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그러니까, 체이어스 경과 화해하세요.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고, 앞으로도 아무 사이도 아닐 건데, 공작님의 최측근 두 분이 싸우시면 어떡해요!”
“아리엘사…….”
“아빠는 날 언제 잡으실 거예요? 벨리아 아줌마랑이요.”
할 말을 끝낸 내가 재빨리 화제를 돌리자, 게오르그의 얼굴은 금방 벌겋게 달아올랐다.
“우리는, 그, 나이도 있으니까, 신중하게…….”
“네. 신중하게 생각하세요. 제가 응원한다는 것만 잊지 마시고요. 그럼 전 가볼게요.”
나는 게오르그의 뺨에 뽀뽀까지 해주고 재빨리 일어났다. 게오르그는 얼떨떨해서 내게 다른 말을 못 했다.
집무실로 돌아가며, 나는 십 년은 늙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카이런 공작의 집무실로 돌아간 나는 기운 없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카이런 공작은 공사 중인 성탑을 바라보며 창가에 서 있었다.
“게오르그가 넘어오던가?”
나는 뚱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잘 된 건지, 못 된 건지.”
게오르그는 이제는 체이어스를 싫어하는 걸 관두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세계에 있는 동안 꼼짝없이 처녀 귀신으로 늙어 죽게 될 것이다.
그러니 잘 된 걸까요, 아닌 걸까요?
내가 정신적으로 훌쩍이고 있을 때 카이런 공작이 말했다.
“전갈이 왔다. 황태자께서 하르펠 성을 방문하겠다고 하신다.”
“……!”
나는 이제 충격을 받아 멍하니 서 있었다.
하르펠 성의 화재로 인해 황궁의 사냥대회 참석을 거절했건만…….
“직접 오신다고요?”
“폐하께서는 나를 내버려 둘 생각이 없으신 모양이야.”
그는 퍽 담담히 말하며 나를 향해 돌아섰다. 그러나 나는 심장이 콩닥거렸다.
“왜, 왜 오신대요?”
“황가는 이따금 각 영지를 순시한다. 종종 있는 일이지.”
나는 애가 타서 말했다.
“공작님의 트집을 잡으러 오는 거예요. 가우린도 황실 사냥대회도 실패하니까 직접 나선 거라고요!”
그는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눈빛은 너무 차갑고 안정되어 있어서 오히려 내가 이상한 사람인 듯 느껴질 정도였다.
“아리엘사. 맞이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맞서겠다. 나는 아무것에도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공작님…….”
“그러면 가장 급한 일부터 시작하지.”
동요하지 않는 그가, 순간 커다란 바위처럼 보였다. 어떤 때에도 그 그늘에서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그런 크고 단단한 존재로 말이다.
카이런 공작은 나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고, 나는 결연하게 대답했다. 그는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그걸 느끼는 나는 이제는 어느 정도는 북부인일지도 몰랐다.
“뭐든 도울게요.”
“네가 준비할 연회 메뉴부터.”
“아…….”
나는 순식간에 쭈구리가 되어 카이런 공작의 책상 옆에 섰다. 그는 황가를 위한 연회 메뉴를 적으며 설명해주었다.
확실히 제국에서 가장 귀한 손님을 맞는지라, 지난번 행정관을 위한 연회와는 메뉴도 좌석 배치부터 모든 게 달랐다.
메뉴 중에 내가 아는 음식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식은땀이 났다. 그러나 그는 내게 성의 주방이 경험 많은 하녀들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까지 짚어 나를 안심시켜주었다.
나는 공작 본인이 이런 세세한 일까지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이 의아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그의 얼굴을 나도 모르게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자기 미래 빼고는 다 아는 것 같고, 무엇이든 다 할 줄 아는 것 같지 않은가.
“아리엘사, 알아들었나?”
“네? 네!”
“시간이 넉넉지 않아. 성탑 수리 공사를 더 천천히 해야겠군. 황태자 전하께서 불탄 성탑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실 수 있도록.”
“공사를 야간에 하는 건 어때요? 시끄러워서 빨리 돌아가시게요.”
“쯧.”
카이런 공작이 혀를 차서, 나는 입을 다물고 물러 나왔다. 그의 말대로 황태자를 맞이할 준비에도 시간이 촉박했다.
❄❅❄
카이런 공작은 주요 가신들을 데리고 영지의 경계로 황태자를 맞이하러 나갔다. 나도 행렬의 꽁무니를 따랐다.
데브란 황태자는 십여 명의 수행과 함께 나타났다. 비서와 호위기사, 시종 등이었다.
백마에 오른 그 금발 미남자는 하얀 제복에 붉은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그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햇살이 그를 따라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이 느껴질 정도였다.
검은 말에 올라 검은 망토를 걸친 카이런 공작과 백마를 타고 흰 제복을 입은 금발의 황태자는 마치 낮과 밤처럼 대비되어 보였다.
‘그래도 당신한테는 아우라가 없다고요.’
나는 황태자를 훔쳐보고 있다가, 그의 시선이 우리 쪽 수행원들을 향할 때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카이런 공작은 친절하지도 불손하지도 않은, 평소와 하나 다름없는 태도로 황태자를 맞이했다.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먼 길을 달려오셔서 노고가 크실 줄 압니다.”
“직접 맞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카이런 공작.”
