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44/128)

39화

그러나 벨리아가 나보다 먼저 그에게 의자를 내어주며 호들갑을 떨었다.

“체이어스 경!”

“공작님께서 네 외출을 허락하신 적 없으실 텐데?”

“그러니까 몰래 나왔잖아요…….”

나는 입을 툭 내밀고 대답했다.

즉시 도망가야 하는지 그를 붙잡고 봐달라고 사정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는데, 그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체이어스 씨?’

벨리아는 눈치도 없이 좋아라 그에게 잔을 챙겨주고 술을 따라주었다.

그녀가 싱글거리는 걸 보니, 내가 체이어스를 꺼림칙하게 여기는 걸 부끄러워서 그런 것이라고 오해하는 게 분명했다.

“아리엘사 데리러 오신 거예요? 소문이 이렇게 빠르다니까!”

“아닙니다. 어느 여자가 우렁찬 목청으로 자기가 귀엽다고 주장하나 돌아봤다가 우연히 발견한 겁니다.”

“어머, 체이어스 경도! 다정하기도 하셔라, 호호호!”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는 걸 보니, 벨리아도 많이 취한 게 틀림없었다.

즐거운 시간은 끝이었다. 나는 잔을 내려놓았다.

“저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벌은 내일 받을게요.”

쓴 약을 먹는 얼굴로 술을 마시던 체이어스가 나를 향해 찌푸리고 물었다.

“벌?”

“공작님께 이르실 거잖아요.”

“크흠…….”

그는 술잔을 놓고 일어나더니 딱딱하게 명령했다.

“일어나.”

“네?”

“네가 취해서 실언하는 일은 없어야 해.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아리엘사?”

체이어스는 분명히 경고하고 있었다. 취해서 가우린이라던가 황제라던가 하는 말을 입에 담으면 어쩔 거냐고.

나는 순간 정신이 들어서 벌떡 일어났다.

“맞습니다!”

“아, 아리엘사?”

내 반응에 오히려 벨리아가 놀라서 더듬거리며 나를 불렀다. 그러나 나는 벨리아에게 도로 인사하고 문으로 나갔다.

“여러 가지로 정말 감사합니다! 벨리아 아줌마!”

체이어스는 어처구니가 없는지 한숨을 쉬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벨리아 씨, 오늘 이 바보가 마신 술값은 하르펠 성에서 지불할 겁니다만……. 게오르그 경이 이걸 보셨다면 어쩌려고 이러셨습니까?”

벨리아는 발끈해서 말했다.

“그분도 어른이 되어야지요! 딸은 이미 어른이 되어버렸는데.”

그녀는 그렇게 말한 다음, 체이어스에게 묘한 웃음을 흘리고 먼저 돌아가 버렸다.

나는 벨리아에게 손을 한참 흔들다가 성 쪽으로 걸었다. 내 뒤에 시커먼 그림자가 따라붙어서 놀라려는 순간, 그가 말했다.

“똑바로 걸어.”

취한 사람에게 똑바로 걸으라니, 내 참.

하지만 나는 성격에 일관성이 있는 사람을 좋아했다. 그들은 쉽게 변하거나 배신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평생 카이런 공작의 친구이자 오른팔이 되어주는 남자를 진심으로 싫어할 수도 없었다.

“헤헷.”

내가 돌아보며 웃자 그는 인상을 썼다.

“오늘 이건 무슨 짓이냐? 오늘은 무슨 나무에서 떨어졌어?”

“아빠가 제 옷 뺏어갔어요.”

“무슨 소리야?”

“벨리아 아줌마가 북부에서 가장 예쁜 봄 축제 드레스를 만들어주셨는데…….”

“됐어. 더 말 안 해도 돼.”

나는 그 자리에 멈추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쳐들었다. 별들이 미치게 아름다웠다.

“우와…….”

체이어스는 나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그는 어떤 세상에서는 별빛에 길이 밝아질 만큼 찬란한 밤하늘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문득 내가 외롭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이방인이니까.

별도 저렇게 수없이 함께 떠 있는데, 나는 이곳에 오직 혼자였다.

인정머리라곤 없는 냉혈한 책사님께서는 내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공작이 나를 믿어주고, 내가 계속 공작과 하르펠령을 위기에서 구해나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이 세상에 카이런 공작만큼이나 유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에게는 ‘남부의 장미’ 여주가 기다리고 있지만 내게는 아무도 없었다.

곧,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 이방인에게는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야!”

고개를 든 채로 다시 걸으려는데 몸이 훅 기울어졌다. 하늘을 보며 걷다가 발이 꼬이며 균형을 잃은 것이었다.

그러나 내 몸은 넘어지지 않았다. 양팔에 그의 손의 압박감이 느껴졌다.

“정말 손 많이 가는군.”

“어어……. 어어……?”

체이어스는 나를 세우더니 어느 틈에 나를 업었다.

나는 불편해서 몸을 꼼지락대며 말했다.

“저기요, 기사님…….”

“기사님? 내 참. 가만있어. 힘들게시리.”

“아니, 저 내려주셔도……. 걸을 수 있어요.”

“지난번에 앓아누워서는 테플 버섯을 축내더니, 또 다쳐서 뭘 축내려고?”

나는 처음으로 <눈 내리는 사막>의 작가를 원망했다.

독자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므로, 주변 인물들에 대해서는 많은 걸 생략하고 축약하는 것까진 좋단 말이다.

하지만 이 북부가 츤데레들의 땅이라는 건 좀 더 명확하게 서술해주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카이런 공작이나, 게오르그나, 이 체이어스처럼 말이다.

