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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46/128)

41화

체이어스는 턱이 빠지기 직전의 얼굴을 했고, 카이런 공작은 냉담하게 물었다.

“성탑은?”

“명령하신 대로 출입을 통제했습니다. 축제가 끝나는 대로 보수공사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좋아. 축제에는 지장 주지 말고 공사는 최대한 천천히 끌어.”

“네. 공작님.”

그리고 체이어스는 카이런 공작의 책상에서 물러 나오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 위치에서는 내가 곧장 보였기 때문에 나는 뒤통수에 불이 붙는 것 같은 기분을 참으며 창밖을 응시했다. 그러나 상체가 점점 책상으로 수그러졌다.

“흠.”

체이어스는 그대로 나가버렸다. 짧은 소리였지만, 그가 나를 몹시 못마땅해 하는 감정은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나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서야 긴장을 풀고 앉았다. 갑자기 대단히 억울해졌다.

내가 왜 그의 얼굴을 못 보지? 왜 내가 피해야 해?

하지만 신나게 단체 댄스를 즐기는 대열에서 나동그라진 내 모습은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었고, 체이어스를 보면 그게 떠오를 터였다.

벌 대신 내게 춤을 청한 체이어스 앞에서 그런 우스운 모습을 보인 것도 자존심 상했다.

겨우 그러려고 그렇게 예쁜 옷을 입고 나온 건 아니었는데 말이다.

내가 얼마나 소심해졌는지를 깨닫고 나자 그 감정이 새삼스러워졌다. 혹시 아리엘사는 늘 이런 기분으로 살았던 걸까…….

나는 기분을 바꾸려 고개를 크게 저었다.

“아리엘사.”

“네, 공작님!”

“술.”

“네.”

아직 한낮이었다. 내가 의아한 얼굴로 테이블로 술을 가져가자 카이런 공작은 빙긋 웃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 그냥……. 알 수밖에 없었지.”

나는 카이런 공작이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알아들었다. 그는 황제의 그를 향한 적의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충성을 의심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뭐랄까,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그제야 카이런 하르펠은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싸워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조금 놀라고 말았다.

그는 대대로 북부의 주인인 하르펠가의 상속자로 태어났으며, 마물을 방벽 너머로 추방함으로써 가문의 명성 위에 자기 위업을 쌓아 올린 남자였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마물로부터 땅을 지킨다는 책임을 부여받았고, 그에 의심을 지닌 적이 없었다. 그의 야망은 오직 그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에 성공했다.

‘위대한 그분’이라는 칭송은 그가 마물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방벽을 지키고, 하르펠 백성들을 풍족하게 먹여 살리고 있다는 증표였다.

그러나 황제의 의심과 견제는 그가 자신의 책무에 더없이 충실한 만큼 강해지게 되었다. 그것은 그의 마음 한쪽을 시끄럽게 할 만했다.

“황제 폐하가 바보라서 그래요.”

“…….”

내 퉁명스러운 말에 그는 잠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턱을 쳐들고 웃으면서 목젖이 도드라지는 모습이 그렇게 보기가 좋았다.

그는 황제의 초대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성에 불을 질러야 했다.

지금 그가 많이 심란해하고 있는 게 분명한데, 그런 사람 앞에서 외롭다고 울적해하거나 미모에 감탄하거나 하는 내가 좀 한심하고 미안해졌다.

“하하. 너는 참 이상해. 아리엘사. 아니……, 이방인.”

그는 차분한 얼굴로 자신의 웃음을 갈무리했다. 지금 상황이 좋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가 나를 이방인이라고 불러주는 순간 나는 연기를 벗어던지고 잠시나마 진짜 내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와 진짜 내가 잠시 둘이서 시간을 보낸다는 그런 기분 말이다. 그것은 조금 달콤하고, 좀 씁쓸하고도 아껴두고 싶은 그런 맛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썩 기분 좋은 말씀은 아닌데, 공작님께서 웃으니까 저도 좋은 걸로 치려고요.”

그리고 나도 웃었다. 방 안 공기는 금세 봄볕처럼 달아올랐다.

“내가 이야기했던가?”

“네?”

“네가 축제 날 입은 옷, 거금을 들인 값어치를 하더군.”

젠장. 나는 입술을 살짝 씹고 말았다.

카이런 공작이 ‘거금’이라고 말하는 느낌은 심상치 않았다. 벨리아의 배포는 내 상상보다 훨씬 더 컸던가 겁이 덜컥 났다.

“음…….”

나는 손에 진땀이 확 솟고 눈을 어디 둘지 정할 수가 없었다.

그때 카이런 공작이 나직이 말했다.

“예뻤단 뜻이야.”

“아…….”

나는 이제 확 달아오른 뺨을 어떻게 숨겨야 하는지를 떠올리려 애쓰며 천천히 테이블에서 멀어지려고 했다. 그가 나를 바라보지 않는데도, 어째서인지 내 민망함은 점점 더 커졌다.

“앉아.”

“……!”

“혼자 술 마시면 재미없어.”

제발요!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직 낮인데, 체이어스 경을 불러-”

“-벌을 받아야지?”

“네?”

“네 방과 집무실 외에는 외출을 금지한다고 했을 텐데.”

“음…….”

그렇다. 그는 잊는 법이 없었다.

그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무슨 귀여움에 대한 노래를 우렁차게 부른다던데.”

“윽……!”

