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나는 세상 쿨한 여자처럼 찻잔을 들고 일어났다. 이 세계의 차 담당 아리엘사가 차를 우리는 데 실패한 증거를 빨리 없애야 했다.
“아리엘사?”
나는 최대한 친절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체이어스 경.”
“축제에 데려가 주겠어. 사과의 의미로.”
“우와…….”
그는 내가 아니라 나 너머 어느 가구를 쳐다보며 찝찝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다는 거냐?”
“아, 아뇨. 그게 아니라, 공작님이 참 치밀하고 잔인하시구나. 정말 성격 나쁜 분이 맞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종종 헛갈리게 하시니까 헛갈리네요.”
부하에게 억지로 사과를 시켰으면 됐지, 축제까지 데려가라는 건 좀 갑질 같았다.
이런 성격을 진정시켜야 한다면 허브가 아니라 양귀비나 대마초를 재배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체이어스는 눈썹을 불균형하게 일그러트린 채 나를 확 돌아보았다.
“안 간다고?”
“체이어스님…….”
“…….”
“제가, 가끔 기억이 깜빡거려서 그러는데요, 아시겠지만, 사다리 병 때문에요.”
그는 몹시 미심쩍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데?”
“제가 남자들에게 인기가 없어요?”
“…….”
체이어스는 잠깐 작동이 멈춘 사람처럼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나는 눈을 내리깐 채였지만 또박또박 말했다.
“저와 축제를 즐기려고 할 남자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체이어스 경 때문에 그런 기회를 잃고 싶지는 않아서…….”
체이어스는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차갑고 냉정한 면만 따지면 카이런 공작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사람이 사과나무에서 떨어진 바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과나무에서 떨어진 건 난데?
나는 내 생각에 혼자 키득거리며 그에게 말했다.
“축제를 벌 받는 데 사용해버리기에는 아깝잖아요. 데이트 신청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체이어스 경의 벌로라도 가보고 싶기는 하지만……. 그래도요.”
그는 제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 무릎 사이에 묻었다. 나는 점점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졌다.
“됐어. 나는 그분의 책사이며 전우야. 그 정도는 무마할 수 있어.”
자존심 강한 완벽주의자 체이어스가 공작의 명령을 이행하지 못하겠다고 말한다고?
영 미덥지 않은 말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를 뚱하니 쳐다보았지만, 그는 어깨 너머로 말하며 나가버렸다.
“네가 지금까지 남자들에게 축제 데이트 신청을 못 받은 건 게오르그 경 때문이야. 다른 이유는 없다.”
나는 쾅 닫혀버린 문을 억울하게 바라보았다.
“역시!”
원흉은 그 딸 바보 츤데레 아저씨였던 거다!
하지만 올해도 그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이 축제는 내게도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마지막 축제일지도 몰랐다.
카이런 공작이 본격적으로 음모에 휘말리기 전에.
나는 조만간 다시 벨리아를 방문해야만 했다.
예쁜 북부의 봄 축제 드레스를 받아오고, 그녀에게 근육질 츤데레를 건네주는 거래를 하러.
❄❅❄
나는 얼른 릴리스 차를 버리고 실내를 정리한 다음 방으로 돌아왔다.
카이런 공작이 낮잠을 자는 동안은 나도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나도 충성스러운 시녀답게 낮잠을 자기로 했다.
-아리엘사, 공작님이 부르셔.
하녀의 노크 소리에 나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컴컴했다. 몇 시간이나 잔 것 같았다.
해가 져가는 시각에 출근을 하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북부의 주인인 위대한 그분에게 약점을 잡힌 몸이었으니까.
내가 집무실로 가자 카이런 공작은 자다 나온 흐트러진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나는 조금 안도했다. 집무를 보려 했다면 저렇게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도 나처럼 낮잠을 너무 자서 밤잠은 오지 않고, 또 혼자서 지루하니 만만한 나를 불러낸 것이 틀림없었다.
“공작님, 푹 쉬셨나요?”
그가 탁자에서 술잔을 집어 드는 걸 보고야 그가 술을 마시는 중임을 깨달았다.
그는 조금 심술 맞게 말했다.
“벌은 제대로 받았나?”
나는 카이런 공작의 맞은편에 슬쩍 앉았다. 그의 눈이 못마땅한 듯 가늘어졌지만 따로 지적하지는 않았다.
제대로 된 시녀라면 주인과 같은 자리에 앉는 일은 있을 수 없었지만, 나는 이방인이 아닌가.
언젠가부터 나는 카이런 공작과 단둘이 있을 때는 원래 내 모습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종종 거슬려 하는 것 같았지만 제지하지는 않았다.
어떨 때는 그가 나를 내 자연스러운 상태로 내버려 둔 채 관찰한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의 입장을 생각하면 하지 말라고 하기는 힘들었다. 그는 다름 아닌 황제와 척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 모르는 것은 모두 그와 북부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으니 말이다.
실은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나는 그를 내버려 두었을 것이다. 그가 내게 관심을 기울여주는 순간들이 나는 즐거웠다.