두 사람은 말을 나란히 하고 걸었다. 그들은 바로 성으로 들어가지 않고 먼저 성 인근의 밭과 목초지를 둘러보았다.
나도 하르펠 성 밖을 제대로 구경하는 것은 처음이라 지루하지 않은 길이었다.
백성들은 소에 쟁기를 매달아 밭을 갈고 있었고, 새파란 목초지에는 겨우내 갇혀 있던 양과 염소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심지어는 심심해 보이는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황태자는 퍽 즐거운 듯 말했다.
“수도에서는 여인들이 어깨를 드러내고 다니고 있는데, 이곳은 아직 서늘하군요.”
나는 여행이라도 온 듯한 황태자의 즐거운 태도에 짜증이 치솟았다.
카이런 공작을 함정에 밀어 넣으러 온 주제에 저 번지르르한 태도라니.
황태자의 속셈을 모를 리 없는 카이런 공작은 여유롭게 대답할 뿐이었다.
“눈과 얼음을 양손에 쥔 신이 멀지 않은 곳에 잠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겨울에 눈을 떠서 혹한으로 심술을 부린다는 북부의 신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다음에는 더 더울 때 와야겠어요.”
다음이라니? 또 오려고? 또 와서 우리 카이런 공작을 괴롭히려고?
나는 행렬의 후미에서 황태자의 모든 말에 마음속으로 토를 달고 있었다.
그러나 카이런 공작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전하.”
“환영해줘서 고마워요. 공작님.”
나는 좀 혼란스러웠다. 무섭기도 했다.
데브란 황태자는 세련되고 온화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 자의 머릿속에 자신의 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한 비열한 음모가 가득하다고 생각하니 화가 났다.
황태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금수저이기만 한 자신보다, 금수저로 태어난 주제에 스스로 그것을 넘어서는 위업을 이룬 카이런 공작에게 큰 열등감을 느낄 만도 했다.
하지만 카이런 공작이 북부의 안위 말고는 무관심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나는 복잡한 마음으로 황태자의 순시 행렬을 따랐다. 그리고 해가 지기 전에 하르펠 성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만찬이 준비되어 있었다.
황태자의 수행단과 카이런 공작이 자리에 앉는 동안 나는 벽 앞에 놓인 의자 앞에 서 있었다.
“냄새가 좋군요. 독특해요.”
“북부 음식이 외지인들에게는 향미가 강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부디 즐겨주십시오.”
황태자는 만족스러운 듯 끄덕이고 식사를 시작했고, 그의 수행들과 카이런 공작도 식사를 시작했다.
카이런 공작은 퍽 유연하고 여유로운 태도로 황태자를 접대했다. 나라면 절대로 나를 죽이려는 사람에게 저렇게 부드러운 얼굴로 식사를 대접하지는 못할 텐데, 그의 포커페이스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무서움이 또 살짝 설레는 매력으로도 다가오니 내가 그를 좋아하긴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아, 공작님께서 기미 시녀를 두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식사가 시작된 후 의자에 앉았던 나는, 황태자의 말에 깜짝 놀라서 일어났다.
그러나 카이런 공작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황태자 전하 앞에서 결례인지라 물렸습니다. 제 체질 때문에, 건강상의 이유로 기미 시녀를 두는 것이니 오해는 없으셨으면 합니다.”
황태자는 굳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다행히도 내게 돌아온 관심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게 좋다고만 할 수 없는 것이, 실은 나는 조금 졸 뻔했다.
그들은 오늘 낮에 본 것들에 관해 묻거나 이야기하며 격식에 맞는 틀에 박힌 말투로 대화했다. 곁에서 듣고 있기에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마침내 긴 식사 자리가 끝나자 그들은 각자 방으로 안내되었다.
나는 황태자를 방으로 직접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다. 공작을 직접 모시는 시녀를 보낸 것으로 최대의 예우를 표시하는 것이었지만, 나는 비장한 심정이었다.
나는 성에서 가장 좋은 손님용 침실의 문을 열고 황태자가 들어가도록 했다. 황태자의 비서관이 방을 확인하자 황태자는 그를 돌려보냈다.
문밖에는 황태자의 기사들이 보초를 섰고, 나는 마지막으로 문 앞에 서서 말했다.
“황태자 전하,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즉시 불러주십시오.”
“알았어.”
내가 허리를 숙이며 물러나려 하자 그가 설렁줄을 당겼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을 하면 되지, 나가려는 사람에게 말없이 줄만 당기다니 무슨 수작인가 싶었다.
그러나 나는 머리를 숙이며 차분하게 말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신지요, 전하.”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
“……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빳빳이 들고 대답했다가 재빨리 머리를 숙였다. 도대체 이 인간이 무슨 생각으로 내게 수작을 걸기 시작하는지 얼른 떠오르지 않아서 목의 힘줄이 빳빳이 서는 기분이 들었다.
황태자는 그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빙글빙글 웃으며 소파에 앉아서 긴 다리를 꼬았다. 빙글빙글 웃는 얼굴이 장난기 가득한 소년 같았다.
몹시 잔인하고 음침한 소년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카이런 공작이 얼마나 까칠한 사람인지는 다 알잖아. 그런 그가 곁에서 떼어놓지 않는다는 시녀는 어떤 여자일까, 좀 궁금했거든. 너는 이름이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