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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45/128)

40화

나는 이것으로 내 드레스의 값어치는 다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행복한데 굳이 울적한 내가 끼어들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광장 구석에 놓인 장작더미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새 드레스가 더럽혀지는 게 싫었지만, 아리엘사가 점화식을 구경하다가 돌아갔던 그 자리가 내 자리가 맞는 것 같았다.

음악 연주가 시작되고, 광장의 남녀들은 저마다 짝을 지어 불가로 둥글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조금만 보다가 돌아가자, 그렇게 생각했을 때 누가 불쑥 다가왔다.

“이게 그거니?”

체이어스였다. 그는 나를 향해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네?”

“보란 말이야.”

그는 자기 팔뚝을 걷어 보였다. 거기에는 길쭉하고 푸르스름한 멍이 들어 있었다.

“체이어스 경?”

“한밤중에 내 딸을 업고 어디 간 거냐고 게오르그 경이 어찌나 흥분하던지, 벨리아 씨가 아니었다면……. 어휴.”

자식 교육은 부모 책임인데, 부모 교육은 누구 책임일까?

성내에서는 숨만 쉬어도 소문이 퍼지는 모양인지, 나는 울상을 하고 물었다.

“팔은 어쩌다가요?”

“가신들끼리 싸움질을 해서 공작님의 노여움을 살 수는 없으니까. 팔씨름으로 결판을 냈어.”

“그럼…….”

“하르펠의 방패를 누가 힘으로 이겨? 벨리아 씨가 부끄러운 줄 알라고 등짝을 때려서 그를 데리고 갔으니 다행이지.”

나는 완전히 소심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왜 그렇게 풀 죽었어?”

“…….”

“대답 안 해?”

“아닌데요? 그냥 구경하던 중이었어요.”

“내 참. 일어나.”

나는 체이어스가 내민 손을 바라보다가 일어났다.

거대한 모닥불 빛은 일렁이며 체이어스의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불쾌한 듯도 하고 찜찜한 듯도 한 표정과 그가 내민 손의 의미가 얼른 와 닿지 않아서, 나는 그를 멍하니 보았다.

“게오르그 경 덕에 벌을 취소해달라고 공작님께 말씀드리지 못했다.”

“아…….”

내가 그의 손바닥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리자, 체이어스는 나를 데리고 불가로 갔다. 그리고 나는 더 의기소침해졌다.

마을 젊은이들이 불가를 돌며 추는 춤은 카이런 공작이 가르쳐준 것보다 훨씬 흥겹고 빨랐다.

자리에서 패턴이 있는 동작을 한다기보다, 남녀가 계속 짝을 바꾸며 뛰어다니는 춤에 가까웠다. 내가 하루 배워서 끼어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체이어스는 내 손을 꽉 잡아 이끌고 있었다. 내가 끼어들었다가는 대열을 다 엉키게 할 게 뻔해서 힘을 주었지만, 체이어스는 가볍게 혀를 차며 나를 데려갔다. 춤추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조금 어지럽기까지 했다.

‘하르펠령의 그해 봄 축제는 지독한 몸치인 공작의 시녀가 망쳤다.’

나는 <눈 내리는 사막> 개정판에 그렇게 추가될 일을 저지를 것만 같았다.

“으아아!”

체이어스는 내가 안 되겠다고 말하기도 전에 내 손을 붙잡고 대열로 들어갔다. 나는 그와 손을 맞대고 한 바퀴를 무사히 돌았지만, 손을 바꾸는 다음 바퀴에서 다리가 꼬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체이어스는 재빨리 나를 일으켜 세워서는 모닥불 주위의 거대한 흐름을 빠져나왔다.

“걷다가도 넘어지는 애를 데리고 내가 무슨.”

그는 내가 춤출 줄 모른다는 사실에 당혹한 것 같았지만 평소처럼 화를 내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즐거운 목소리리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있어, 술 가져올게. 내 감시하에서 한 잔만-”

“-저는 이만 가볼게요.”

“응?”

“벌 다 받았잖아요. 이제 가볼게요.”

“아리…….”

그러나 체이어스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내 볼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보았기 때문이다.

❄❅❄

나는 카이런 공작의 집무실로 돌아갔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내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가 보고하고 돌아가라고 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대충 눈물을 닦고 문을 두드렸다. 집무실 안에서 무엇을 만나게 될지 상상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사실은, 내 방으로 바로 갔다간 조금 더 울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속으로는 카이런 공작의 집무실로 돌아가는 게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나는 초심자였다. 춤을 추다 넘어지는 것 따위,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 서러운 기분이 드는지 스스로도 이상했다.

나는 마치 원래 한 시간만 다녀오려고 했던 것처럼 인사했다.

“공작님, 다녀왔습니다.”

창가에 서서 광장을 바라보며 술을 마시던 카이런 공작은 조금 놀란 눈을 할 뿐 대답이 없었다.

나는 되도록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안주를 조금 들이라고 할까요?”

카이런 공작은 그제야 고개를 짧게 저었다.

“됐어.”

그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며 나를 등졌다.

“왜 더 놀지 않고. 체이어스가 또 화나게 했나?”

“…….”

카이런 공작도 미워할까 보다!

그러나 내게 옷을 돌려준 그에게 신경질을 낼 수는 없었다. 예민한 것은 내 쪽이었으니 말이다.

“아니요. 체이어스 경이 더 화가 나셨을걸요?”

“어째서?”

“넘어졌거든요……. 보기 좋게, 꽈당! 하고요. 체이어스 경은 성에서 인기인이신 것 같던데 제가 망신을 준 것 같아요.”

