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지진은 처음이겠군. 종종 있는 일이다.”
“…….”
“가끔 땅의 신이 노하신다. 올겨울은 유달리 춥겠군.”
나는 그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땅의 신과 눈과 얼음을 양손에 쥔 신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땅의 신이 화를 내면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면 눈과 얼음을 양손에 쥔 신이 맞서 화를 내며 혹독한 겨울이 왔다.
“하르펠 성도 방벽도 튼튼하니 지붕 무너질 걱정은 말고 돌아가서 쉬어.”
나는 대답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카이런 공작은 나를 여전히 붙잡은 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설핏 웃었다.
“너, 겁쟁이였군.”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공작님. 괜찮으십니까?”
체이어스가 카이런 공작의 안전을 확인하러 다급히 들어왔다.
나는 우리를 본 체이어스의 표정이 차게 식는 걸 보고 그제야 카이런 공작이 내 어깨를 감싸주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카이런 공작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괜찮다. 아리엘사가 놀랐어.”
“그럼…….”
나는 그들이 성내를 점검하러 나가자 마자 방으로 재빨리 돌아왔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썼다.
“젠장!”
내 짐작은 맞았다.
나는 원작을 거스를 수 없었다.
우리는 원작을 거스를 수 없었다.
이 지진이 바로 그 증거였다.
카이런 공작이 하냐크족과의 전투에서 패전하고 남부의 프라일 후작에게로 피신한 후, 황제는 카이런 공작이 북부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길목에 기사단을 배치한다. 그를 제거하겠다는 노골적인 의도였다.
카이런 공작은 이미 충성심을 의심받고 있었고, 마물을 물리쳤다는 자가 고작 하냐크족에게 져서 쫓겨난 것으로 귀족들은 그의 능력을 의심했다. 거기에 병사들까지 다 잃은 그를 지지할 자는 없었다.
그리고 그때쯤에는 모두들 방벽이 영원하여 마물을 지키는 데 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등을 돌리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듯 쉬웠다.
그렇게 주인을 잃은 북부에는 방벽을 직접 관리하고 세금을 수취한다는 명목으로 황제의 섭정이 시작된다.
그들은 북부를 악랄하게 수탈하여 ‘들에 남는 곡식이 없고 헛간에 남은 짐승이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 북부인들이 굶어 죽어가는 것은 당연했다.
남부에서 소식을 들은 카이런 공작은 이를 갈지만, 그에게는 황제가 배치한 중부의 부대를 돌파할 병력이 없었다. 물론 프라일 후작은 그를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 이 지진은 어떤 필연이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몸에 전율이 흘렀다.
나는 손끝이 차가워진 채 떨리는 손끝을 꼭 쥐어야 했다.
그는 남부의 장미를 만나야만 했다.
카이런 공작이 하냐크족의 침략을 물리쳐버렸기에 북부는 여전히 풍족하고 부강했다. 거기다 올해는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할 만큼 풍년이 들었다.
원작대로 카이런 공작이 비참하고 괴로워지기 위해서는 북부는 황폐해져야 했다. 강제로라도 말이다.
그래서 원작의 억지력이 북부에 다른 재난을 내린 것이다.
나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가 입술을 씹다가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흐흑……. 흐흐흑.”
내가 가슴속에 파묻어 두었던 생각들이 눈이 녹은 맨땅처럼 검고 축축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나는 카이런 공작의 행복을 바랐지만 그것은 아마도 나와 그의 행복이었다. 그가 만나야 할 운명의 여자는 말 그대로 운명으로 맡겨둔 채 말이다.
하지만 이 지진은 내 마음을 산산이 깨트리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말하고 있었다.
❄❅❄
내가 다음 날 집무실로 갔을 때, 카이런 공작은 밤을 새운 몰골이었다. 언젠가 밤새워 술을 마신 다음 날처럼 머리는 부스스하고 튜닉 차림에 여밈도 풀어져 있었다.
체이어스는 소파 위에 늘어져서 자고 있었다. 밤새워 성의 곳곳을 점검하고 좀 전에 돌아온 것 같았다.
카이런 공작은 눈도 뜨지 않고 말했다.
“차.”
“…….”
“저런. 됐어.”
내가 지진으로 엉망이 된 콘솔 테이블 주변을 바라볼 때, 카이런 공작도 방 안 꼴을 떠올렸는지 신경질적으로 취소해버렸다.
“차는 주방에서 내오겠습니다. 아침은 체이어스 경이 깨시면 들일까요?”
카이런 공작은 피로하여 게슴츠레한 눈꺼풀 사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해.”
내가 나가기 전에 카이런 공작이 불렀다.
“아리엘사.”
“네, 공작님.”
“지진에 온실도 무너졌다. 다시 지으려면 유리를 대량 주문해야 하니 시간이 걸릴 거야.”
“아…….”
이 시대의 유리란 대단히 고가의 재료였다. 재난복구에 돈을 쏟아붓고 나면 영지의 재정은 넉넉지 않을 것이다. 당장 약초와 허브들이 아까웠지만 그런 데에 돈을 쓸 수는 없었다.
“괜찮아요. 비축해둔 차도 있고, 시나몬은 온실이 필요 없고요.”
“그래.”
나는 식량창고로 가서 비축해둔 차 가루들을 꺼내왔다. 내가 공작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날부터 카이런 공작을 비롯해 성내의 모든 사람들이 지진 복구 때문에 바쁘게 뛰어다녔고, 나도 필요한 장소에 가서 일을 도왔다.
