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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43/128)

38화

잠시 얼굴을 일그러트리나 싶던 벨리아는 깔깔대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바로 옷을 꺼내주었다. 나는 떨리는 심정으로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섰다.

‘어쩌지? 너무 예쁜데……. 나 엑스트라인데 너무 예쁜 거 아닌가?’

아래가 가볍게 퍼지며 주름을 만드는 연노랑 드레스는 팔목과 아랫단에 널따란 띠 장식이 되어 있었다.

여러 가지 난색의 기하무늬가 경쾌하면서도 고급스러웠고, 목 주변의 여밈끈에 달린 황금빛 술장식은 사치스럽지 않지만 충분히 화려하고 예뻤다.

이 옷을 입고 카이런 공작이 가르쳐준 춤을 추는 내 모습을 상상하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내가 말이 없자 벨리아가 물었다.

“왜, 불편하니? 네 체형은 내가 잘 아니까 가봉도 필요 없다고 했는데.”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젓고 그녀를 꼭 안았다.

“고마워요, 벨리아 아줌마! 너무 예쁘다고요!”

그녀는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체이어스 경도 분명히 좋아하실 거야, 아리엘사.”

“컥……. 네?”

그녀는 다 아니까 걱정 말라는 듯, 살짝 들뜬 태도로 말했다.

“생명을 구해준 남자에게 반하는 건 당연하잖니. 더구나 체이어스 경은 북부의 젊은 남자 중에서는 공작님 다음으로 멋있는 분이고. 물론 중년 중에는 게오르그 경이 최고지만……. 흠흠.”

그녀는 어물쩍 말을 흐리며 시선을 피했다.

나는 어느 부분에서 흥분하고, 어느 부분을 지적해야 하는지 머릿속이 꼬여서 잠시 가만히 있었다.

그녀는 내가 가우린에게서 나를 구해준 체이어스에게 반했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잘 보이려고 난생처음 예쁜 옷도 맞춰 입으며 설레어하는 걸로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아닙니다!”

“……응?”

내가 너무 단호하게 소리치자 벨리아가 당황했다. 나는 재빨리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고쳤다.

“저는 이 옷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벨리아 아줌마.”

“너, 말투가…….”

“하하. 아니에요. 아니에요…….”

내가 주섬주섬 옷을 벗기 시작하자 벨리아는 구석에서 다른 옷을 펼쳐 보였다. 북부 특유의 짙은 녹색과 주황색 드레스는 평상복이었다.

그러나 아리엘사가 평소 입고 다니는 잿빛이나 먹색, 때 묻은 것 같은 탁한 감색 드레스에 비하면 화려할 정도였다.

“아줌마?”

“이건 내 선물. 봄이잖니. 북부에도, 네게도.”

이 아줌마 은근히 사람 심쿵하는 말을 잘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부담 드리긴 싫은데…….”

“별로 부담 안 돼. 정 마음에 부담이 되거든 공작님이 사주셨다고 생각하렴.”

벨리아는 눈을 반달처럼 휘어 접어 웃었다.

나는 조금 더 감동하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카이런 공작에게 무한히 감사하면 되지 않을까?

“너무 예뻐요! 감사해요.”

나는 진심으로 인사한 다음 벨리아를 향해 히힛 하고 웃었다.

“그러면 저도 선물을 드릴게요.”

“선물?”

“올해 저는 축제에 아빠랑 안 가요.”

벨리아는 내 눈을 피하며 적잖이 당황했다.

“……응? 나는 이번 축제에서는 결국 결투가 벌어질 거로 생각하고 있었는걸? 원래 두 분이 사이가 별로였잖아. 그런데 너와 데이트까지 하면…….”

벨리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끔찍한 소리를 했다.

나는 그 변태적인 딸 바보를 떠올리며 이마에 핏줄이 올라오려는 걸 참고 말했다.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그러니까 올해는 아줌마가 아빠를 책임져주세요. 아빠가 또 의외로 숫기가 없어서 축제에 혼자 가고 그러지 못하세요.”

“어……. 음……. 그래? 하긴, 나도 숫기가 없는 편이라, 누구라도 혼자 축제에 가긴, 좀, 좀 그랬지?”

그녀는 눈물이 글썽글썽한 얼굴로 내 손을 꼭 붙잡았다.

“그럼, 아리엘사. 내가 게오르그 경을 책임질게!”

“고마워요, 아줌마. 그럼 저는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큰일 나……기는 하는데 한 번만 더 보고 가도 될까요?”

“그래, 그러렴!”

나는 얼른 노랑 드레스를 꺼내 몸 앞에 대고 거울에 섰다. 화려하고 화사한 옷은 쉽게 질리는 단점이 있기 마련인데, 이 옷은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았다.

벨리아도 다시 감탄하듯 말했다.

“예뻐. 예뻐.”

“너……. 그런 걸 입고 나돌아다닐 생각이냐!”

순간 벨리아와 나는 동시에 얼어붙었다.

정말로 내 귀에는 게오르그가 가게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소리가 쿵, 쿵, 울리듯 들렸다.

“아빠?”

“게, 게오르그 경!”

벨리아는 그를 만나고 좋아서 반사적으로 나오는 웃음과 지금 상황에서 느끼는 공포 때문에 정말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물론 나도 그랬다.

그는 우리 앞에 서서 그 거대한 팔짱을 끼더니 무섭게 말했다.

“너, 이, 이런 옷을 입고, 축제에 가려고 그랬니?”

“축제잖아요. 저도 조금은…….”

게오르그의 기세에 겁을 먹어서, 내 목소리는 기어들어 가다 못해 흩어졌다.

“나를 벨리아와 축제에 보내고, 너는 이렇게 콱 베어 먹고 싶을 만큼 어여쁜 꼬락서니를 하고, 혼자서 저 늑대보다 더 시커먼 사내놈들 틈으로 들어가겠다고?”

