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56/128)

50화

카이런 공작은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의사의 별채와 그동안 비워둔 영지를 순시하러 나갔다.

오후에는 돌아와 참전한 기사들과 병사들을 위한 포상금을 준비했다.

하냐크족으로부터 나온 전리품은 값어치 있는 게 없었고, 애초에 전리품을 챙기려는 전투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 비용은 모조리 하르펠 성의 재정에서 나가야 했다.

나는 카이런 공작의 명령으로 장부 정리를 도왔다. 그는 성의 행정관들 셋보다 내 계산이 더 빠르고 정확하다고 했다.

테이블에 앉아 장부를 정리하던 나는 문득 창밖을 보았다. 해가 져가고 있었다.

“공작님…….”

카이런 공작은 나를 따라 창밖을 보며 말했다.

“가봐.”

나는 미소 지으며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

나는 성탑 앞에 있는 들판으로 나갔다. 이미 많은 사람이 나와 있었다. 그들은 크고 작은 풍등을 만들어와 날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사자는 다섯뿐이었지만, 동료나 친인척들까지 나와서 죽은 자들을 추모하고 있었다. 딱 하루, 오늘 저녁만 일어나는 일이었다.

내가 게오르그를 위한 풍등에 불을 붙이고 있자 누군가 다가와 헛기침을 했다.

“아리엘사.”

“벨리아 아줌마!”

우리는 서로를 와락 안고 한참 등을 두드렸다.

“아줌마, 아빠는…….”

“알아. 그분은 이럴까 봐 그런 거야. 나를 또 과부로 만들기 싫어서.”

“아줌마…….”

그녀는 나 대신 풍등을 잡아주었고, 나는 수월하게 불을 붙였다.

그녀는 눈물이 글썽글썽해서 붙잡은 풍등을 바라보다가 거기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내게 돌려주었다.

나는 울지 않으려고 어금니를 꽉 물고 등을 하늘로 들었다.

“게오르그 로크만 경, 당신이 자랑스러워요. 아빠, 잘 가요. 그리고……. 미안해요!”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고 풍등을 하늘로 부드럽게 밀어 올렸다.

풍등을 향해 고개를 쳐든 채, 벨리아가 중얼거렸다.

“나도 당신이 자랑스러워요. 섭섭해해서 미안해요. 게오르그 경.”

나는 고개를 든 채 하늘을 향해 시야를 열었다. 영지민들이 띄운 십 수 개의 풍등이 검은 하늘을 점점이 수놓으며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내리다가 막 풍등을 띄워 올리고 있는 체이어스를 발견했다.

체이어스는 하늘로 풍등을 밀어 올리고는 미련 없이 나를 향해 돌아섰다. 아까부터 나를 발견한 것이 틀림없었다.

체이어스가 다가오는 걸 본 벨리아는 내 팔을 토닥여주고는 돌아갔다.

“널 위해서 예쁜 원단은 꼭 떼놓을 테니까 필요하면 찾아와. 공작님께서 선물해주신다고 하면 꼭 오고.”

나는 그녀를 감사히 배웅하고 체이어스를 불렀다.

“체이어스 경.”

그는 잠시 자기가 날린 풍등을 시선으로 좇더니 말했다.

“형은 앞으로도 게오르그 경의 잔소리를 들으며 태양을 쫓아다닐 거다.”

기사단에 있던 체이어스의 형이 전사한 것이다. 그를 전혀 신경 써주지 못한 내가 미안해졌다.

나는 체이어스를 와락 껴안았다. 그는 적잖이 놀랐는지 두 팔을 공중에 어정쩡하게 들고 있었다.

“그러고도 절 위로해준 거예요?”

그는 두 팔을 어색하게 든 채 말했다.

“나는 형과 남보다 못한 사이였어.”

“앞으로는 안 미워할게요.”

체이어스는 무덤덤한 얼굴로 퉁명스럽게 물었다.

“날 미워했다고?”

“어……. 음……. 앞으로는 안 그런다고요.”

“나도 앞으로 안 그러마.”

“네?”

“그 수상한 작전이 실패했다면 나는 맹세코 너를 공작님 곁에서 떼놓기로 했었다.”

역시 체이어스는 체이어스였다. 말이 떼놓는 거지, 지하 감옥행이 분명했을 것이다.

나는 저도 모르게 스르르 팔을 풀고 물러났다. 그러자 체이어스는 몸을 돌려 돌아갔다.

그러다 멈추어 말했다.

“지금도 너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야.”

솔직히 말하면 나는 소름이 끼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체이어스에게 의심당하며 쫓기는 건 정말 싫었다.

나는 뭐라도 말해야 했다.

“도, 돌봐준다고 할 때는 언제고!”

거리가 멀어졌는데도, 그의 음성은 또렷이 들렸다.

“안 그런다고 한 적 없는데.”

❄❅❄

나는 방으로 돌아가 누웠다. 게오르그와 이제야 제대로 이별을 한 것 같았다. 가슴을 짓누르던 무언가가 내려간 것 같았다.

나는 일어나 창을 열고 창턱에 턱을 괴었다.

멀리 북부의 숲은 검은 융단처럼 펼쳐져 있었다. 겨울이 되면 저 숲은 하얀 숲으로 변할 것이다.

하지만 저 침엽수 숲은 특유의 검은 빛깔을 결코 벗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저 풍경이, 이 북부가, 너무나 익숙했다. 이곳이 진짜 내 집 같았다. 

나는 저 숲을 가로질러 공작을 따라 동부 모베일로 갔던 때를 떠올렸다. 컴컴한 숲에서 늑대 떼의 안광을 보았을 때의 소름 끼치는 느낌은 지금도 생생했다.