카이런 공작은 부쩍 말이 없어진 나를 이따금 신경 쓰는 듯도 했지만 서로 대화할 시간 같은 것은 없었다.
성벽의 서쪽 면이 무너져 긴급히 지어 올려야 했고, 각지에서 산사태 피해가 있었다. 땅이 갈라지며 내가 사라져 물 부족을 겪는 마을도 있다고 했다.
하냐크전으로 남자들이 다 차출되면서 추수를 끝마치지 못한 집들도 많아서 그것도 돌봐야 했다.
창고나 축사가 부서지며 가축들이 깔려 죽은 집도 많았는데, 가축들이 놀라서 사산하거나 젖을 짜지 않는 것은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 정도였다.
그러니 하르펠 성은 겨울을 날 준비를 완전히 망친 상태였다. 게다가 올겨울은 지독히 추울 예정이라는데 말이다.
그러나 카이런 공작과 가신들은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했다. 그러니 나도 내 몫의 일을 해야 했다.
나는 그동안 원작의 흐름을 요리조리 피해 가려고 애쓰고 있었다. 내 남주도 나도 고생하지 않고 행복해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쩌면 카이런 공작의 표현을 빌면, ‘저쪽의 음유시인’에 대한 기만이었다.
이제는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깨달아야 했다. 쩍쩍 갈라져 황폐화되어버린 밭과 초지를 보면서, 그리고 지붕이 내려앉은 축사를 보면서.
어쩌면 이 세계에 가장 큰 해악을 끼치고 있는 존재는 나였다.
나는 원작을 변형하는 것이 아니라 원작이 목표를 이루도록 도와야 했다.
남부의 장미, 루엘라 프라일이 카이런 하르펠 공작과 만나도록, 이 <눈 내리는 사막>의 세계가 존재하는 이유가 비로소 성립할 수 있도록.
나는 그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나는 저도 모르게 주먹으로 눈물을 닦았다.
나는 은연중에 나 자신이 카이런 공작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려던 욕심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나는 소중한 모든 것을 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 단순하고도 명확한 깨달음에 왜 이렇게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기분이 드는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
며칠이 지나자 하르펠령은 어느 정도 평소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지만, 카이런 공작은 피로에 찌들어 있었다. 체이어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주 함께 밤을 새웠기 때문이다.
행정관들도 몹시 바빴기 때문에, 각지에서 올라오는 지진 피해를 정리해서 보고하는 것은 내 몫이 되었다.
그러면 카이런 공작은 주민들끼리 대처할 수 있는 일과 그의 도움이 필요한 일을 구분하여 처리했다.
백성들은 마을별로 조를 짜서 집집마다 돌아가며 일제히 추수를 하고, 축사를 고쳤다.
그들의 조직력이란 예상보다 대단한 것이어서, 이대로만 진행된다면 북부는 금방 정상으로 돌아갈 것 같았다.
창고에서 구호식량과 재물이 술술 빠져나가는 것은 당장은 어쩔 수 없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카이런 공작은 웃으며 한마디로 정리했다.
‘신들이 화해하는 해가 있거든. 이방인.’
그날은 카이런 공작은 낮잠을 잤다. 그동안의 강행군에 비하면 이제야 낮잠을 청한다는 것도 대단해 보였다.
그는 깨자마자 차를 찾았고, 나는 시나몬 차를 냈다.
그는 소파에 반쯤 기대 누운 채로 말했다. 나른한 모습이 흐트러져 보이기보다 야릇한 매력을 흘렸다.
시각적으로는 버릴 장면이 없는 남자였다. 그런 생각을 하자 이유도 없이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나를 보고 카이런 공작이 불쑥 물었다.
“게오르그 때문인가?”
“네?”
“최근에 네가 웃는 걸 본 적이 없어.”
“……그런가 봐요.”
나는 그렇게만 대답했다. 그것은 반 이상은 진실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슬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할 일이 있지 않은가. 나는 거기에 집중해야 했다.
나는 이 이상 끔찍한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하르펠은 잔혹한 땅이다. 수도에 비하면 자연재해가 일상이라고 할 정도지. 하지만 북부는 언제나 건재했다.”
“네. 공작님.”
“내년 봄에는 모든 게 제자리에 있을 거다. 아리엘사. 그 정도는 나를 신뢰할 줄 알았는데?”
“공작님.”
카이런 공작은 내 다음 말을 기다리며 내 입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씩씩하게 말했다.
“온실을 갖고 싶어요.”
내 뜻밖의 말에, 그는 긴장이 풀린 듯 피식 웃었다.
“급한 일이 정리되면 체이어스에게-”
“-남부산 유리로 지어주세요.”
카이런 공작은 나를 빤히 응시했다.
남부에서 독점하여 생산하는 유리는 제국에서 생산되는 유리 중에서도 최고급으로 사치품에 해당했다. 주로 공예품을 만드는 것으로, 그것을 판유리로 쓰는 곳은 신전 정도였다.
제국에서 그 유리로 온실을 지은 자는 남부 유리 공방을 독점하는 프라일 후작가뿐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유리를 자랑하려는 목적으로 온실을 지어 저 먼 남방에서 들여온 특이한 과일을 길렀다. 그 외에는 황궁이 유일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카이런 공작에게 터무니없는 사치를 요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