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아니, 우리는 이 산길로 들어간다.”
카이런 공작이 체이어스의 말을 자르자 모두는 잠시 침묵했다.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게오르그였다.
“그랬다가는 놈들에게 꼼짝없이 포위당할 겁니다.”
“게오르그 경이 이 위쪽에서 우리 후방을 지원한다. 하냐크족이 아니라 우리가 포위하는 거다.”
“이 작전이 성공해도 적의 반은 사막으로 도망치고 말 겁니다.”
하지만 카이런 공작은 가신들의 반론에 전혀 대답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싸늘해지자, 체이어스가 회의를 끝내고 모두를 내보냈다.
체이어스가 원망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에, 카이런 공작은 돌아보지도 않고 냉정하게 말했다.
“너도 나가.”
그러나 체이어스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공작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아니, 위험부담이 큰 작전을……. 공작님!”
“게오르그 경에게는 최정예를 붙여. 남은 병력 전부 딸려 보내. 체이어스.”
“으으윽!”
체이어스는 미치려고 하는 얼굴로 카이런 공작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머리를 식혀, 체이어스. 이번에는 우리가 해본 적이 없는 방식으로 싸우게 될 거다.”
카이런 공작의 명령에 체이어스는 돌아섰다. 나는 실내를 치우려 일어섰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놀란 다음 나를 증오하듯 보았다. 이런 터무니없는 명령에는 이번에도 내가 연관되어 있다는 직감 때문인 것 같았다.
체이어스는 이를 악물더니 그대로 나가버렸다.
나는 빨라지는 심박을 진정시키며 공작의 책상으로 가서 지도를 바라보았다.
그 지도를 보고서야 내가 원작에서 읽은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내가 말해준 내용만으로 하냐크족과 황태자의 병사들을 동시에 방어할 작전을 짠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하나 문제가 있었다. 아군을 설득하지 못하는 작전이 잘 실행될 리가 없었다.
“체이어스 경도, 다른 경들도 이번 작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왜 아니겠어. 이건 미친 짓이야. 작전도 아니란 말이다.”
카이런 공작은 신경질적으로 지도를 탁 접더니 말했다.
“차.”
“네!”
나는 얼른 막 덖어낸 릴리스 차를 내갔다.
“공작님, 차 드세요.”
“음. 좋군.”
그는 뜻밖에 고소한 향미도 좋아했다.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때가 아니었지만.
“아리엘사. 마물의 골짜기로 들어가면 작전 같은 건 소용이 없다. 오직 자기 본능과 직관에 따라 싸워야 하지. 저들은 그런 불안을 이겨낼 수 있는 자들이다. 내 땅이 아닌 곳에서 싸우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뿐.”
비합리를 무릅쓰고 부하들을 설득할 수 있는 주인이라니.
새삼스럽게 우리 남주가 멋있게 보여서 뿌듯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걱정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집무실에서 물러 나왔다. 의사 선생의 작업실로 갈 생각이었다.
그때, 복도 끝에서 체이어스가 불쑥 나타났다.
‘하르펠의 여우.’
체이어스의 이명은 그의 영리함 때문에 붙은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화가 난 그의 눈에서는 새파란 기운이 도는 것 같았다.
나는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났다.
“아리엘사.”
“체이어스 경. 저 지금 의사 선생님 도우러 가는데…….”
체이어스는 나를 복도의 벽으로 밀치며 팔을 짚어 가두었다.
다른 남자가 이랬다면 설레야 하겠지만, 상대가 체이어스이다 보니 위협 말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음성을 잔뜩 죽여 말했다.
“아리엘사. 공작님과 나는 평생 싸웠다. 그분이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는 내가 가장 잘 안다.”
“네…….”
“그런데 공작님께서 왜 저런 작전을 세우셨는지,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어. 아리엘사, 왜일까?”
“그거야 제가 어떻게…….”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네?”
정곡을 찔린 나는 즉시 눈을 피했다. 그러나 체이어스는 내 턱을 들어 올렸다. 심장이 쾅쾅쾅, 위험하게 뛰었다.
“제가 무슨 생각을……. 놔, 놔주세요!”
“사과나무에서 떨어지고서 어딘가 이상해진 시녀가, 공작님 곁에서 그분의 판단력에 계속 영향을 주고 있어. 설마 차에 이상한 거라도 타고 있나?”
“체이어스 경! 무슨 그런 말씀을……!”
그러나 그는 나를 냉정히 쏘아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아리엘사 로크만.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다. 아무리 공작님께서 너를…….”
나는 체이어스의 눈동자에서 일말의 살기를 보고 있었다. 목구멍이 꽉 막힌 듯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겁에 질린 내 눈을 보고 자제하려는 듯 주먹으로 벽을 꽉 밀었다.
“내가 너를 오래전에 가둬두었어야 하는 건 아닌지, 격렬히 후회하고 있어.”
그의 의심은 타당했다. 체이어스의 입장에서는, 나는 갑자기 임금을 홀린 여우나 흑막으로 보이는 것이 당연할 것 같았다. 카이런 공작 본인이 미친 작전이라고 말한 그 전술로 목숨을 잃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의심은 당하더라도 비난은 받고 싶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카이런 공작이 아둔한 주군이 되는 것이 싫었다.
