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8/128)

43화

황태자께서 이름을 묻는데 피해갈 방법은 없었다. 나는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아리엘사라 합니다.”

이 인간은 고단수였다. 나는 이런 질문은 예상도 하지 못했는데,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가 미래를 안다고 요령과 행동력이 갑자기 고급 레벨로 올라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꼰 다리를 까딱거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태자가 원하는 것을 내놓기 전까지는 이 방을 나갈 수 없는 게 분명했다.

말실수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압박감에 식은땀이 났다.

“아리엘사, 그래서? 비결을 말해봐. 어떻게 카이런 공작의 마음을 사로잡았어?”

“제가요?”

나는 조금 짜증이 담긴 목소리로 뱉고 말았다. 황태자의 눈이 커졌고, 나는 급히 아까보다 더 머리를 숙였다.

나는 재빨리 말해야 했다. 나는 허리를 숙인 채, 몸 둘 바 모르겠다는 듯 최대한 소심하게 말했다.

“공작님께서 제가 타는 차를 좋아하십니다. 아마 이유는 그것뿐이 아닌가 합니다.”

“예뻐서는 아니고?”

“…….”

나는 헛숨 섞인 한숨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카이런 하르펠이 여자 미모에 혹하는 남자였다면 아직도 독신이겠냐고요. 뭐, 나더러 예쁘다고 해주신 건 감사합니다.

나는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정중하게 말했다.

“농담이신 줄은 알지만 몹시 너그러운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전하.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나는 그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고 물러 나왔다.

짧은 대화였지만 나는 황태자가 상대하기 쉽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나는 문 앞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는 호위기사들을 피해 얼른 복도를 빠져나왔다. 그가 머무르는 동안은 긴장해야만 했다.

❄❅❄

황태자는 다음 날 오전에 공작의 집무실로 왔다. 기다리던 카이런 공작은 깍듯이 소파의 상석을 가리켰지만 황태자는 곧장 창가로 갔다.

“저런, 저것이 불이 났다는 성탑인가요? 공작님이 사냥에 불참하시는 바람에 폐하께서 몹시 서운해하셨답니다.”

황태자의 말투는 카이런 공작의 변명이 별로 믿기 어려웠다는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카이런 공작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저것 때문에 올봄 축제를 망치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전하의 휴식을 위해 잠시 공사를 멈추었습니다.”

“애석한 일입니다. 유서 깊은 성에 흠이 났군요.”

“북부는 언제나 고난을 이겨왔습니다. 전하.”

“그래요. 하르펠이 제국에 얼마나 중요한 땅인지 공작님께서 가장 잘 아실 테니까요. 공작님이 없으면 마물의 방벽은 누가 지키겠어요.”

카이런 공작은 짧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마물이 이 땅을 더럽히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저의 소명입니다.”

황태자는 은은한 미소를 띤 채 카이런 공작을 응시하다가, 소파로 갔다.

“아리엘사, 내게는 무슨 차를 타줄 거지?”

황태자의 명랑한 목소리에 카이런 공작이 나를 획 돌아보았다.

나조차도 당황스러웠다. 황태자가 마치 나와 십년지기 친구였던 것처럼 나를 편안하게 불렀기 때문이다.

“옌델 허브 차는 어떠십니까, 전하?”

내가 그걸 고른 건 당연히 카이런 공작을 위해서였다. 지금 내게 몹시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는 중인 그를 위해서 말이다. 그는 지금 순간적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그가 황태자의 등 뒤에 서 있어서 나밖에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반응이 격렬해서 내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황태자는 자기 등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게 물었다.

“공작님께서 그 차를 좋아하시나?”

나는 카이런 공작의 눈치를 흘끔 보며 말했다.

“공작님께서는 향미가 강한 차를 좋아하시어……. 시나몬 차를 내어드릴까요?”

“공작께서 시나몬차를 즐기신다? 그러면 나도 그걸로 맛보겠어. 나는 이번에 북부를 맛보려고 여기 왔거든.”

그는 나를 향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북부를 맛보려고? 그 말은 내게도 의미심장하게 들렸고, 표정을 들킬까 봐 나는 허리를 숙였다. 카이런 공작의 눈썹도 묘하게 일그러졌지만 스쳐 가는 표정이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나는 시나몬 차 두 잔을 테이블로 내어갔다. 내가 물러나려 하자 황태자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나는 순간 놀라 카이런 공작을 쳐다보았고, 카이런 공작은 굳은 얼굴로 황태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매우 느린 동작이었다.

황태자는 나를 향해 조금의 악의도 없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같이 마시지, 아리엘사. ‘하르펠의 방패’의 딸이라면 나와 합석한다고 해서 격이 떨어지는 일은 아닐 거야. 그렇지?”

“저는 시녀로서 이 방에 든 지라…….”

하지만 나는 이미 황태자의 곁에 앉아 있었다. 그가 내 손목을 서슴없이 잡아당겼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이라고 더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황태자 전하.”

그것은 위협이었다.

카이런 공작의 목소리는 건조했으나 한없이 무거웠다. 얼핏 들으면 태연한 목소리였지만, 내 귀에는 거기에 담긴 위협적인 뉘앙스가 생생하게 전해져 와서 베일 것만 같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아찔해서 제대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사람이, 잘 참다가 왜 이러냐고요!

나는 황태자에게서 손을 확 빼내며 두 손으로 내 입을 가렸다.