카이런 공작은 대답이 없었다.

말을 섞어줄 것도 아니면서 묻기는 왜 묻는지.

나는 속으로 원망하며 내 자리로 가서 앉았다.

창턱에 턱을 괴고 엎드리자 멀리 광장의 불길은 커다란 불길의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보였다.

그것을 보며 나는 마침내 내 울적함을 인정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 봄 타나 봐.’

나는 엎드린 채 카이런 공작을 향해 ‘공작님은 안 나가세요?’하고 물으려다 말았다. 원작의 내용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는 춤을 쓸데없는 짓이라고 여겼다. 그가 남부 후작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을 때, 그는 파티가 열리면 마지못해 끌려가듯 참석했다.

그리고 벽 앞에 서 있다가 돌아오곤 했다. 그래서 여주는 유일하게 자신에게 춤을 청하지 않는 그를 속으로 원망하고 미워하기까지 했다.

“아……. 벌써 다 탔나 봐요.”

쌓아 올린 나뭇더미의 꼭대기가 불타 무너지면서, 모닥불의 키가 반으로 줄어들었다. 나는 안타까워서 그렇게 말했다.

가볍게 탁, 술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이리 와.”

필요한 것 없다더니. 나는 투덜거리며 공작의 곁으로 갔다. 그는 광장에서 빗긴 성벽 쪽을 턱짓했다.

“어머…….”

나는 헉 하고 숨을 참았다가 뱉었다. 집무실 창밖에서 보이는 성탑 하나가 불길을 뿜고 있었다.

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축제가 끝나고 하시기로 한 것 아니었어요?”

“나도 올해는 나름대로 축제를 즐겨보기로 했어.”

“공작님……!”

‘우리 남주는 미쳤나 보다.’

그러나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도 나는 빙긋이 웃고 말았다.

자신의 성탑을 불태우면서 느긋이 즐기는 남자라니. 그 불빛에 그의 얼굴이 더 아름답고 매혹적으로 보였다는 건 내가 아마 오래 입 밖으로 말하지 못할 비밀이었다.

하지만 나도 이방인일 뿐. 무엇이 정상이고 미쳤다고 말할 자격은 없었다.

성탑의 총안에서 곧 맹렬한 불길이 솟아올랐지만, 지금 사람들 대부분이 나와 있는 마을의 술집 거리와 광장에서는 저 탑이 잘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창가에 나란히 서서 맹렬한 불길을 뿜는 성탑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카이런 공작은 한 발 물러서서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공작님?”

눈빛으로 하는 그의 명령에, 나는 홀린 듯 그의 손을 잡고 집무실 중간으로 갔다.

그는 내 손을 들어 공중에서 맞댔다. 축제의 춤이었다. 피식 웃어 삐뚤어진 그의 입꼬리는, ‘그러게, 내가 미쳤나 보군.’하고 말하는 듯했다.

그는 밖에서 먹먹하게 들려오는 광장의 연주를 무시하고 내가 따라갈 수 있는 속도로 움직였다.

하지만 내 심장은 내 걸음의 보폭보다 더 크게 박동했다. 나는 이제야 봄 축제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집무실 안을 빙빙 돌면서, 나는 크게 웃고 말았다.

우리는 불타는 성탑을 바라보며 둘만의 축제를 즐겼다.

❄❅❄

다음 날 하르펠 성은 발칵 뒤집혔다. 사람들은 광장의 모닥불이 거의 다 타서 춤판을 파할 때쯤에야 성탑의 화재를 발견했다.

대부분의 어른들이 술에 취한 상태로 어영부영하는 사이, 성탑은 전소되고 말았다. 붕괴 위험이 있어서 사람들의 출입도 금지되었다.

사실은 의도적인 방화가 밝혀질까 봐 한 조치였지만 말이다.

어쨌든, 아직 봄축제 기간이 며칠이나 남았음에도 화재 때문에 사람들은 흉흉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집에 재난을 겪은 카이런 공작은 평소처럼 별말이 없이 집무를 보고 있었다.

나는 벨리아가 만들어준 평상복 드레스 중 주황색 드레스를 입고 출근했는데, 분위기가 이래서 새 옷을 입은 기분을 즐길 수도 없었다.

그는 작성하던 편지의 봉투를 봉하며 가뿐한 태도로 말했다.

“황제 폐하의 초대는 영지 사정으로 인해 거절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나도 끄덕끄덕하며 대답했다.

“성에 화재가 발생했는데 공작님께서 성을 비우실 수는 없죠.”

이것은 우리의 비밀스러운 계획이었다. 황제의 사냥대회 초대를 거절하기 위한 계획.

-체이어스입니다.

나는 체이어스가 들어오기 전에 거의 토끼가 굴로 달아나는 속도로 내 자리로 돌아갔다.

카이런 공작은 밀랍 위에 인장을 찍은 다음 체이어스에게 건넸다.

“황제 폐하의 초대는 거절했다. 당분간 외부활동을 하지 않겠다.”

체이어스는 뚱한 얼굴로 편지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가 좀처럼 않는 뚱한 태도로 속삭였다.

“축제가 끝나는 날이 아니었습니까?”

체이어스는 나를 의식해 목적어도 없이 속삭였지만, 나는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는 성탑에 불을 지르기로 계획한 날을 왜 멋대로 바꾸었느냐고 공작에게 불평하고 있었다.

나도 놀랐으니 체이어스야 말할 것도 없었다.

“나 빼고 다들 노는 꼴을 보니 속이 뒤틀렸다. 설명은 충분한가?”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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