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썩 나쁜 외모는 아니지만, 저 근육질 아저씨가 눈에서 광기를 뿜으며 ‘꽃 같은 딸’이라고 부르니 몸에 닭살이 돋는 것 같았다.
그를 무사히 훈련장으로 돌려보낸 다음, 나는 온실로 돌아갔다. 문 쪽 모서리가 와장창 날아가 있었고, 내 허브들은 냉해를 입어 시들시들해져 있었다.
“흐흑. 내 허브…….”
나는 울적한 얼굴로 카이런 공작의 집무실로 갔다.
“안녕하세요, 공작님.”
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나 카이런 공작이 내가 있는 쪽을 노려보는 시선이 확연히 느껴져서, 나는 터덜터덜 일어나 콘솔 테이블로 갔다.
“오늘은 시나몬 차 드세요.”
나는 뚱하게 카이런 공작의 책상 위에 찻잔을 놓아두었다. 그리고 돌아가려다가, 참지 못하고 몸을 획 돌려 소리치고 말았다.
“온실까지 부수실 필요는 없었잖아요!”
나는 가우린에게 목이 졸려 기절하기 전에, 체이어스가 달려오는 걸 본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 온실 문을 활짝 열려 있었기 때문에 부수고 들어올 상황은 아니었다. 온실은 내가 무사히 구출된 이후에 부서진 게 틀림없었다.
“그래야 가우린의 범죄가 더 생생하게 느껴지지. 동부의 시끄러운 늙은이들도 그걸 보고는 입을 꾹 다물더군. 세상에, 그자들이 조용해졌다고. 훗. 그들이 돌아가면 재판을 열어야겠어.”
시나몬 차를 홀짝이는 카이런 공작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는 내 남주가 악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뭐 이렇게 치밀하고 무서우세요.
“그래도……. 이제 차는 뭐로 끓여요? 허브들이 다 못 쓰게 되었어요.”
“한 달.”
“네?”
“주문한 유리와 새 허브 모종이 한 달 후에는 도착할 거야. 체이어스에게 맡겼으니까 물어봐.”
“어머…….”
나는 얼굴이 활짝 펴지고 말았다.
“유리가 어떤 사치품인지는 알고 있지?”
나는 입이 찢어지라 웃었다.
우리 치밀한 남주는 그런 것까지 치밀하게 생각하고 계셨다. 나는 조금 전까지 속으로 그를 욕한 게 미안해졌다.
이 세계에서 유리란 대단히 비싼 사치품이었다. 그걸 사준다니 입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공작님.”
“네가 그 정도 값어치를 했기 때문이다.”
무심하게 뱉은 그는, 그때부터 나를 무시했다.
그런가? 내가 그를 여러 번 구해주었으니 그 정도는 받아도 되나?
나는 어깨가 하늘로 치솟는 느낌으로 내 자리로 돌아와서 앉았다.
수틀은 들었다가 다시 놓아버리고,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제 봄이구나…….’
이곳 사람들은 이미 봄에 즐겨야 하는 것들을 다 끝내버렸을 정도지만, 나는 낮 햇살에서 한기가 가시기 시작한 지금에야 봄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의자에서 발딱 일어났다.
“공작님, 저 잠시 외출해도 되나요?”
내가 갑자기 너무 명랑한 목소리로 물어서인지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잠시 보았다.
금방까지 울먹거리다가 온실을 다시 꾸며준다는 소리에 좋아서 헤벌쭉하는 내가 살짝 민망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있다가 가우린 고문할 때 참관해야지.”
카이런 공작은 정확히 ‘있다가 차나 한잔 해야지’ 하는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입을 쩍 벌렸다.
나는 이 북부인들의 고문 장면 같은 건 실제로 보고 싶지 않았다.
“시, 싫은데요.”
그는 이마를 팍 일그러트린 채 나를 보다가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가 오라는데 싫다는 소리를 한 사람이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짜증스럽게 뱉었다.
“어디?”
“시장이요. 봄이잖아요. 새 옷이 있으면 좋겠어요.”
“한 시간 준다.”
나는 입을 불툭 내밀었다가 재빨리 표정을 정리했다.
한 시간이라도 어딘가. 지하 감옥에서 배신자 고문당하는 모습을 참관하는 것보다야 백배 나았다.
“감사합니다!”
나는 돌아섰다가 다시 카이런 공작을 향해 돌아섰다.
“저기…… 저희 아빠, 돈 많이 벌어요?”
“쯧.”
카이런 공작은 짜증스러운 듯 펜을 책상에 탁 놓았다. 사실 그런 걸 묻는 건 부모 자식 간에도 실례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나는 이 세계의 금전 감각이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눈을 굴리며 눈치를 보자 그는 짧게 말했다.
“딸 옷 정도는 사주고도 남아. 벨리아에게 가는 거면 모두 나에게 달아놓아.”
“벨리아요?”
“포목점 주인. 아직 모르나?”
내 아빠의 애인에 관해서는 아무래도 나 말고 다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햄버거 지수가 여기서 통할 것도 아니고, 여기 옷값이 게오르그에게 부담이 되는 수준인지 아닌지 모르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카이런 공작의 돈을 쓴다면 하나도 미안하지 않았다.
월급 한 푼 받지 않고 매일 초과 근무하지, 거기다 죽을 뻔한 위험수당까지 하면…….
“헉.”
나는 내가 그동안 중요한 것을 지나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공작님.”
내가 딱딱하게 부르자 막 책상으로 돌아앉으려던 그가 다시 돌아보았다. 이제는 정말로 짜증을 터트리기 직전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나는 심각하게 물었다.
“전 월급이 없나요……?”