나는 새 드레스 치맛자락을 쥐어뜯었다.

나는 그의 무감한 시선을 받으며 앞으로 외출이라는 것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당연히 술도 끊기로 했다.

나는 카이런 공작 앞에서 귀요미송을 불러야 했다. 율동과 함께.

그가 이번에는 그것을 주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나는 감사하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했다. 내 위태로운 정신건강을 위해서…….

❄❅❄

시간은 훌쩍 지나서 성에서는 성탑을 보수하는 공사 소음이 연일 퍼졌다. 사람들은 농사와 가축 몰이를 위해 새벽부터 밤까지 바쁘게 일했다. 그것이 북부의 생기였다.

나는 게오르그를 만나러 연무장으로 갔다. 나름대로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포목점에서 화를 낸 이후 한 번도 나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

딸 바보 중년남이 얼마나 삐진 것인지, 나는 신경이 쓰여 공작의 허락하에 나오고 말았다.

게오르그는 검을 휘두르는 기사들 사이를 오가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그가 마침 내 쪽을 보기에 나는 손을 마구 흔들었다. 그는 한숨을 푹 쉬더니 다가왔다.

나는 가져간 병에서 차를 따라 건넸다. 땀을 흘렸을 때 원기를 충전하는 데 차만 한 것도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는 차를 벌컥벌컥 마시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나는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아빠, 아직 화나셨어요?”

“…….”

“체이어스 경과는 화해하셨어요?”

“흥!”

체이어스가 취한 나를 업어다 준 걸로 게오르그가 벌인 신경전은 아직 현재진행형인 것 같았다. 나는 암담해서 잠시 하늘을 보았다.

게오르그는 체이어스가 내게 집적댄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실은 온 성내는 정확히 반대로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그 심심한 아리엘사가 체이어스가 구출해주는 바람에 이성에 눈떠버리고 말았다고 말이다.

축제 날 광장에서 우리 둘이 춤추는 걸, 아니 춤추려고 하는 걸, 많은 사람들이 보았으니 이제 그 소문은 기정사실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다시 말하면, 게오르그는 체이어스를 적으로 특정할 근거가 충분했다.

그래서 공작에게 그 두 사람에게도 화해의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하자 카이런 공작은 나를 비웃었다.

가장 아끼는 가신 둘이 싸우고 있다는데, 뜻밖의 반응이었다.

“그들은 언젠가 한 번은 피를 봐야 할 사이다. 신경 꺼.”

“네? 그래도, 아니 그러면 더욱이……!”

“너는 미래는 알아도 북부 남자는 모르는 거군.”

공작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말문이 막혔다.

하기는, 게오르그의 성격에 체이어스와 한 방에 넣어둔다고 화해할 리는 없었다. 지금 그에게 체이어스는 소중한 딸을 건드리려는 늑대놈이지 않는가.

황제의 초대를 무사히 거절했기 때문에 나는 이 문제를 수습하고 싶었다. 그러나 연무장에서 만난 게오르그가 저렇게 씩씩거리고 있으니 나도 긴장이 되었다.

“아빠는, 벨리아 아줌마와 즐겁게 보내셨어요?”

“크흠.”

그는 몹시 불편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헛기침을 해서 깔깔한 목을 고르고 말했다.

“즐겁게 보냈다.”

“잘됐네요!”

그러나 그는 몹시 침울하게 말했다.

“너도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게 즐겁게 보내고 싶었겠지. 왜 안 그랬겠니. 내가 지금까지 너의 행복을 가로막았다니……. 나는 너에게 그런 아빠가 되려고 한 게 아니었는다.”

헉, 저기요?

나는 무언가 단단히,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알았다.

“아빠, 저는 아빠를 너무 좋아해요. 저는 아빠랑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요!”

그러나 게오르그는 슬프게 머리를 저었다.

“너와 체이어스를 축복해주마.”

“……네? ……예?”

“까칠해서 그렇지, 그것만 빼면……. 머리가 좋아서 책사 노릇 하느라 그렇지, 검 실력도 마물이 나타나도 너 하나 지킬 만큼은 하는 놈이다.”

이 바보가 평생 딸을 끼고 살려는 듯하더니 갑자기 급발진을 해서 나를 체이어스와 결혼시키려 하는 것인가!

하르펠 성에서 내가 빙의자인 걸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은 단 한 사람과 말이다.

나는 너무 다급해서 그의 팔뚝을 꼭 붙잡고 매달리면서 말했다.

“아빠, 저 시집 안 가요!”

“…….”

“정말이에요. 저는 죽을 때까지 아빠랑 살 거예요!”

게오르그는 우수가 가득 담긴 눈으로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퍽 마음 짠해지는 모습이었다.

아, 아저씨?

“이 착한 녀석. 아빠를 애써서 위로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정말이에요! 저 시집 안 가요. 체이어스 경도 안 좋아해요!”

“으응……?”

게오르그는 눈빛에 감도는 반색을 애써 억누르며 나를 게슴츠레 쳐다보았다.

“저는 체이어스 경에게 시집 안 가요.”

결국 게오르그의 얼굴이 햇살처럼 환해졌다. 그러나 나는 모래를 머금은 듯 목이 텁텁해졌다.

“그러……니? 체이어스 안 좋아해? 그놈은 분명 꽤 오래전부터 널 탐내고 있었던 게-”

“-네. 아빠! 안 좋아해요!”

나는 바람처럼 빨리 다음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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