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공작님은 제게 온실을 만들어 주셔야 해요.
북부의 여름은 내게는 늦봄이나 다름없었다. 들판에는 꽃이 피고 곡식들이 싹을 피웠지만 더워서 옷을 벗고 호수에 뛰어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물론 나만 그랬다.
이곳 아이들은 서슴없이 옷을 벗어 던지고 내와 호수에 뛰어들었다. 이러니 북부 인들이 강골이 아닐 수가 없었다.
새 보트도 네 척이나 만들어졌기에, 호수에는 매일 보트가 떠다녔다. 카이런 공작이 보트를 쓰지 않는 날에는 영지민들도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올봄이 유난히 따뜻해서 식물들이 눈에 띄게 잘 큰다고 했다. 내 눈에도 방목하는 가축과 말들이 하루가 다르게 살이 쪄가는 게 보였다.
그리고 제국에는 카이런 공작이 북부를 시찰하러 온 황태자를 내동댕이쳐서 죽이려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런 풍문이 돌 것은 황태자가 북부를 방문하기 전부터 예상한 바였으니 씁쓸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게오르그는 나를 간섭하지 않았다. 그는 연무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삐진 것이다.
나는 주로 주방 하녀들로부터 소문을 들었는데, 게오르그 경이 벨리아와 헤어진 이후 기사들을 쥐 잡듯이 한다고 했다.
설마…….
게오르그가 다가올 전쟁을 준비하면서 개인적인 문제를 뒤로 미뤄두기로 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벨리아와 헤어진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바로 공작의 외출 허락을 얻어 벨리아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녀는 울적한 얼굴로 내게 새 옷을 맞추겠느냐고 물었다.
“올해는 유달리 따뜻하니까 여름옷을 미리 준비해두는 것도 좋겠어.”
“아줌마…….”
내 울먹거리는 표정을 본 벨리아는 시선을 피하며 한숨을 쉬었다.
“게오르그 경이 그동안 일에 소홀했던 것 같다고…….”
“같다고 뭐요? 아줌마? 정말 헤어지신 거예요?”
“식을 내년 봄으로 미루자고 그러시네. 나는……. 게오르그 경이 우리 관계에 대해 망설이고 있는 줄 몰랐어. 나는 이번 가을에는 식을 치르고 싶었거든. 그래서 그만하자고 했어.”
“아줌마! 아빠는…….”
벨리아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리엘사, 이건 어른들 일이야. 아빠를 잘 돌봐드리렴. 그분은 너를 정말로 사랑하시니까.”
게오르그야말로 그녀를 정말로 아낀다는 생각이 들어 더 가슴이 아팠다. 그는 자기 일에 모든 것을 거는 사람이고, 그래서 다른 누군가가 고통스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다.
나는 입을 열었지만 적당한 말이 골라지지 않아 그대로 일어나고 말았다. 살 만큼 살아온 사람들이 햇병아리 같은 내 말을 듣고 뜻을 굽힐 리는 없으니 말이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성으로 돌아왔다.
무거운 마음으로 연무장으로 갔지만, 실연의 상처에 기사들을 드잡이하는 중인 바보 중년남을 위로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내가 돌아오려고 몸을 돌리니 체이어스가 서 있었다.
“여긴 왜?”
“깜짝이야! 체이어스 경.”
그는 내 얼굴 다음으로 연무장 정면 쪽을 보았다.
거기서는 순시 나온 카이런 공작이 훈련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체이어스는 그를 모시고 나온 것이었다.
“게오르그 경을 만나러 왔니?”
“오늘은 돌아가려고요.”
내가 인사하고 돌아서자 그가 연무장을 응시하며 말했다.
“임신부가 어딜 그리 돌아다녀?”
“헉.”
황태자가 나를 데려가지 못하게 하려 했던 거짓말을 아직도 써먹다니.
나는 그를 획 돌아보았지만 그는 나를 등지고 카이런 공작에게로 멀어지고 있었다. 그의 등이 웃고 있는 게 보였다.
전 같으면 그에게 따지고 들거나 했을 텐데,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전쟁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나쁜 것밖에 가져오지 않는 게 분명했다.
나는 그사이 완성된 온실에 가서 새 허브를 솎아서 가져왔다. 여름에는 온실의 천장을 덮어서 오히려 주변 기온보다 서늘한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최근에 릴리스 허브를 살짝 덖어서 차를 우리면 맛이 고소해진다는 것을 발견해 그것을 시험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의사 선생을 찾아가 도왔다. 그는 병사들이 쓸 상처와 동상약을 잔뜩 만들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카이런 공작은 더 이상 나를 자기 곁에 구속하지 않았다. 전처럼 바쁘지 않으면 일찍 돌아가라고 하고 행선지를 보고하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어느 틈에 나는 그것에 다 적응해버린 후였다.
사실은 내가 그의 관심 범위 안에 내내 머물러 있다는 사실이 그리 싫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
북부의 들판에 곡식이 무겁게 익어가던 무렵. 어느 이른 아침에 하르펠 성에는 황실에서 보낸 사자가 도착했다.
<카이런 하르펠 공작은 중부로 출정하여 하냐크족의 침입을 물리치라.>
황제의 명이 담긴 스크롤을 펼쳐 든 카이런 공작에게, 사자는 배에 힘을 잔뜩 주고 말했다.
“북부에서 곧장 남하하면 중부와 접경하고, 제국에 북부의 군대만큼 강한 군대가 또 없으니-”
“-명 받들겠다고 전하시오.”
카이런 공작의 사뭇 신경질적인 대답에, 사자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어떤 귀족도 자기 병사들을 잃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니 출병명령을 전하는 방 안에는 비통하거나 숨 막히는 공기가 감도는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곧장 남하하면 중부라고는 하지만 북부에서 중부로 내려가려면 산맥을 지나야 했다. 거리만으로 따지면 중부 영지들에서 출병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었다.
중부의 귀족이 아닌 산맥 너머, 그것도 마물을 지키는 자를 불러내려 방어하게 한 처사가 부당함은 사자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잠시 카이런 공작을 바라보았다.
“돌아가 폐하께 전하시오. 카이런 하르펠의 충성심을 증명하겠다고.”
사자는 즉시 추방되다시피 하르펠령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가신들은 카이런 공작의 집무실로 소환되었다.
나는 그들에게 차를 내지 않았다.
❄❅❄
카이런 공작과 가신들은 북부에서 중부로 이어지는 지역의 지도를 펼쳐놓고 작전을 세웠다.
“이 길로 빠르게 이동하여 고지대에 진지를 구축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 계곡에 기대 하냐크족의 진출을 막을 수 있습니다.”
구석에 앉은 나는 체이어스가 작전을 세우는 목소리를 들으며 기시감을 느꼈다. <눈 내리는 사막>에서 읽었던 대사가 내 눈앞에서 생생하게 실연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목 피부에 소름이 돋은 채로 주먹을 꼭 쥐었다. 절대 저대로 진행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것은 카이런 공작의 몰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