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나는 이 상황과 맞지 않는 카이런 공작의 침착함이 더 두렵게 느껴졌다.
“한번 졌을 뿐이다. 그가 이번에는 기어이 원하는 걸 가져갔지만, 또 내어줄 생각은 없어. 그러니 내 책사란 놈이 얼빠진 꼴 보이지 마라.”
나는 체이어스에게 옌델 차를 내놓았다. 카이런 공작에게도 옌델을 타려고 했지만, 그의 말을 들은 나는 시나몬 차를 탔다.
전투에는 졌어도 전쟁에 진 것은 아니다.
그의 목소리가 내 마음을 든든하게 울리는 기분이 들었다. 과연, 카이런 공작이었다.
잘난 사람은 그인데, 어쩐지 내가 다 자랑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내가 그의 앞에 시나몬 차를 올리자, 카이런 공작은 마치 내 마음을 알아챈 것처럼, 입가에 조금 오만한 미소를 설핏 지었다.
체이어스는 뜨거운 옌델 차를 한 번에 마시려다가 입술을 델 뻔하고는, 짜증스럽게 찻잔을 밀어버렸다.
카이런 공작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차 안 마실 거면 가서 성탑 공사를 지휘해라. 사흘 안에 끝내. 그리고 타이라와 게오르그 경을 들라 해. 말을 먹일 때다.”
체이어스는 그제야 눈을 빛내며 카이런 공작을 응시했다. 나도 공작을 흠칫 돌아보았다.
나는 ‘말을 먹이다’가 무슨 말인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물을 막기 위해서 마물을 먹이고, 외침을 막기 위해서 말을 먹인다.
곧, 말을 먹인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전쟁 준비를 뜻하는 말이었다.
북부 남자를 진정시키는 건 허브 차가 아니라 전쟁이었다.
체이어스는 조금 전의 그 남자라고 믿을 수 없는 침착한 얼굴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방을 나가기 전 나를 쏘아보는 걸 잊지 않았다.
“아리엘사, 너는 이제부터 행동을 철저히 조심해야 한다. 내 말 알아듣지?”
“그 정도 눈치는 있어요!”
내가 소심하게 쏘아붙였음에도, 그는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나갔다.
그러나 나는 다리가 풀리는 기분이 들어 소파에 앉았다.
체이어스가 먹던 차를 조금 불어 마시자 그런 나를 보던 카이런 공작이 코웃음을 쳤다.
“이제는 같은 잔을 쓰는 걸 꺼리지 않는 모양이군.”
카이런 공작은 내가 체이어스의 약혼녀라는 농담을 지금 꺼내는 모양이었다.
“공작님! 지금 농담할 때예요?”
“술 가져와.”
지금이 술을 마실 때도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나는 카이런 공작을 바라보다가 발딱 일어나 술을 가져왔다.
그는 내가 가져다 놓은 술잔에 술을 한 잔 따르더니 내 쪽으로 밀었다. 전에 귀하다고 했던 술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내가 타준 시나몬 차를 우아하게 마셨다.
그는 내 의문 하는 시선을 맞받더니 내 손을 향해 턱짓했다. 무릎에 놓인 내 두 손은 달달 떨리고 있었다.
“마셔.”
나는 더 생각하지 않고 마셨다. 술이 위장으로 채 흘러내리기도 전에, 울컥 눈물이 났다.
나는 눈물을 꾸역꾸역 밀어 넣으려 애쓰며 말했다.
“이걸 막았어야 했는데, 이렇게 되는 걸 막으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성탑도 불태우고, 체이어스 경의 아이도 가지고……. 흐흐흑!”
내 뒷말에 눈살을 찌푸리긴 했지만, 카이런 공작은 내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차를 마실 뿐이었다.
그 목재가 거기 떨어진 게 정말 우연이라고?
정말 그런 일이 황태자가 준비한 음모는 아닌 거라고?
나는 점점 서러움이 복받쳐왔다. 나를 믿어준 카이런 공작에게 미안해서 죽고 싶었다.
그는 나직이 말했다.
“아리엘사. 네 노력은 모두 성공했다. 단지 이번에는 황태자의 운이 더 좋았을 뿐이야.”
“공작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음 싸움에는 이길 수 없어.”
“다음 싸움……이요?”
“네가 말하지 않았나. 나는 어떤 여자를 만나야 한다고.”
지금은 여주 이야기가 나올 때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하르펠 성을 잃는 원작의 흐름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마음이 아프고 괴로운데, 그가 너무 덤덤해서 나는 더 화가 나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한 노력들, 내가 그를 생각하는 마음까지 모두 그가 덤덤하게 지나가는 것으로 여기는 듯한 섭섭함마저 들었다.
그는 그런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을 이었다.
“내가 신변이 위태로운 상태로 여자를 곁에 두었을 리 없어. 내가 미래에 사랑 놀음을 할 거라면, 그건 세상에서 내 적이 모두 사라져 할 일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일 거다. 그러니 다음 싸움이 있을 테지.”
“…….”
“네 말에 의하면. 이방인.”
나는 할 말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무서운 사람이다, 그런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그의 일관성도, 그의 평정심도, 모두 내 상식을 넘어섰기에 나는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곧 수긍했다.
그는 이런 사람이고, 그래서 그런 사랑을 했던 거라고.
