 연을 맺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카이런 공작은 허리를 세우고 앉았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내가 아직 아리엘사인 척 어설픈 연기를 하던 시절의 의심이 일렁이고 있었다.

“이방인.”

“…….”

나는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벽난로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 시기에 벽난로를 피우지 않았다. 그럼에도 저녁이 되면 작은 불을 피워두는 건 추위를 많이 타는 나를 위해서였다.

가슴이 퍽퍽해졌다.

지금 전쟁이 끝나자마자 지진이 나서 모두가 피해를 입어 아우성치고, 겨울에 굶어 죽는 사람이 나올 거라는 말이 돈다. 그런데 사치품 유리로 온실을 짓겠다니.

원래라면 카이런 공작은 내 말에 코웃음도 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전혀 화가 난 사람처럼 들리지 않았다.

“사랑.”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벽난로 주변으로 퍼지자, 종잡지 못하던 내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낭랑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내가 남부 여자에게 빠진다고 했던가? 그녀가 프라일 후작의 딸인가 보지?”

나는 ‘제기랄’하고 입 밖으로 뱉을 뻔했다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내 남주가 너무 똑똑한 것이 싫었다.

나는 고개를 푹 떨구고 있다가 버럭 소리치고 말았다.

“알았으면 좀 알아서 하세요!”

나는 내 반응에 스스로 놀라 아무 벽이나 노려보았다.

그럼에도 카이런 공작은 나를 달래듯 부드럽게 대답했다.

“아리엘사. 그 음유시인이 레오르트 프라일 후작이 어떤 작자인지 설명하지 않았나 보군. 나는 뱃속이 마물이나 다를 것 없는 자와 연을 맺을 생각은 없어.”

뱃속이 마물이나 다름없는 자.

카이런 공작은 그를 이미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원작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었을 뿐.

언젠가 살아 돌아가기 위해서, 남은 가신들이라도 살리기 위해서, 그는 레오르트 프라일의 보호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 딸이라고 아비와 뭐가 다를까.”

“그렇지 않아요!”

나는 다시 소리쳐버렸고, 이번에는 그도 인상을 찌푸리며 불쾌하다는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아리엘사.”

“그녀는, 좀 순진했던 거지, 세상 물정에 조금 어두운 건 죄가 아니잖아요. 금방 나아져요. 저도 그랬잖아요. 저도 공작님께서 하나하나 가르쳐주시지 않았다면 절대 제대로 시녀 노릇을…….”

나는 하던 말을 멈추고 아이처럼 투정을 부렸다.

“공작님은 왜 애처럼 그래요. 왜 자기 생각만 하시냐고요!”

“크흠.”

압을 다문 카이런 공작의 턱이 경직된 것이 보였다.

요즘 지진 피해를 감당하느라 바쁘고 피로한 그에게 내 철딱서니 없는 반항을 받아줄 만한 인내심은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한 영지의 생존을 책임진 자가 시녀의 투정을 받아줄 이유 같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자제력을 잃고 소리쳤다.

“이게 다 공작님 때문이라고요! 다 공작님 때문에…….”

나는 입술을 씹었다. 카이런 공작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있다가, 나는 내 손이 덜덜 떨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온실이요. 공작님은 제게 온실을 만들어주셔야 해요.”

중얼거리듯 말한 나는 방으로 달려서 도망쳤다.

❄❅❄

‘왜 이렇게 엉망이 된 거지?’

나는 정원에다 내년에 쓸 시나몬 모종을 심다가 흙을 주먹으로 팡팡 다졌다.

나는 파업 중이었다.

카이런 공작의 집무실에 출근하지 않은 지 이틀째. 나는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다시 흙을 조금 떠서 내가 다진 땅을 보슬보슬하게 만들어두었다.

“이게 다 공작님 때문이라고요! 다 공작님 때문에…….”

내가 공작에게 한 말을 떠올릴 때마다 내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그럴 수는 없어서 죄 없는 모종삽으로 땅을 마구 찍어댔다.

이기적이긴 누가 이기적인데. 죄 없는 사람을 원망하는 내가 이기적이지!

내 가슴 안에서 무언가 질척한 것이 보글보글 끓어대는데 불을 끌 수가 없는 기분이었다.

“으으으!”

“왜 죄 없는 땅바닥에 화풀이야?”

“하아.”

최근에 더 확실히 느끼는데, 체이어스는 정말 짜증 나는 남자였다.

꼭 이럴 때 나타난다. 그런데도 또 미워할 수는 없어서 더 짜증 나는 사람이었다.

“죄가 있는지 없는지, 체이어스 경이 어떻게 아세요?”

나는 뾰족하게 쏘아붙였다. 그러나 체이어스에게 내 말은 공격력이 1 정도밖에 없었다. 그것도 0에 수렴하는 1.

“너, 왜 장부 정리 안 끝내는 거야? 지금이 모종 심을 때냐?”

“…….”

“미치겠네.”

나는 치마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잘못하면 그에게 화풀이를 할 것 같아서 자리를 피하는 게 나았다.

그는 그런 나를 보며 말했다.

“공작님이 네 버릇을 완전히 망쳐놓으셨어.”

“으으으!”

신경질을 내며 획 돌아서는데 뒷덜미가 그에게 턱 붙잡혔다.