뜻밖의 횡령 사건에, 감염증으로 며칠을 앓은 카이런 공작하며…….

나는 오싹함에 내 손으로 팔을 감쌌다. 하지만 온몸에 돋은 소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아니야…….”

나는 오한에 몸을 잔뜩 웅크렸다가, 물러나 침대 위에 앉았다.

불안이 나를 휩싸고 있었다.

“아니야…….”

겨우 나무 거스러미에 찔린 상처 하나로 며칠이나 펄펄 끓는 열에 시달릴 만큼, 카이런 공작은 체력이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원작 속의 그는 어렸을 적부터 병에 걸린 적이 없는 강골이었다.

그가 유일하게 병이 나는 것은 호수에 빠졌던 후유증으로 폐렴에 걸려서다. 그리고 이 폐렴은 황제가 그를 독살하려는 기회가 된다.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을 무시할 수 없었다.

카이런 공작은 한 번은 반드시 아파야 했던 것 아닐까?

내가 개입하여 그가 호수에서 금방 헤엄쳐 나와버리는 바람에 폐렴을 앓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작은 상처로 감염증을 앓아서 사경을 헤맨 것은 아닐까?

원작의 내용대로 황제가 그를 독살할 시도를 할 수 있도록.

황태자의 일도 그렇다. 원래라면 카이런 공작이 사냥대회에 참석하여 황제파 귀족과 결투를 벌이는 도중에 황태자에게 작은 상처를 입혀야 했다.

그것으로 인해 카이런 공작은 황태자를 시해하고도 남을 인간으로 흉흉한 의심을 받으며, 하냐크족 침략에 징발되는 것을 거절할 명분을 잃어버린다.

이에 카이런 공작이 자신의 성탑에 불을 질러 사냥회 초대를 거절하자 황태자가 직접 찾아왔다.

나와 체이어스가 갖은소리를 다 해가면서 카이런 공작이 황태자에게 트집을 잡히지 못하도록 상황을 무마했더니, 황태자는 결국 우연히 길에 떨어진 목재에 말이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모욕을 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 카이런 공작은 하냐크족 침략에 대한 징발에 거절할 명분을 잃어버린다.

게오르그도. 승기를 다 잡은 전투였는데, 그가 거느린 기사들은 대부분 살아 돌아왔는데, 그는 마치 사고처럼 죽고 말았다. 원작대로.

많은 엑스트라들은 살아남았어도, 굵직한 조연인 게오르그만은 예외가 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흑…….”

나는 내 몸을 감싸 안고 떨었다.

모든 사건은 원작의 방향으로 이끌리고 있었다. 나와 카이런 공작이 아무리 그것에 반항한다 해도, 거대한 사건의 물줄기는 원작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북부의 가을밤. 검은 숲 상공에는 거대한 오로라가 너울대고 있었다.

❄❅❄

내 가설은 나를 짓눌렀다. 하지만 카이런 공작에게 그런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곧 그가 가신 대부분을 잃을 정도의 사건이 앞으로 일어날 것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그런 생각에 골몰하여 몇 번이나 차를 쓰게 우려내고 말았지만, 카이런 공작은 내가 게오르그의 상중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나를 내버려 두었다.

따지고 보면 가장 큰 상중에 있는 자는 카이런 공작이었다. 그는 자기 사람을 잃는 것을 끔찍하게 여겼다. 그가 묵묵히 전쟁의 후처리를 해갔기에 그렇게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그날 밤은 나는 밤늦도록 장부 정리를 돕고 있었다.

“여기요. 이제 서부 행정관이 보낸 것만 하면 돼요. 이 정도면 전쟁 배상금 지출분은 두 해 정도만 풍작이 들면 회복되겠는데요?”

“이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데. 원래라면 며칠 걸릴 일이다.”

카이런 공작은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나는 그가 더 말을 걸기 전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 드릴까요?”

그러자 카이런 공작은 오랜만에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앉아.”

그의 앞에서 달아나려고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깜빡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는 차갑게 물었다.

“뭘 숨기고 있지?”

“수, 숨기다니요.”

“네가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게오르그 때문은 아니야. 내 말이 틀렸나?”

“그렇지는…….”

나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으르릉 하는 낮고 저리는 진동이 온몸을 압박하는 듯했다.

그렇게 느끼는 순간, 실내와 집무실 안의 집기들이 흔들리며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지진이었다.

“아리엘사!”

카이런 공작은 일어나 나를 소파로 내던지고 위를 덮쳤다. 나는 눈을 꽉 감은 채 나를 감싼 카이런 공작을 껴안았다.

세상을 뒤흔드는 진동은 한참 만에 가라앉았다.

카이런 공작은 옅은 한숨을 쉬며 내 위에서 몸을 들었다.

마주 누운 채로 눈이 마주치니 눈을 둘 데가 없었다. 나는 재빨리 시선을 피했지만, 그는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하던 추궁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듯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기, 공작님…….”

내가 겨우 속삭이자 그는 못마땅한 듯 내 위에서 내려와 소파에 앉았다. 나도 재빨리 앉아서 머리를 정리했다.

“아……. 내 차! 그리고 술!”

콘솔 테이블 위에 있던 차 상자와 술병들은 모조리 바닥에 떨어져 박살 나 있었다.

“손 다치니 내버려 둬. 하인들이 치울 거다.”

카이런 공작은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놀란 사람들이 집 밖으로 횃불을 들고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심장이 뛰어 숨이 조금 찼다. 그는 내 양어깨를 붙잡고 내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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