“체이어스 경.”

“가만히-”

“-고마워요.”

“…….”

체이어스는 그때부터 돌아갈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를 문 앞에 내려다 놓고는 등을 떠밀어 방 안에 집어넣고 돌아갔다.

❄❅❄

봄 축제는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의식으로 시작되었다. 사제들은 그 봄에 돋아난 어린 가지로만 피운 신성한 불이 담긴 화로를 준비했다.

사제들의 축원이 끝나면, 카이런 공작은 봄을 알리는 전령인 피리새의 목을 잘라 그 피를 신성한 불에 뿌렸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주방에서 하기에 적합한 행동이었으나, 들판에 모여 의식에 참석하는 북부인들은 엄숙했다.

그들은 북부에 새 태양을 내려준 태양신에게 감사하고, 앞으로 수 개월간 양손에 각각 눈과 얼음을 쥔 신이 깊이 잠들기를 기원했다.

의식이 끝나자 피리와 북이 울리고 사람들은 먹자판과 술판으로 흩어졌다. 광대들의 놀이판도 벌어졌다.

그러나 카이런 공작은 제 할 일은 다 끝났다는 듯 집무실로 향했다. 나는 그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르다가, 광장에 쌓인 거대한 나뭇단을 보았다.

그것은 크리스마스트리를 닮은 거의 3, 4층 높이의 장작더미였다.

“와, 모닥불이 이렇게 클 줄은 몰랐는데, 장관이겠어요.”

“나무가 많이 들어.”

카이런 공작의 대답은 그게 다였다.

그의 다음 일정은 하르펠 성의 기사 및 행정관과 저녁 만찬에 참석하는 것이라 쉴 시간이 있었다.

나는 카이런 공작이 내가 어젯밤에 몰래 술집에 간 걸 언제 언급하려나 내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집무실로 돌아와 한참이 지났는데도 말이 없어서, 혹시 체이어스가 보고하지 않은 게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만약에 그렇다면, 그동안 그를 미워했던 걸 다 잊어줄 텐데!

석양이 깔리자 광장에는 젊은 남녀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카이런 공작의 집무실 창밖으로 광장이 잘 보였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물끄러미 보고 있어야 했다.

산 모양으로 예쁘게 쌓은 저 나무더미에 불을 붙이면, 진짜 축제의 시작이었다.

젊은이들은 오늘만은 거기서 노래하고 춤추고 술 마시며 밤새 방탕하게 즐기는 것이 허락되었다.

하지만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입고 갈 옷도 빼앗겼고 기분도 그저 그랬다.

게오르그가 그렇게까지 싫어한다면 나도 여기서 개인적인 즐거움을 찾으려는 시도 같은 것은 하지 않은 게 좋을 것 같았다. 원작에도 아리엘사가 연애했다는 말은 없지 않은가.

내 기분은 자꾸만 가라앉았다.

카이런 공작이 행복한 엔딩을 맞이하면 나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나는 영원히 내가 이방인이라는 비밀을 숨긴 채 외롭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나는 창가에서 광장을 바라보며 수를 놓았지만, 오늘 카이런 공작은 수놓는 소리가 시끄럽다거나 하며 구박하지 않았다.

그러나 밖이 완전히 깜깜해졌을 때, 그가 말했다.

“아리엘사.”

“네, 공작님!”

지은 죄가 있는 터라, 나는 벌떡 일어나 책상으로 달려갔다.

그는 벽의 서랍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열어봐.”

나는 무슨 일인가 하며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 곱게 개어진 것은 내 노랑 드레스였다! 벨리아가 지어준 다른 옷들도 함께였다.

나는 심쿵사 할 것 같은 상태로 그를 돌아보았다.

“공작님……?”

“술은 금지다. 보고하고 돌아가.”

“어떻게…….”

그는 여전히 일을 하면서 냉랭하게 말했다.

“내 돈 주고 산 거니까 내 거야. 아닌가?”

“풋……. 맞아요!”

무심한 척하면서 구석구석 다 아는 것 같아서 가끔씩 머리털을 서게 만드는 남자가, 이런 짓도 하니까 너무 예뻐서 깨물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감히 공작님을 깨무는 짓은 할 수 없으니 헤실헤실 웃기만 해야 했다.

나는 내 소중한 옷을 껴안고 허리를 푹 숙였다.

“감사합니다, 공작님!”

나는 내 방으로 달려가 옷을 갈아입고 광장으로 달려갔다. 나 스스로 너무 예뻐 보여서 어쩔 줄 모를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침 사람들은 모닥불에 불을 붙이고 있었고, 젊은이들은 거기 맞추어 축배를 들며 고함쳤다. 나도 그 분위기에 휩싸여 마음이 들떴다.

금방 화르륵 붙어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파트너 없이 이 자리에 있는 게 어색하다는 생각을 한 것은 조금 후였다.

모두들 짝을 지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아는 척해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그걸 보니 내가 아리엘사가 아니라는 자각이 들며 마음이 움츠러들었다. 사실은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기분 말이다.

나는 조금씩 조금씩, 불빛이 조금밖에 닿지 않는 구석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그때 멀리서 벨리아의 손에 이끌려 술집으로 향하는 게오르그가 보였다.

화사한 드레스를 입은 벨리아는 예뻐 보였고, 멀끔하게 차린 게오르그는 못 이기는 척 끌려가고 있었다. 그는 눈으로는 나를 찾고 있는 듯했지만 이곳까지는 시선이 닿지 않는 듯했다.

불빛 안에 있는 그들은 참 행복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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