그가 이를 부드득 갈자 벨리아가 주춤거리며 내 앞을 막아섰다.

“게오르그 경, 아리엘사는 지금이 가장 예쁠 나이예요. 조금은 즐기게 해주세요.”

“벨리아,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오.”

“게, 게오르그 경도 제 앞에서는 시커먼 한 마리 늑대나 다름없으시면서……!”

“흡.”

나는 순간 게오르그의 얼굴이 쩍쩍 갈라지면서 부서져 내리는 것을 실제로 본 것 같았다.

그의 동공은 급격하게 흔들렸고, 벨리아는 얼굴이 붉어졌다.

둘은 즉시 서로를 외면하며 돌아섰고, 나는 그사이 옷을 안고 천천히 가게 통로에서 물러났다. 도망갈 타이밍을 잡는 게 중요했다.

그러나 게오르그는 노련한 전사답게, 곁눈으로도 나를 놓치지 않았다.

“그거 내려놔.”

“흐흑!”

나는 내 노란 드레스를 그 자리에 내려놓고 가게에서 도망쳐 나왔다.

다행히 아직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나는 마치 첫 번째 종소리를 들은 신데렐라처럼 달려서 집무실로 돌아갔다.

카이런 공작은 집무실 창가에 있는 긴 의자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축제가 열릴 때까지는 그도 한가한 시기였다.

“다녀왔습니다. 공작님.”

“차.”

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고, 나는 옌델 차를 끓였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는 이것만 줄어들고 있었다.

“공작님, 차 드세요.”

나는 축 처진 목소리로 의자 곁에 있는 탁자에 찻잔을 놓아두었다.

내 목소리가 얼마나 처져 있었는지 그가 나를 흘끔 볼 정도였다.

“아리엘사?”

“저 시간 내에 왔어요. 공작님.”

그는 작게 한숨 쉬더니 책을 탁 덮고 의자에서 다리를 내렸다.

“무슨 일이지?”

나는 차를 따르다가 그를 흘끔 돌아보며 말했다.

“포목점에서 아빠를 만났어요. 제 옷을 보고 화를 내셔서……. 새 옷은 못 입게 된 것 같아요.”

“훗.”

그는 웃었다. 나는 순간 내가 잘못 들은 것인가 했지만, 그는 정말로 훗, 내지는 풋, 하고 웃었다.

세상에. 사람이 아무리 공감 능력이 없어도 그렇지, 지금 웃을 상황이냐고요!

카이런 공작은 내 경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네가 요즘 바람이 들었다는 소문이 내 귀에까지 들려.”

나는 한숨을 푹 쉬며 웅얼거렸다.

“앞으로는 계속 상황이 복잡해질 거예요. 그 전에 잠깐이라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데…….”

“이건 네가 마시고, 나는 시나몬으로 줘.”

“감사합니다.”

평소라면 처음부터 시나몬이 먹고 싶다고 말을 하던지 두 번 일을 시키냐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빤히 보고 있는 공작의 얼굴을 보니, 그가 내가 마음을 가라앉히도록 일부러 차를 양보하는 것 같았다. 묵묵히 찻잔을 끌고 와 마시니 그에게 엄청 고맙기는 한데, 내가 놓고 온 옷 때문에 진정할 수가 없었다.

카이런 공작은 종일 책을 보았고, ‘오늘 게오르그의 심기가 좋지 않을 테니 연무장 순시는 건너뛰어야겠군.’ 하는 말로 다시 내 속을 긁었다.

그나마 오후에 나를 일찍 보내주었다는 점에서 나는 그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내 방으로 돌아와 앉아도 누워도 그 노랑 드레스만 생각났다. 참고 포기하자는 생각과 게오르그를 이대로 계속 변태로 자라게 할 수는 없다는 갈등이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그때 내 방문 밑으로 쪽지가 들어왔다.

❄❅❄

벨리아가 내 손목을 잡아끌고 간 곳은 뜻밖에 술집이었다. 소심한 아리엘사의 성격으로는 술집에 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나쁜 짓을 하려는 미성년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아, 아줌마?”

“아까 아빠 때문에 속상했지? 나도 그래.”

“하지만…….”

“괜찮아. 내가 네 보호자잖아.”

나는 결연한 얼굴로 끄덕이고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벨리아가 열어젖힌 나무 문 너머에는, 내가 몰랐던, 하르펠 안의 이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아빠가 제가 귀여워서 그러는 거라고요? 아니에요, 아줌마! 일 더하기 일이 귀요미지, 저는 귀요미가 아니라고요!”

“으응? 네가 왜 안 귀여워! 넌 정말로 귀여워. 네가 너무 얌전해서 그걸 아무도 몰랐던 거지. 아니, 예전에 말이야.”

“그러면 이 더하기 이도 귀요미니까 저도 귀여워도 될까요? 거꾸로 해도 귀여우니까요! 하하하.”

청소년 체조를 잃은 나에게 새로운 주사가 생기고 말았다. 귀요미송을 춤추며 부르는 것은 자제했으니, 만취 상태는 아닌 게 천만 다행이었다.

우리는 함께 게오르그를 욕하며 대화를 시작했지만, 취기가 돌고부터는 아무 얘기도 아닌 얘기를 크게 떠들고 있었다.

술집에 처음 나타난 아리엘사를 보고 놀란 손님들은 우리 테이블을 흘끔거리며 경계했다.

처음에는 그들이 게오르그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이 의식되어 불편했지만, 곧 잊어버리고 말았다.

“아리엘사.”

나는 벨리아와 건배하려고 들었던 술잔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를 눈치채고 고개를 획 돌려 그를 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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