“쪼끄만 게 아주 건방져서는!”

나는 버럭 소리쳤다.

“제가 왜 쪼끄매요!”

“그럼, 네가 커다래?”

나는 내 뒷덜미에서 그의 손을 떼어놓으려 버둥대며 말했다.

“놔요, 놓으시라고요!”

“너 무슨 생각이야?”

“뭘요!”

“지금 이 상황에 공작님께 온실을 지어달라고 한 거냐?”

“…….”

“공작님께서 남부 유리 가격을 알아보라고 하셨다. 판유리 한 장이 작은 축사 하나 지을 가격이던데? 미친 거야?”

“…….”

나라고 좋아서…….

내가 입을 꾹 다물자 체이어스는 타이르듯 말했다.

“온실은 내년 봄에 상황 봐서 다시 지어줄게. 올겨울은 우리 모두 허리띠를 졸라매야 해.”

그러나 그는 모른다. 남부의 장미가 이 북부에 풍요로운 봄을 불러올 것을.

그녀가 도착한 북부는 들판에 들꽃이 가득하고 나무에는 과실이 가득한 땅일 것임을.

나는 그 봄을 하루라도 빨리 데려와야 했다. 또 다른 재앙이 찾아오기 전에.

“싫어요. 저는 남부 유리 견적이라도, 아얏!”

나는 눈가에 눈물을 찔끔 매단 채로 돌아보았다. 이가 덜덜 떨렸다.

“지, 지금……. 저 꿀밤 때렸어요?”

“게오르그 경이 늘 이러시기에 속으로 좀 심하다 했더니, 이럴 만했네.”

“꿀밤이 아니라, 딱밤……!”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숨을 삼켰고, 체이어스는 스르르 손을 내렸다. 우리는 동시에 침울해졌다.

“따라와.”

“아아아!”

체이어스는 내 귀를 잡아당겼다. 내가 네 살 이후 당한 적 없는 짓이었다.

❄❅❄

체이어스와 술집 테이블에 마주 앉았을 때, 우리를 흘끔거리며 긴장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이제는 게오르그가 없기 때문이었다. 감히 내 딸에게 술을 먹인 늑대 놈이 누구냐고 고함을 지를 근육질의 기사가 없어서.

나만 아니라 체이어스도 그 미묘한 변화를 자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우리는 침울하게 술잔을 나누어 받았다.

최근에 나는 사방에 악당이 되고 있었기에, 조금이라도 자제력을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먼저 말문을 열었다.

“형님과 친하셨어요?”

“별로.”

그러고 보니 나는 그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것은 조연의 운명이기도 했다. 주인공과 연관된 일이 아니면 거의 설명되지 않는 조연.

“하지만 없으니까 좀 짜증은 나더라.”

“…….”

“너는? 견딜 만해?”

“저는……. 아빠 딸이라서 튼튼해요. 몸도 정신도. 견딜 거예요.”

그것은 진심이었다. 나는 버틸 것이다. 준비된 결과를 가져다 놓을 때까지.

체이어스는 긴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러면서 공작님께 떼를 써?”

“온실은, 정말로 필요해요.”

“그건 봄에-”

“-평범한 건 안 되고요! 제 허브는 특별한 유리가 비추는 햇빛 아래에서만 잘 자라거든요. 그걸로 공작님 차 타드릴 거라고요. 그걸 방해하면 체이어스 경이라도 용서 안 할 거예요.”

체이어스는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온다는 얼굴로 나를 보다가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래서 계속 고집부릴 거라고?”

“비싼 것 알아요. 그러니까 견적만……. 공작님 모시고 남부에 가서 견본을 확인하고 싶어요. 겨울이 오기 전에요.”

설마 거기까지 갔는데 여주 얼굴도 못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원작의 억지력이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면, 그들은 필연적으로 마주쳐야만 했다.

체이어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왜 겨울 전인데?”

“그래야 봄이 오자마자 온실에 나비를 풀어놓죠.”

“나비?”

[온실 문을 열자 나비들이 흩날리는 꽃잎처럼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루엘라는 탄성을 내며 온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유리구슬 같은 웃음이 온실을 채웠다.


그녀가 기뻐하는 모습을 본 카이런 공작도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가 좀처럼 지어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지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본 적 없는 표정이기도 했다.]

원작에서 그녀를 기쁘게 한 온실은 더럽게 비싼 남부산 유리 온실이 아니라 선대에 지어진 평범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지진으로 무너져버렸으니, 어쨌든 새로 지어야만 했다. 추위에 약한 남부출신 여주가 성에서 시간을 보낼 공간인 온실은 반드시 필요했다.

물론 그것은 나중에 해결해도 될 일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 굳이 그 비싼 남부 유리를 고집하는 것은 유리 구입을 위한 교섭 말고는 레오르트 후작과 연을 이을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나는 지진보다 더 끔찍한 무엇이 닥쳐올까 봐 무서웠다.

그러나 카이런 공작은 내 말 중 다른 것은 다 믿어주면서, 유독 자기가 만나야 할 운명의 여자에 대해서만은 완고하게 굴었다.

카이런 공작은 이미 그를 혐오하고 있어서 귀족간의 교류 같은 방법은 소용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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