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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55/128)

49화

북부의 전사들은 죽으면 태양을 내려준 신들의 곁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곳에서 뜨거운 태양이 세상을 매일 한 바퀴 도는 걸 지키기 위해서.

“아빠가…….”

체이어스가 끄덕였다.

“미안하다, 아리엘사.”

“왜 아빠만…….”

나는 주저앉았다.

❄❅❄

나는 침대에서 울며 벌떡 일어났다. 방 안이 너무 조용한 것이 낯설었다.

이 광경은 전에도 경험한 적이 있었다.

내가 빙의하여 처음 눈을 뜬 순간도 이랬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고, 게오르그는 그 두껍고 더운 손을 내 이마에 대고 있었다. 나는 그를 보고 놀라서 더 비명을 질렀고…….

“흐흐흑…….”

조용히 들어온 체이어스는 약차 쟁반을 들고 있었다. 진정제로 쓰일 만큼 효과가 강한 약차 향이 났다. 의사 선생에게 받아온 것이 분명했다.

그가 왜 여기 있는지.

울려는 생각은 없었는데, 그를 보니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나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아빠는요? 시신은요?”

“장례는 전장에서 치렀다. 유품은 저기.”

체이어스는 서랍장 위에 놓인 나무 상자를 가리켰다.

원작에서도 그렇게 본 것 같았다. 북부인들은 시신을 옮기지 않는다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그곳을 무덤으로 삼는 미련 없는 사람들이라고. 때로 그들은 시신을 묻은 자리에 있던 돌멩이 하나를 유품 삼아 가져온다고 했다.

나는 두 손바닥으로 눈을 꽉 눌렀지만 눈물이 자꾸 났다.

“어떻게요? 어쩌다가요?”

“그분은 위대한 전사다.”

“알아요. 알아요. 흐흑.”

“게오르그 경은 황태자가 보낸 습격으로부터 우리 후방을 막아내셨다. 다 이긴 싸움이었는데……. 시체인 줄 알았던 놈이 경을 덮쳤다.”

체이어스도 감정을 추스르듯 잠시 쉬었다가 말했다.

“그가 우리를 지켰다. 나를, 공작님을, 모두를 말이다. 아리엘사.”

나는 눈물이 덜 나오게 하려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꽉 누른 채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원작을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게오르그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혼자 있고 싶었다. 체이어스에게 내 비참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저는 하르펠의 방패의 딸이에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혼자 있고 싶어요.”

체이어스는 하고 싶은 말을 억누른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필요하면 불러. ……이제는 내가 널 돌봐줄게.”

내가 그를 조금 의아하게 바라보았을 때, 그는 크게 상심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그는 나가버렸고, 나는 문이 닫히자마자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

깊은 밤, 열어놓은 창밖에서 희미한 귀뚜라미 소리가 들렸다. 가을이 되면 달도 함께 익는지 창백하던 달은 제법 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다.

나는 눈을 떠 내 이마를 짚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빠…….”

컴컴한 방 안에서 그의 몸에 흐르는 빛을 보았음에도 아빠라고 불러버린 것은 어떤 기억 때문이었다.

잔뜩 겁먹은 눈으로 밤새워 곁을 지키며, 사다리에서 떨어진 딸의 이마를 짚어주던 게오르그 로크만에 대한 기억.

“아리엘사.”

내 이름을 불러놓고, 카이런 공작은 잠시 말을 잇지 않았다.

“게오르그 로크만은 이제부터 태양을 지킬 거다. 너는 매일 아침 그의 가호를 받을 거다. 아리엘사.”

“흐흐흑…….”

이를 악물어도 눈물이 계속 흘렀다. 나는 카이런 공작을 등지고 누우며 눈물을 삼키려고 애썼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 힘을 주자 온몸이 들썩거렸지만 마음대로 되는 게 없었다.

나도, 내 안의 커다란 흔적으로 남은 아리엘사도, 울고 있었다.

내가 참지 못하고 꺽꺽거리기 시작하자 카이런 공작은 나직이 말했다.

“그는 네 아버지가 아니다. 이방인.”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를 꽉 물고 카이런 공작의 가슴을 때렸다. 한 번, 또 두 번. 그리고 계속.

“그는 제 아빠예요. 게오르그 그 딸 바보는, 저를 그렇게 사랑해준 아빠는 그뿐이었으니까, 그는 제 아빠라고요!”

나는 소리를 죽이려고 필사적으로 애를 쓰며 말했다.

“그런데 저는…….”

“…….”

“그를 이번 전투에 나가지 못하게 했어야 해요. 저는 그가 죽을 걸 알고 있었다고요. 저는 그를 살리기로 약속했었다고요!”

카이런 공작이 내 양 손목을 붙잡았다.

“그가 후방을 지켜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전멸했을 것이다. 전황은 정확히 네가 말한 대로였다.”

“하…….”

나는 숨이 쉬어지지 않아 가슴만 들썩거렸다. 카이런 공작은 붙잡았던 내 손을 잡아당기며 나를 가슴에 넣었다.

그가 출정할 때는 몰랐는데. 지금까지는 알지 못했는데. 그의 품 안은 몹시 더웠다. 지금까지 경험한 그의 더운 손과 더운 가슴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그래서 더 감정을 추스르기 힘들었다.

“너는 내가 데려간 자 중 다섯이 남을 전투를 아흔다섯이 남게 만들었다. 그러니 실패한 게 아니야. 자신에게 가혹하게 굴지 마라.”