따지고 보면 카이런 공작이야말로 이 외딴 세계에서 나와 진짜 관계를 맺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내 비밀을 알면서도 지켜주는 사람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곤 했다. 나를 낯선 동물처럼 여기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이렇게 복잡한 생각을 하며 때로 즐거워하는 내가 어리석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나는 적어도 이 감정이 바보 같은 것은 아니라고 믿었다.
가끔 나를 무심히 스치는 그의 시선을 느낄 때마다, 내 가슴속에 그런 믿음이 조금씩 쌓여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그와 단둘이 있는 집무실의 고요함도 좋았다.
“감사드려요.”
내가 불쑥 말했을 때 그의 동작은 잠시 멈추었다. 그러나 카이런 공작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먼 산을 보며 술을 홀짝이기만 했다.
“체이어스 경과 화해했어요.”
“벌을 더 받아야겠군.”
“물론 그 시간은 대단히 괴로웠고요!”
그는 슬쩍 비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잠이 안 오시는 거예요?”
“충분히 잤으니까.”
“그래도 푹 주무셔야 그 완벽한 피부를…….”
“뭐라고?”
“아, 아닙니다.”
차가운 북부 남자에게 피부 관리 같은 말을 꺼낸 내 입을 때려줘야 했다.
나는 침묵 속에서 벽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벽난로는 언제까지 피우나요? 날이 따뜻해지면 차를 어떻게 끓일지 걱정이에요.”
“차 끓이는 작은 화로를 가져오라 일러.”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었다.
“나는 이맘때 벽난로를 쓰지 않아. 네가 추위를 많이 타는 듯해 피워둔 거야.”
“…….”
나는 뜻밖의 말에 얼굴이 조금 붉어지고 말았다.
나를 살인도 불사하는 배신자에게 미끼로 던지는 사람이 또 이런 세심한 배려를 하다니…….
나는 그래도 좋은 것은 좋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물었다.
“가우린은 어떻게 되었어요? 뭘 알아내셨죠?”
“넌 다 알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오늘 유달리 촉촉해 보였다. 푹 자서 피로가 풀린 탓인지, 흐트러진 모습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술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랬다.
나는 그의 눈동자를 홀린 듯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원래 롬니 행정관의 자리를 차지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달라졌으니 저도 앞으로 상황은 알 수 없어요. 그러니 계속 정보를 주셔야 해요.”
“놈은 죽었다.”
“…….”
뜻밖의 결과였다.
“근성 하나는 높이 쳐줄 만하더군. 새벽까지 입을 다물고 버티다가, 갑자기 자기 머리를 책상에 박았어. 그리고 죽었어.”
“세상에…….”
“아리엘사, 인간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아. 원래라면 혹이나 나고 말아야 하는데, 놈은 죽어버렸어.”
“무슨 말씀이신지…….”
“놈은 마치 죽기로 되어 있던 것처럼 보였다. 내 생각이 너무 과한가?”
“…….”
나는 설명할 수 없는 약간의 한기를 느끼며 카이런 공작을 바라보았다.
원작에서 카이런 공작은 마지막까지 그의 배신을 알지 못한다.
마지막 순간에야, 그 중요한 식량 배달 대신 매복한 적병이 튀어나온 것이 행정관 가우린의 배신 때문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카이런 공작이 하르펠을 되찾았을 때 수도로 도망가서 안락하게 살다가, 체이어스에 의해 암살당한다.
다시 말하면 가우린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카이런 공작에게 설명한 적이 없었다.
그가 원작 설정으로는 불가능한 장면에 들어와 있어서, 혹은 지금 그가 가진 정보가 공작에게 전달되면 줄거리가 진행될 수 없어서 이 세계에서 제거당한 것은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입을 다물고 죽음을 택한 것은 동조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테지, 다른 의미를 붙이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았다.
취조실에서 너무 쉽게 죽어버린 건 그에게 지병이 있었거나, 만약을 위해 준비했던 독을 먹었거나…….
나는 내 생각이 너무 먼 곳까지 뻗어나가지 않도록 머리를 마구 저었다.
가우린의 비상식적인 죽음은 카이런 공작도 심란하게 만든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낮잠을 자며 긴 휴식을 취하고, 술잔을 들게 만들었는지도 몰랐다. 그와 같이 까칠한 사람에게 이런 상식 밖의 일들은 처리하기 힘든 정보인 게 당연했다.
“롬니의 자리를 차지하고서, 놈은 나를 어떻게 배신했지?”
“…….”
“아리엘사?”
그의 눈빛이 사나워지고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대답해야 했다.
“포슬린의 곡식창고를 이용해서 공작님을 곤란에 빠트려요. 더 자세한 걸 물으시면 안 돼요.”
그는 조금 놀란 표정이 되더니 나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장부 정리를 도와서 롬니를 구해준 것도 그래서였나?”
“아, 그건 정말로 우연…….”
하지만 카이런 공작은 내 말도, 이 세상도, 하나도 못 믿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획 돌려버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동부 행정관 후임은 고르셨어요?”
“크레인.”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쏘아보았다. 그가 내 확인을 원하는 듯해서 나는 긴장하며 기억을 짜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