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나는 원작의 크레인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기사 아닌가요?”
“하지만 명문가 출신에 관계에 능하다. 유들유들해서 동부 늙은이들을 상대할 만하고.”
주요 등장인물은 아니었지만, 크레인은 카이런 공작과 남부로 함께 내려간 사람이었다. 그 멤버 중 배신자는 없었기에, 나는 조금 안심했다.
“행정관이 되지 않은 그는 공작님 곁을 끝까지 지켰을 거예요.”
“흠.”
카이런 공작은 그렇게만 대답하고 벽난로로 시선을 돌렸다. 말을 아끼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은 전쟁터인 것 같았다.
“황제 폐하가 공작님을 미워해서 속상하신 거죠? 공작님은 충성심밖에 없는데도…….”
카이런 공작은 불쾌한 얼굴로 술을 한 번에 마셔버렸다.
나는 내가 꺼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뱉어버린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분은 대공의 반역에 상처가 크셨고, 황태자 전하에게는 완벽한 권력을 물려주고 싶어 하세요. 그건 대공의 잘못이지 공작님은 아무런 잘못도 없어요. 그건 그냥……. 그렇게 되어버린 거예요.”
그는 내 말을 무시하는 듯 앉아 있었지만,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냥 그렇게 되어버렸다…….”
“공작님 잘못이 아니라고요. 그리고 저는 공작님이 최대한 순탄하게 그분을 만나게 도울 거예요.”
“그분?”
카이런 공작은 마침내 내게 눈을 돌렸다. 나는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곧 불쾌한 듯 시선을 피했다.
“내 사랑? 흥.”
나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가 사랑을 믿지 못하는 것은 사랑에 빠진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처음으로 콩깍지를 씌워 줄 운명의 그녀를 아직 만나지 못해서 말이다.
그러니 지금 그 문제로 그와 언쟁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나는 헛헛하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콘솔 테이블에서 내 잔을 가져와서 술을 따랐다.
“너.”
“콜록! 콜록! 뭐가 이렇게 독해요!”
그는 불이 붙은 것 같은 목구멍을 부여잡고 콜록대는 나를 어처구니가 없는 듯 보다가, 낮게 클클 웃었다.
마침 그가 웃을 때 모닥불의 불길이 일렁여서, 마치 불길이 그런 미성을 내며 웃는 듯 착각이 들었다.
그 웃음을 여전히 머금은 채로 흘리는, 그의 조금 비웃는 듯한 시선은 왠지 별로 싫지 않았다.
“못 견디겠으면 혀 위에서 조금 굴리다 삼켜. 너는 북부 사내는 못 되겠군.”
“제가 어떻게 북부 사내가…….”
관두자.
나는 부루퉁한 얼굴로 술을 조금 머금어 혀 위에서 굴려보았다. 싸아하고 얼얼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충분히 입속에 머물게 하다가 삼키니 목구멍이 따갑지도 않았다.
“우와!”
“훗.”
잔을 기울이던 카이런 공작은 마치 강아지가 재주넘은 것을 보듯, 하찮고 대견한 시선으로 나를 흘긋 보았다.
하지만 나는 기분 나쁠 틈이 없었다.
“맛있네요! 이제 북부 여자 정도는 되었죠?”
“더 따를 생각 마. 그 술의 맛도 모르는 자가 먹기에는 귀한 술이다.”
“맛있다니까요? 맛있다는 걸 안다고요.”
나는 그가 못 마시게 할까 봐 거의 그대로 남은 내 잔을 조금 더 채워놓고 잔을 가슴 앞에 안듯 들었다.
카이런 공작은 기가 차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웃음도 잠시 잠깐이었다.
“저, 남자랑 축제에 가고 싶어요.”
카이런 공작은 컥 하고 술이 목에 걸려서 술잔을 내려놓았다.
딱 ‘아리엘사가 뭐라고 미친 소리를 하는 거지?’ 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체이어스 경과 가라는 벌은 거둬주세요. 축제에까지 벌을 받아야 하는 건 너무하잖아요. 제게는 북부에서 맞는 첫 축제라고요.”
카이런 공작은 눈썹을 조금 찌푸리고 있었다. 여러 가지 감정이 한꺼번에 느껴져서 더 복잡해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체이어스와 축제에 가는 벌……?”
“아빠만 아니면 저에게 데이트를 청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몰라요.”
그는 벽난로의 불길을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
“흥. 게오르그를 과소평가하는군.”
나는 아리엘사가 수녀 같은 생활을 하며 자라온 게 전적으로 게오르그의 잘못이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근육질 팔뚝과 가슴을 내밀면서 ‘네놈이 내 딸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겠다는 곧 죽을 놈인가?’ 따위의 대사를 몇 번은 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비장의 수가 있어요!”
나는 씩씩하게 말했지만, 그는 여전히 내게 시선 한 줌 주지 않고 벽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금 화가 난 듯 말했다.
“가도 되잖아.”
“네?”
“체이어스와.”
“공작님, 체이어스 경이 어떤지 아시면서……!”
내가 애원하는 고양이 눈을 하고 바라보자 그가 찡그리며 뱉었다.
“내 가신에게 내린 명령을 이유도 없이 철회하란 말인가? 하르펠의 주인에게 그것이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하나, 아리엘사?”
“힝……. 어떡해.”
나는 테이블에 철퍼덕 엎드렸지만, 번쩍 떠오른 생각에 바로 일어났다.
“그럼 체이어스 경이 직접 부탁하면 들어주실 거죠?”
