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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38/128)

34화

게오르그라면 네가 어떤 놈에게 잘 보이려고 이러는 거냐고 화를 낼 것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벨리아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한 것 같았다.

나는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일단 만들고, 숨기죠.”

벨리아도 비장하게 대답했다.

“일단 만들고, 숨길까?”

우리는 동시에 끄덕였다.

그녀는 내 치수를 재빠른 손길로 잰 다음, 아껴두었다는 색띠를 보여주었다.

내가 고른 옷단과 그 색띠는 원래부터 하나가 틀림없었다. 나는 좋아서 입이 쩍 벌어졌다.

“그리고 상의 여밈 끈에 이 술을 달아줄게.”

그녀는 작고 귀여운 금색 술을 눈높이에서 흔들어댔다.

“어머…….”

“그렇지?”

우리는 눈을 하트로 만든 채로 한참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내가 마음에 드는 말만 했다.

내가 고른 원단을 재봉사에게 보내면 일주일이면 새 옷이 만들어질 거라고 했다.

내가 가게를 떠날 때 그녀가 말했다.

“아리엘사, 종종 놀러 올래? 난 오늘 몹시 즐거웠거든.”

그녀가 오늘 몹시 즐거운 이유가 큰 매상을 올려서인지 나와 시간을 보내서인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우리의 취향이 영혼의 쌍둥이 같다는 사실 말고도, 그녀는 유쾌했다. 무엇보다 게오르그와 함께하기에 나쁜 사람 같지 않았다.

“네. 아줌마.”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사실 그동안 네가 꼬박꼬박 벨리아 씨라고 불러서 섭섭했거든……. 그렇게 불러줘서 기쁘구나. 아리엘사.”

나는 그녀와 포옹하고 성으로 돌아왔다. 성으로 기울어지는 석양빛처럼 내 마음도 따뜻했다.

집무실 문을 열었을 때 카이런 공작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지금이 한 시간 후라고 생각하나, 아리엘사?”

나는 재빨리 창밖을 흘끔 보았다.

아차.

이미 해가 져가는 시각이었다. 어떻게 우겨도 내가 한 시간 만에 돌아왔다고 주장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여자가 예쁜 옷을 고를 때는 우주의 시간이 멈춘다고요!

“……죄송합니다!”

내 주머니 안에는 벨리아의 가게에서 집어온 사탕 한 알이 있었다. 집무실로 돌아온 나는 그것을 카이런 공작에게 두 손으로 내밀었다.

그는 그런 나를 보며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포목점에서 새 옷 만들 원단 골랐어요. 벨리아 아줌마와는 옷 얘기만 했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요.”

나는 손이 민망해 사탕을 책상에 올려두었다.

“하.”

카이런 공작은 짜증을 견디기 어려운 듯 잠시 책상을 노려보더니 쓰고 있던 서신을 다시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알고 있어.”

“네?”

“내 감시 없이 다닐 수 없다고 했을 텐데.”

생각해보니 그가 그 비슷한 말을 한 것 같기도 했다.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하지만 차라리 다행이었다. 나는 떳떳했고, 미행이 붙어서 내 떳떳함을 증명해준다면 좋은 일이었다.

“벌은 받아야지.”

“……네?”

뜻밖의 말에 나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가 초등학생도 아니고, 벌?

카이런 공작은 편지 봉투에 밀랍을 떨어트리며 말했다.

“무슨 벌인지는 내일 알려줄 테니 오늘은 돌아가.”

“공…….”

내 상식에는 아무리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해도, 이곳은 그의 세상이며 그의 땅이었다.

시녀가 한 시간 안에 돌아오라는 공작의 명령을 지키지 못한다면 벌을 받아야 하는 곳 말이다.

나는 그냥 입을 닫고 터덜터덜 돌아섰다.

그런데 내가 문을 닫을 때 그가 사탕을 으드득 깨 먹는 소리가 들렸다.

하…….

❄❅❄

나는 지금쯤 열심히 만들어지고 있을 내 새 옷을 생각하며 평소보다 기분 좋은 상태로 출근했다.

카이런 공작은 오늘 소파에 앉아 있었다. 늘 단정하던 재킷 목을 느슨히 풀어둔 데다 책상은 깨끗했다.

삐딱한 자세로 창밖을 바라보는 그는 마음이 다른 데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공작님, 차 드세요.”

“오늘은 옌델인가?”

“릴리스입니다. 향이 좋아요. 기분을 북돋워주는 효과가 있대요.”

“온실도 없는데?”

“전에 말려둔 거예요.”

카이런 공작은 한 모금을 마시더니 내려놓았다. 입에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좀 섭섭했지만, 어차피 릴리스 허브는 한 번 솎아낸 양밖에 없었기 때문에 별로 버릴 것도 없었다.

카이런 공작은 나를 계속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가 사준 내 옷 때문에 살짝 들떠 있었기 때문에 웃으며 말했다.

“입맛에 안 맞으시면 다음에는 다른 차를 준비할게요.”

그때 카이런 공작의 한쪽 입꼬리가 삐뚤게 올라갔다.

나는 그 표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멈칫 굳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공작님……?”

“벌을 받아야지?”

나는 입을 쩍 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징글징글하다. 진짜 아리엘사는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이 성질을 죽여놓겠다고 차에 집착한 그녀의 행동이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되었다.

“어떤 벌이요?”

-공작님. 체이어스입니다.