카이런 공작은 이를 꽉 물고 대답했다.
“재정관에게 가서 확인해봐. 매해 네 몫으로 적립되는 돈이 있다.”
여전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관습법이 지배하는 세상인데, 뜻밖에 연봉제인 모양이었다.
나는 얼른 돈을 출납하는 재정관에게 갔고, 우리 잘생기신 남주님께서 보기보다 쩨쩨하지 않으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시장으로 향했다.
❄❅❄
“벨리아 씨.”
“아리엘사! 너 어제 큰일을 당할 뻔했다면서! 괜찮니?”
내가 포목점 앞에 나타나자 벨리아는 달려 나와 내 손을 붙잡았다. 많이 놀라서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카이런 공작은 가우린이 어떤 자인지 완전히 공개해버리기로 한 것 같았다.
“네, 괜찮아요. 체이어스 경이 북부의 늑대처럼 달려들어 저를 구해주셔서…….”
밖에서는 아리엘사처럼 보여야 했으므로 최대한 소심하게 말했는데, 반응은 엄청났다.
벨리아는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내 두 손을 꼭 잡고 흔들었다.
“체이어스 경이 구해주신 거야? 역시 체이어스 경! 이걸 들으면 성안 아가씨들이 얼마나 심장을 졸일까! 정말 다행이구나, 아리엘사.”
흥. 퍽이나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북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체이어스는 성에서 인기남인 모양이었다.
나는 성안 아가씨들이 다 한 번씩 보트 창고에서 의자에 묶인 채로, 그 냉기 낭랑한 시선 아래서 불로 지진다는 위협을 당해봤으면 싶었다.
그러나 동의한다는 듯 끄덕끄덕할 수밖에 없었다.
“너는 그분과 체이어스 경 곁에 있으니 정말 복 받은 아이야, 아리엘사. 게다가 멋진 아빠를 가졌고.”
‘그분’은 카이런 공작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벨리아는 비교적 양심적인 여자였다.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하면, ‘게다가 멋진 아빠를 가졌고.’ 부분에서 부끄러운 듯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뻔뻔하게 했으면 나는 단박에 그녀를 싫어했을 것이다.
“네. 그럼요. 그 일 때문에 저도 기분전환을 좀 하고 싶어서…….”
“기분전환?”
“봄이기도 하고, 이제는 좀 밝은 옷을 입으면 어떨까…….”
아리엘사는 취향이 몹시 단조로워서, 아니다, 그녀는 색맹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나는 색맹이 아니었다. 나는 나이에 맞는 아가씨다운 예쁜 옷을 입고 싶었다!
벨리아는 내 말에 몹시 놀란 듯하더니 말했다.
“밝은 옷?”
“네.”
벨리아의 눈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까 내가 게오르그의 눈에서 본 광기와도 흡사했다.
이 사람들이 커플이 맞기는 맞는구나.
“무늬랑 띠랑 술 장식도 있는 그런, 예쁜 옷?”
나는 격하게 동의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나중에 여주가 북부에 와서 이런 복식은 보지 못했다고 감탄하는 장면이 있었던 걸 보면, 북부에도 화려하고 예쁜 여자 옷이 있는 게 분명했다. 단지 내 옷장에 없었을 뿐이지.
나는 조금 흥분하면서도 애써 자제하며 말했다.
“술 장식이요? 하지만 그런 건 비싸지 않나요? 공작님께서 공작님 앞으로 달아놓으라고 하셨는데 부담드리기-”
“-그러셨어? 세상에! 네가 그런 일을 당한 걸 위로해주시려고? 과연 위대한 그분은 아량도 위대하시지!”
나는 그때 그녀의 눈에서 퓨즈가 탁 끊어지는 것을 보았다.
벨리아는 나를 가게 안으로 끌고 가더니 선반을 뒤지기 시작했다.
“내가 널 위해서 일부러 빼둔 원단을 다 마다하고 너는 그런 것만 골랐잖니. 온실에서 흙 묻었을 때 티가 안 나야 한다면서. 아, 온실이 부서져서 이제 괜찮은 거니? 호호호.”
벨리아는 흥분해서 말을 빠르게 쏟아내고 있었고 나는 조금씩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녀 말의 기세는 동부 장로들과 비견할 법했다.
마침내 그녀가 확 돌아섰다.
“자!”
“어머…….”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있다! 북부에도 예쁜 원단이 있다니까!
벨리아는 바로 내가 찾던, 예쁜 기하 무늬가 들어간 조금 탁한 연노랑 원단을 들고 있었다.
벨리아는 내 표정을 보고는 의기양양한 얼굴을 했다.
“마음에 드니? 축제에 이걸 입고 나가면 기사님들도 다들 숨을 멈출걸?”
“축제요……?”
북부에는 봄이 오고 농사가 시작되기 전에 축제가 열렸다. 이 축제가 끝나면 그들은 농사일을 하고 가축을 돌보면서 추수철까지 바쁘게 지내야 했다.
나는 침이 꼴깍 넘어갔지만 눈치를 보며 말했다.
“비싸……겠죠?”
사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치수를 재자고 하고 싶었지만, 아리엘사의 캐릭터를 지키기 위해서 가격을 걱정하는 척했다.
물론 카이런 공작에게 청구될 금액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벨리아는 고개를 크게 저었다.
“공작님께 달아놓으면 된다며! 장식물은 특별한 가격으로 해줄게. 남부에서 들여온 색띠가 어찌나 예쁜지 내가 안 팔고 두었거든. 언젠가 꼭 한번 너를 꾸며주고 싶었어. 게오르그 경도 분명 좋아하실……까?”
우리는 동시에 서로를 응시했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