“…….”

나는 말없이 눈물만 떨궜다. 카이런 공작이 나를 안은 채 말할 때마다 그의 가슴의 울림이 느껴졌다.

엄마 품에 든 아기처럼, 그 진동에 긴장도, 슬픔도 조금 풀어지는 것 같았다. 그의 체취는 잘 덖은 허브처럼 달고 뜨거웠다.

그의 품이 이렇게 다정하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래서 내 눈물은 더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왔다.

“나는 하냐크족장의 아들을 사로잡아 그들이 황태자의 사주를 받고 침략했다는 증거를 받아냈다. 게오르그는 내게 그 시간을 벌어주었어.”

나는 몸을 떼어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황태자는 우리를 건드리지 못한다. 내가 이 약점을 잡고 있는 한, 너는 예정대로 출산해도 된다. 아리엘사.”

황태자가 하르펠 성에 왔을 때, 그가 나를 데려가려 하자 카이런 공작은 내가 체이어스의 아기를 임신했다고 둘러대었다.

다행이라고 웃어야 하는지 안도해서 더 울어야 하는지 분간할 수가 없어서 내 얼굴은 일그러지기만 했다.

“흐흑……. 자꾸 그걸로 놀리지 마시라고요!”

나는 카이런 공작의 가슴을 툭 때렸지만 이제는 힘은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의 몸에 팔을 둘러 꼭 안았다. 지금 그 정도는 허락될 것 같았다.

이대로만 있으면 나는 언제나 안전하고, 행복할 것만 같았다.

부디 앞으로도 오래오래 이랬으면 좋겠다고, 우리가 힘을 합쳐서 북부를 지키며 지내고 싶다고, 당치 않은 소망이 눈물에 섞여 내 뺨을 적셨다.

하지만 그의 손이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을 때, 나는 갑자기 정신을 차렸다. 내가 감히 그를 끌어안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 나는 얼른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어둠 속에서, 카이런 공작은 설핏 웃었다.

“이제는……. 황제 폐하는 우리를 내버려 둘까요?”

“네가 말해봐. 이방인.”

나는 눈물을 닦으며 기억을 곱씹었다.

배신당하고 패전한 카이런 공작은 남부의 프라일 후작에게 몸을 피신하여 거기서 굴욕을 견디며 지내게 된다.

한편 하냐크족은 황태자가 가짜 침략에 대한 대가를 주지 않자 진짜로 쳐들어오고, 황제는 이번에는 후작에게 출정을 요구한다.

후작은 이번에야말로 복수하라며 카이런 공작을 자기 대신 전투에 내보낸다. 이 또한 함정이나 다름없었지만 공작은 그것을 기회로 삼아 북부를 되찾고 만다.

그 이후 여주를 사이에 두고 후작과 카이런 공작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황태자나 황실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원래라면 황태자가 하냐크족을 사서 침략하도록 사주한 증거는 후작이 쥐게 되기 때문에, 황제는 그를 함부로 공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황제는 이번 전투를 끝으로 사건의 주요 흐름에서 빠지게 되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황제 폐하는 더 이상 북부의 위협이 아니에요.”

카이런 공작은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그의 등도 편안하게 펴졌다.

나는 그를 향해 젖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아빠 대단하죠?”

“그는 나의 방패다. 당연한 일이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나는 카이런 공작이 슬픔을 억누르고 뱉는 자긍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게오르그를 사랑했으며, 자랑스러워했다.

단지 그들은 죽음을 애도하는 것을 불필요하게 여겼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명예롭게 태양 곁으로 가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이번에는 그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리엘사, 너는 나와 북부를 지켰다. 그걸로는 만족하지 못하겠나?”

“아…….”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조금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소리 없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내일 나와서 차를 끓여주겠지?”

“네. 공작님.”

카이런은 내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어둠 속이었지만, 나에게만 보이는 그의 아우라는 그의 입가에 드리운 긴 주름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나는 카이런 공작이 돌아가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

❄❅❄

“공작님, 좋은 아침입니다.”

나는 다음 날 아침에 공작에게 그렇게 인사했다. 그리고 그는 평소처럼 나를 무시했다.

나는 그에게는 시나몬 차를 끓여주고, 나는 릴리스 차를 마셨다. 그는 책상에서, 나는 내 자리에서.

대화는 없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성탑은 아주 잘 보지 않으면 불이 나기 전과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모든 게 예전과 다름없는 일상이었다. 늘 사람을 아슬아슬하게 만드는 거구의 중년의 기사가 없다는 것만 빼면.

나는 길거리를 돌아다니고 의사 선생을 따라다니며 돕기도 했지만, 전후라고 실의에 빠진 북부인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니 나도 슬픔에 빠져 시간을 보낼 수가 없었다.

나는 단지 카이런 공작을 새삼 존경하고 더 아끼게 되었다.

원작에서처럼 게오르그는 죽고 말았지만, 적어도 이 전쟁의 패전 이후에 찾아올 황제의 수탈은 피할 수 있었다.

나는 황태자가 하냐크족을 돈으로 사서 불러들인 것이라고만 했는데, 그는 그 정보만으로 전투에서 승리할 뿐 아니라 황태자의 약점을 틀어쥐어 그 이상의 공격을 멈출 해결법까지 찾아낸 것이다. 나는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아는 우리 남주가 존경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도 이제는 기꺼이 ‘위대한 그분’을 칭송하는 대열에 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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