“훗.”

그는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들어와.”

그는 마치 이른 퇴근을 하는 사람처럼 일어나더니 집무실에서 나갔다.

“나는 가서 좀 자야겠어.”

체이어스는 집무실에서 나가는 그를 향해 절도 있게 묵례했다. 그리고 우리 둘만 남은 방 안에는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우리는 소파를 사이에 두고 서서 서로를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체이어스는 말없이 소파에 앉았고, 나는 카이런 공작이 싫어한 릴리스 허브를 한 잔 더 부어서 탁자에 놓고 왔다.

“공작님께서는 밤새워 가우린을 심문하셨다. 이제 쉬시려는 모양이야.”

그런 거였다니…….

카이런 공작의 사정도 모르고 새 옷에 들떠 있던 게 좀 미안해졌다.

그런 일을 좋아서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군가의 배신과 살해 위기를 늘 이겨내야 하는 일은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무덤덤해질 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나는 조용히 내 자리로 돌아왔다. 시녀란 가구보다 눈에 띄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기에, 체이어스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나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소리가 들렸다.

“켁. 으. 흐으.”

다행히 그도 릴리스 허브가 몹시 맛없는 모양이었다.

“아리엘사!”

체이어스의 짜증스러운 부름에, 나는 발딱 일어나서 그에게 갔다.

“그 허브 특유의 향이에요. 똥 탄 거 아니고요, 적응하기만 하면 정말 맛있게 즐길 수 있는 차예요.”

체이어스는 나를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똥……?”

나는 새삼 민망해져서 그냥 고개를 확 돌렸다.

“앉아봐.”

생각 같아서는 당장 집무실에서 나가고 싶지만, 아무래도 체이어스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카이런 공작의 벌인 것 같았다.

나는 그를 흘끔 보다가 그의 맞은편에 앉아서 카이런 공작이 두고 간 찻잔을 당겨왔다.

체이어스는 내 행동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감히 주인의 음식에 입을 대는 것이 어긋난 행동이리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내 손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시큼하고 털털한 첫 맛이 생각보다 자극적이어서 나는 조금 미간을 찌푸렸다.

음, 완전히 잘못 우렸다.

내가 그러는 동안, 체이어스는 방 안을 응시하다가 마른세수를 했다. 그가 나를 소리쳐 부른 건 릴리스 차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체이어스 경도 벌 받는 중이세요?”

“벌?”

“전 이거 벌이거든요. 체이어스 경과 단둘이 있는 거요. 뭐……. 거의 고문에 가까운 일이잖아요?”

내가 보트 창고에서의 일을 일부러 꼬집으며 뾰족하게 말하자, 체이어스는 시선을 피했다.

“외출 시간……. 공작님께서 그런 것도 정해주셨니?”

체이어스의 목소리는 묘하게 흐려졌다.

중요한 부분은 그게 아닌데, 그는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너와 함께 있는 시간이 벌일 정도로 네가 싫다고 말하고 있잖아!

하지만 그에게 나는 살짝 맛이 간 아리엘사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결국 카이런 공작의 배신자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그가 미운 마음이 확 줄어들었다.

나는 심호흡을 한 다음 화제를 돌렸다.

“가우린은 자백했어요?”

“네가 알아야 할 일은 아니다. 아리엘사.”

체이어스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황제의 적의는 비밀 중의 비밀이어야 했다. 오히려 내가 어리석은 질문을 한 것이 맞았다.

카이런 공작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아리엘사.”

“네.”

체이어스는 헛기침을 하고 나를 불렀고, 나는 퉁명스럽게 답했다.

“미안하다.”

“…….”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키득 웃고 말았다.

“체이어스 경도 벌 받는 거 맞네요. 공작님이 저한테 사과하라고 하셨어요?”

“…….”

그는 내게서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리듯 말했다.

“너를…….”

“미끼로 써서요?”

체이어스는 이마를 팍 찌푸렸다.

“그것은 공작님 명령이었으니 그 부분은 안 미안해!”

“헉! 양심도 없어.”

“내가 사과하는 건, 흠, 창고에서 너를 풀어주지 않고 와서다. 잠깐 욱해서…….”

“맞아요! 그때 제가 얼마나……!”

나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체이어스가 마치 매를 기다리는 사람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기는, 저렇게 자존심이 센 사람이 발톱의 때처럼 여기는 시녀에게 사과하려니 얼마나 힘이 들까.

그래도 그의 사과가 진심인 것 같아서 나도 그만하기로 했다. 내가 지각한 벌이 이 정도라면 나도 불만은 없었다.

아니다.

사실은, 카이런 공작이 벗어준 케이프가 몹시 따뜻했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그의 허리를 꼭 안고 말을 타고 돌아온 기억도.

“알았어요.”

“……응?”

체이어스는 내가 바로 대답하자 오히려 당황한 것 같았다.

“사과 받아들일게요. 앞으로 또 그러지 마세요. 그리고…….”

“그리고?”

“경의 지독한 의심병을 인정해드릴 테니까, 앞으로 제 사다리병도 인정해주세요. 머리를 다친 후로 저도 제가 왜 달라졌는지 모르겠는 걸 어떡하겠어요.”

“크흠……. 그래.”

이 기세를 몰아 나는 내 달라진 행동의 보험까지 얻어냈다. 찜찜한 채로 수긍하는 체이어스를 보니 쾌감이 송송 솟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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