그리고 소리쳤다.

“감히 제가, 그런 영광을 얻어도 된다고요?”

내가 깜짝 놀라서 분위기 파악을 못한 사람처럼 말하자, 카이런 공작은 이를 사리문 채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황태자는 내 급격한 태도 변화에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그는 내 성격을 잘 모를 테니 조금 오바해도 상관없을 터였다.

“그럼. 내가 방금 그렇게 말했지 않아.”

“어머, 어떡해. 어떡하지……?”

황태자의 유쾌한 대꾸에 나는 의자에서 방방거리며 ‘어떡해’를 연발했다. 내 움직임 때문에 테이블 위에 올려둔 시나몬 차 두 잔이 움찔움찔 기듯 움직였다.

내가 좀 과하다 싶은지, 황태자는 눈썹을 보기 좋게 찌푸리면서도 웃었다.

“아리엘사. 그렇게 좋아?”

“제국의 작은 태양과 나란히 앉다니, 그런 영광을 얻었는데 좋은 게 당연하잖아요. 전하.”

그는 재미있다는 듯 머리를 기울이며 관자놀이를 손등으로 괴었다. 나는 나를 째려보고 있는 카이런 공작을 열심히 무시했다.

“호오.”

“실은 어제 잠을 한잠도 못 잤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제국의 제일가는 미남이라는 소리를 귀가 아프도록 듣기는 했지만, 실물로 뵈오니 뭐랄까…….”

제기랄, 내 취향은 카이런 하르펠이다. 나는 거짓말 중에 제일 어렵다는 취향 거짓말을 해야 했다.

황태자는 제 찬사가 나오자, 더 떠들어보라는 듯 말했다.

“뭐랄까?”

나는 흥미로 반짝이는 그의 눈을 보며, ‘옜다 먹어라’ 하는 심정으로 말을 쥐어 짜냈다.

“음……. 북부에 태양이 오셨으니 처음으로 진짜 여름이 오는 걸까, 그러면 달력을 바꿔야 하는데, 그러려면 공작님의 허락이 필요할 텐데…….”

나는 그때 내 위장에 두드러기가 돋았다는 것에 만 원을 걸 수 있었다. 나는 앞으로는 아부하는 사람들을 욕하지 않기로 했다. 아부야말로 영혼을 갈아 넣어야 하는 짓이다.

거짓을 격렬하게 뱉은 나는 조금 씩씩거리고 있었고,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칠푼이처럼 보였다.

한마디로 아름답고 명석한 황태자와 냉철하고 강력한 북부의 주인과 한 자리에 앉아 있기에는 격이 터무니없이 떨어져 보였다.

카이런 공작은 내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를 갈 듯 나직이 말했다.

“아리엘사, 무례하다. 어느 안전이라고.”

“헉! 죄송합니다. 그래서, 그래서 아버지가 칠푼이 티 내지 말고 공작님 안전에서는 꼭 입 다물라고 했는데, 죄송합니다……. 흑.”

내가 울먹거리려 하자 황태자는 머쓱한 얼굴로 카이런 공작을 바라보았고, 그는 내게서 못마땅한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 동작은 나를 외면하는 것이어서, 나는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서 나왔다.

이럴 때는 카이런 공작과 내가 쿵짝이 참 잘 맞는다는 기분이 들어서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슬쩍 웃음이 나온 것을 문 앞에 선 황태자의 호위 기사들에게 들킬 뻔하고 말았다.

내가 복도로 나가자 거기서 기다리던 체이어스가 다가왔다.

“두 분은 계속 담소 중이신가?”

“그렇습니다. 체이어스 경.”

“그럼 말씀이 끝나실 때까지 나와 기다리지.”

‘싫은데요?’

나는 속으로 말했지만 황태자의 호위 기사들이 듣는 데서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네. 체이어스 경.”

나는 얌전하게 머리를 숙이고 체이어스를 따라 복도를 걸었다.

그는 복도 중간에 있는 대기실 문을 열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나는 이미 진이 빠질 대로 빠져 있었기 때문에 바로 의자에 털썩 앉았다.

“분위기는 어땠어?”

“황태자 전하는…….”

나는 아무도 없는 방에서 두리번대며 속삭였다.

“완전히 약았……. 겉과 속이 완전히 달라요.”

체이어스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다 들었다는 듯 피식 웃었다.

“황제가 되실 분이야. 뭘 바랐어?”

“그러게요.”

체이어스는 내가 숨을 조금 돌릴 때까지 말을 걸지 않았다. 하지만 시선은 내내 나를 살피고 있었다.

오늘 그는 뭔가 좀 달랐다. 그는 평소에도 차가웠지만, 평소에는 ‘나는 바쁘니까 중요한 얘기가 아니면 말 걸지 마’하는 종류의 차가움이었다면, 지금은 날이 선 차가움을 두르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흥분이 조금 가라앉자 방 안에 단둘이 있는 것이 어색해져서였다.

“아빠랑 사이가 껄끄러워지셨을까 봐-”

“-미안하다.”

“네?”

“게오르그 경과는 화해했다.”

“다행이에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서 나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말했다. 그러나 체이어스의 표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게오르그 경이 오해를 풀었다고 하시던데.”

“그래요? 무슨 오해요?”

나를 지그시 응시하는 체이어스의 미소는 퍽 뒤틀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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