“공작님이 시녀 하나 때문에, 자기 부하들을 죽음에 몰아넣고 있다고 생각하신다고요? 게다가 그 부하 중에는 제 아버지도 계신다고요.”
“…….”
내 반문에 체이어스는 자기 입술을 조금 물어뜯었다.
“공작님이 미치셨는지, 의사 선생님께 확인해보세요. 그게 아니라면, ‘위대한 그분’의 판단을 의심하지 마시고요!”
나는 울컥한 채로 체이어스의 가슴을 밀치며 말했다.
“제가 그렇게 대단해 보여요?”
재빨리 복도 모퉁이를 돌아설 때 그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그럴지도.”
❄❅❄
일주일 후, 카이런 하르펠 공작은 가신과 병사들 백을 데리고 중부로 출정했다. 추수철을 막 앞둔 때였다.
다가오는 추수와 가축 돌보는 일은 모두 여자들의 몫으로 남았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다.
남은 여자와 아이들은 단지 자신의 가족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원했다.
나 또한 그랬다.
나는 출정하는 카이런 공작의 아머를 입혀주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빌어먹을.
솔직히 말하면 좀 그런 기분이었다. 빌어먹을.
이 전투의 운명이 어떻게 갈릴지, 두려워서 울고만 싶은데, 검은 아머를 갖추어 입고 은은한 아우라를 뿜는 카이런 공작은 과하게 멋있어 보였다.
이런 사람에게 왜 시련을 주냐고!
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최대한 북부 여자 같은 말로 그의 승리와 무사 귀환을 빌어주고 싶었다.
“공작님.”
그러나 나는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압박감에 숨을 참았다.
그는 인사 대신 나를 껴안았다. 아머가 딱딱해서 불편해야 했지만, 그의 품과 그가 손으로 가볍게 눌러주는 등은 이상하게도 포근하게 여겨지기만 했다. 나 자신이 퍽 바보같이 여겨졌다.
그의 목소리는 너무 낮아서 그가 나를 거칠게 안아주는지 다정하게 안아주는지 나는 분간할 수 없었다.
“차를 준비해둬. 빨리 돌아올 테니.”
내 가슴은 뜨거워졌다.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카이런 하르펠 공작은 커다란 나팔 소리와 함께 북부군을 이끌고 출정했다.
그리고 승리했다.
❄❅❄
그동안 종종 돌아오는 부상자들을 통해 전세를 전해 듣기로 전황은 나쁘지 않았다. 물론 게오르그도 무사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될 리 없었다.
그렇게 마음을 졸이고 있을 때, 그가 하냐크족을 물리치기 위해 출전한 지 일주일 만에, 하르펠 성에는 승전보가 전해졌다.
나는 사람들과 함께 성문으로 달려 나갔다.
북부의 가을 하늘 멀리서부터 울리는 뿔나팔 소리 뒤로 시커먼 군마의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카이런 공작이 무사하게 돌아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의 아우라는 멀리서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 앞에 하르펠군이 도착했을 때, 나는 마중하는 무리 속에 울먹이며 서 있었다.
하르펠에 온 황태자가 말에서 떨어졌을 때, 나는 내가 쓸모없다고 느꼈다. 카이런 하르펠에게 중요하고 소중한 사람이 되려던 내 소망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카이런 공작과 북부, 하르펠의 사람들을 돕는 데 실패할 거라는 무력감, 내가 아무런 쓸모없는 이방인일 뿐이라는 기분은 끔찍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카이런 공작은 모든 시련의 발단이 되는 처참한 전투에서 승리했고, 하르펠을 무사히 지켜냈다.
나는 벅찬 기분에 주먹을 꼭 쥐었다.
나는 원작을 이겼다.
카이런 공작은 백성들의 환호를 받으며 성문 앞에서 말에서 내렸다. 그는 그를 맞이하기 위해 몰려나온 각지의 행정관과 장로들과 인사했다.
그리고 기사와 병사들도 말에서 내려 마중 나온 가족과 친구들과 기쁨을 나누었다.
이번 전쟁이 가지는 의미는 북부인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 승전이 마물 토벌에 이어 황제의 영향력으로부터 북부의 안위를 다시 한번 지켜낸 것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카이런 공작은 행정관들에게 둘러싸여서 인사를 받다가 한순간, 멀리 뒤쪽에 있는 나와 눈을 맞추었다.
곧 어떤 노인이 그의 앞을 가렸지만.
“푸훗…….”
나는 혼자 웃고 말았다. 그는 약속대로 금방 돌아와 내 차를 마실 것이다.
행복했다.
얼른 올라가서 차를 끓여야 했다. 두 사람만 더 만나고서. 게오르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체이어스가 사람들을 뚫고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그를 와락 껴안았다. 체이어스의 몸이 이렇게 단단했던가, 나는 어색하게 느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체이어스 경, 무사히 돌아오셔서 기뻐요!”
“아리엘사…….”
체이어스의 목소리는 침울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게오르그를 찾고 있었다.
“아빠는요?”
“아리엘사. 게오르그 경은, 태양의 곁으로 귀환하셨다.”
“……네?”
나는 체이어스의 어두운 눈동자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는 내가 이해하기를 기다리며 시간을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