“난 몰라.”
그가 왜 투정을 부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체이어스가 부탁하기만 하면 이 문제가 바로 해결될 것을 직감했다.
체이어스도 나와 가기 싫은 것은 마찬가지이니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즐겁게 술을 입 안에서 굴리며 배시시 웃었다.
우리는 즐겁게 술을 마셨다.
나는 여러 가지 농담을 했고, 카이런 공작은 그것들을 번번이 무시했다. 그러나 전혀 타격은 없었다.
그는 이따금 내가 온 세상의 이야기를 언급할 때마다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았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카이런 공작 앞에서 벽난로 불빛을 받으며 청소년 체조를 처음부터 끝까지 시전 했고, 그는 그것이 주술이 분명하다고 선언했다.
“그것은 보는 자의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주술이 분명해, 아리엘사. 특히나 여자에게 사악한 효과를 발휘하는군.”
나는 그를 야유했고, 카이런 공작은 충격을 받은 얼굴을 했다.
지금까지 그에게 아무도 혀를 내밀며 ‘에에에, 공작님은 하나도 모르시면서어!’라고 말한 적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수없이 사선을 넘나들었고, 그 귀하다는 카이런 공작의 술은 내 신경줄뿐만 아니라 카이런 공작도 느슨하게 만들어서 내 수명 연장을 도왔다.
카이런 공작은 공중으로 숨을 토하는 듯한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깔깔거리다가 놀라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내게 팔을 내밀고 있었다.
“공작님?”
“축제에 갈 거라며? 아리엘사는 늘 모닥불 행사만 구경하고 돌아왔으니 춤출 줄 모를 거야. 게오르그 때문에 아무도 곤란해지는 걸 원치 않았거든.”
“불쌍해라…….”
나는 찌푸리며 말했고, 카이런 공작은 여전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그에게 집중했다.
“춤이요?”
“봄 축제에 춤이 빠질 거로 생각했나?”
나는 쭈뼛쭈뼛 테이블 밖으로 나갔다.
“나처럼 해.”
그는 팔을 길게 뻗었고 나도 따라 했다. 우리는 뻗은 팔 끝에서 손바닥을 맞대고 커다란 원을 그리며 걸었다.
그리고 그는 손을 놓고 내 등과 자신의 등을 마주 스치며 반대로 가서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또 원을 그리며 걸었다.
중간중간 네 박자마다 무릎을 굽혀서 상대방을 향해 인사를 하거나 몸동작을 해주어야 했다.
“공작님, 재미있어요!”
“아리엘사는 이런 데 관심을 가진 적이 없어. 그 애는 차만 좋아했던 것 같아.”
“아니에요, 아리엘사는 공작님을 위해서 차를 탔어요. 하하.”
취기 때문인지, 그와 춤을 추고 있기 때문인지, 나는 조금 흥분해 있었다.
“어머!”
카이런 공작이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나는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고, 그는 내가 넘어지지 않도록 재빨리 내 허리를 감아 당겼다.
나는 카이런 공작의 가슴에 착 붙어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까이서 올려다보니 그의 턱이 참 완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그의 눈빛이 오늘따라 더 깊어 보이는 건 내 취기 때문이었을 거다.
콩. 콩. 콩. 콩…….
취한 채로 춤을 추느라 심장이 제정신이 아닌 듯 뛰고 있었다. 그리고 카이런 공작은 나를 떼어놓을 생각이 없다는 듯이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균형을 되찾아 몸을 세우자 우리의 얼굴이 바짝 가까워졌다.
나는 그의 팔에서 허리를 빼내기 위해 몸을 조금 꼬며 그의 팔을 지그시 눌렀다.
“죄, 죄송…….”
하지만 그의 팔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가 겁을 먹는 순간, 그의 팔이 풀리며 내 몸을 세워주었다.
그는 몸을 돌려 벽난로로 돌아가며 말했다.
“기본 동작이야. 할 수 있겠나?”
“네! 공작님!”
내가 기운차게 대답하자 그는 소파에 드러누웠다.
“그럼 이제 가서 자.”
나는 머뭇거리다가 모포를 꺼내와 소파 머리맡에 두고 인사했다.
“오늘 즐거웠어요. 감사합니다. 공작님!”
나는 즐겁게 방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우리 둘 다 유쾌할 수만은 없는 기억을 곱씹어야 했지만, 함께 그것을 날려버린 것은 소중한 기억이 될 것 같았다.
추위를 안 탄다고는 하지만, 지금 카이런 공작이 모포를 덮고 자고 있었으면 싶었다.
❄❅❄
나는 다음 날 게오르그를 찾아가 아침을 함께 먹었다. 그는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어쩐 일이냐? 네 녀석이 먼저 찾아오고.”
“그냥요…….”
하지만 내가 기가 죽어서 말하자, 식사를 하던 그의 얼굴은 단박에 굳었다.
그는 내 눈치를 빤히 보며 나를 불렀다.
“아리엘사?”
“어제 공작님 술친구를 해드렸거든요.”
“흠……. 그 동부 놈 때문이군.”
그가 성질을 냈지만 나는 한숨을 폭 쉬었다. 나는 전략적으로 기죽은 연기를 하는 중이었다.
“아빠, 저 올해는 축제에 가볼래요.”
“축제는 매해 갔지 않니.”
“이번에는 남자랑요.”
게오르그의 포크가 팍, 하고 탁자에 박히는 바람에, 나는 깜짝 놀라서 내 포크를 떨어트릴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