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그러나 세간에 카이런 공작이 황태자를 죽이려 했다는 이상한 소문이 도는 마당에 황제의 명령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카이런 공작이 황제에게 공식적으로 반기를 드는 것이나 다름없이 여겨질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가신들의 설득에 뜻을 굽힌 카이런 공작은 병력을 이끌고 중부로 출정하고, 낯선 지형에서 서쪽 사막 부근의 하냐크족의 공세에 맞서 고전한다.
그는 가우린에 의해 보급마저 끊겨 고전하다가, 마침내 보급 식량이 온다는 소식에 그것을 받으러 나간다. 이 부대를 이끈 것이 게오르그였다.
그러나 식량 마차 대신 나타난 것은 정체를 숨긴 황제의 병사들이었다. 게오르그는 이때 전사하고 황제의 병사들은 카이런 공작의 북부군의 후방을 쳐서 북부군은 괴멸하다시피 한다.
결국 카이런 공작은 군대를 다 잃고 가신 몇 명만 이끈 채 도망친다.
그때 돌연 나타나 추격병을 막아준 자들은 남부의 지배자라 불리는 프라일 후작의 병사들이었다.
프라일 후작은 황제의 다음 목표가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개입한 것이다.
후작은 카이런 공작에게 야만족을 끌어들인 것이 황태자라는 증거를 흔들어 보이며, 힘을 회복할 때까지 자신에게 몸을 의탁할 것을 제안한다.
곧 카이런 공작이 남부의 장미라 불리는 후작의 딸을 만나게 된 건 매우 불유쾌한 상황에서였다. 그래서 그들이 서로를 향한 마음을 쌓아가는 과정은 지난하고 고통스러워야 했다.
나는 카이런 공작에게 가장 가까운 시점, 황태자가 돈을 주고 불러들인 하냐크족의 침입경로와 전투의 내용을 상세하게 말해주었다. 하지만 끝부분을 말하려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 이야기를 경청한 그는 나를 응시하며 물었다.
“아리엘사. 그렇게 힘들게 피할 것 없어.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되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황제 폐하가 보급 마차에 숨겨서 보낸 병사들과 야만족의 협공으로 굶주린 하르펠 군은 전멸해요.”
카이런 공작은 손을 뻗어 내 턱을 쳐들었다. 나를 다치게 하려는 건 아니었지만, 그의 손끝에 흐르는 팽팽한 힘이 내 피부로 전해졌다.
그는 적이 아니라 자신이 전멸한다는 개념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그의 눈으로부터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공작님께는 가신 다섯이 남아요.”
카이런 공작의 단단한 시선이 충격으로 균열을 일으키는 것을, 나는 생생히 바라보아야 했다.
그는 한참 만에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나는 고개를 저으려고 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에게 턱이 붙잡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인을 잃은 북부는 황제 폐하의 섭정으로 험한 꼴을 겪게 돼요.”
그가 다시 북부로 돌아왔을 때, 그는 아리엘사가 좀처럼 그와 눈을 맞추지 않고 전보다 더 말수가 없어졌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는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지 않는다. 그도 주인 없는 땅에서 황제의 수탈이 얼마나 혹독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나의 미래이기도 했다. 내가 반드시 피하고 싶은 미래. 그가 피해가도록 돕고 싶은 미래 말이다.
카이런 공작의 손가락이 내 뺨을 쓸어 눈물을 닦아냈다.
“이젠 모든 게 달라.”
“네?”
“네가 곁에 있으니까. 이방인.”
나는 숨을 멈춘 채 그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네가 무엇을 보았건 그것은 이제 과거다. 이제 네 음유시인은 새로운 이야기를 읊어야 할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
그렇게 말한 다음, 그는 마치 나를 흘겨보듯 삐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술잔을 비우고 집무실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