그가 쉽게 흔들리고 갈등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나는 또 얼마나 불안했을까. 이 세계에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 아끼는 사람은 이 사람뿐인데.
결국 내 마음은 감사라는 감정에 도착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공작님, 체이어스입니다.
“들어와.”
나는 게오르그와 타이라 경이 안으로 드는 걸 보며 재빨리 테이블을 치웠다.
게오르그는 내가 지나가자 술 냄새를 맡은 듯 코를 벌름거렸다. 그리고 내가 치우는 술잔을 보고 잠시 눈을 부라렸지만, 침착하게 공작에게 인사했다.
카이런 공작은 모든 것을 점검했다. 불탄 성탑 말고도 성의 방비 상태, 시기별로 동원할 수 있는 병사의 수, 식량, 무기, 말, 북쪽 방벽의 경비 상태까지.
회의를 마쳐갈 때쯤, 타이라 경이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숙련된 기사라도 말에서 떨어집니다. 황태자 전하도 무예를 익히신 분이니…….”
그는 카이런 공작이 황태자의 분노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카이런 공작이 대답을 고르기 전에, 체이어스가 말했다.
“타이라 경, 황실에서 마석이 필요하니 방벽에 좁은 틈만 내놓고 지키자고 했을 때, 누구도 앞일이 어떻게 될지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황실은 더 많은 마석을 원했다. 그래서 카이런 공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마물의 침입 통로를 유지해 일정량의 마석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그때는 그것이 합리적인 판단처럼 보였다.
하지만 마물 중에는 인간에 가까우리만큼 지능이 높아 마법을 부리는 것들도 있었다. 그것들의 작전에 휘말린 북부는 방벽을 잃고 괴멸할 뻔했다.
카이런 공작이 그것을 다시 방벽 너머로 추방하고 방벽을 봉쇄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은 황궁 밖에도 마물이 어슬렁거렸을 것이다.
게오르그는 내리깐 눈으로 테이블을 쏘아보며 몹시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방벽을 너무 잘 지킨 게야.”
타이라 경의 얼굴은 그제야 굳었다.
나는 게오르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방벽이 봉쇄되고 수년이 흐르면서, 황가는 이제 카이런 공작이 없어도 방벽이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물의 위협이 없는 세상의 카이런 공작은 황가에게는 위협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카이런 공작은 대화를 마무리했다.
“어떤 준비도 일상적인 범위를 벗어나게 보여서는 안 된다.”
가신들은 묵묵히 자리를 떴다.
시각은 이미 식사 시간을 훌쩍 넘겨 있었고, 카이런 공작은 집무실로 식사를 들였다. 내 것도 함께여서, 나는 테이블에서 함께 식사했다.
마물로부터 세상을 지키는 북부의 공작이란 멋있게만 보였는데, 곁에서 지켜보는 것은 이렇게 마음 졸여야 하는 일이었다.
그동안 내가 카이런 공작을 곁에서 바라보며 가졌던 모든 즐거움이 그 대가를 한꺼번에 요구하는 것만 같았다.
묵묵히 식사를 마친 나는 카이런 공작의 식기를 치우고 물었다.
“술을 낼까요?”
“좋지.”
“공작님 술이요.”
“그 말이었어.”
카이런 공작은 술잔을 들고 창가로 갔다.
불탄 성탑 주변에는 비계를 따라 횃불이 환하게 올라 있었다. 오늘부터는 철야로 수리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공작님.”
그는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괜찮다고 다독여주거나, 너를 여전히 믿는다는 말도 해주지 않았다.
평소에 미운 소리는 잘만 하면서 이때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 그가 야속했다.
하지만 야속하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지금 가장 큰 부담을 느끼고 있을 그에게 내 위로까지 요구하는 내가 너무 하찮아서 눈물이 나오고 말았다.
나는 그냥 우리 남주에게 잘해주고 싶은데, 그래서 그가 나를 중요한 사람으로 여겨주고 믿어주기를 바랐는데, 그게 단순한 일이기가 이토록 힘들다는 게 조금 서러웠다.
카이런 공작은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말했다.
“왜 울지?”
나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닦으며 진정하려고 애썼다. 그제야 내가 취기 때문에 조금 더 격앙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요. 그냥, 조금 무서워서……. 저는 북부가 좋고, 공작님과 지내는 게 좋고……. 흐흑.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아요.”
나는 내 뺨이 그의 가슴에 눌린 압박감과 둥둥 뛰기 시작한 심장 때문에 눈을 떴다. 숨을 조금 쉬기 힘들었다.
나는 카이런 공작의 가슴에 안겨 있었다.
나를 가볍게 안은 그는 내 뒷머리를 지그시 감싸 누른 채 말했다.
“나를 앞에 두고서 두려워하는 북부인이라니, 기분이 상하는군.”
‘그런 게 아니라’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내 목소리는 어디론가 사라진 듯이 자취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아리엘사. 말해봐. 나는 이번 싸움에서 어떻게 되지?”
말의 내용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퍽 부드러웠다.
카이런 공작이 반역을 꿈꾸는 것처럼 분위기를 조성한 황제는, 서쪽의 야만족이 중부를 침공했을 때 카이런 공작에게 토벌 명령을 내린다.
마물의 방벽을 지켜야 하는 북부는 대대로 병력을 차출하는 명령에서 예외였고, 세금에서도 황제로부터 특혜를 받았다. 그러니 그것은 북부의 권리를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