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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36/128)

32화

체이어스는 키득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그러나 그의 눈이 웃고 있음에도, 입매는 이상하게 차분했다.

나는 씩씩대며 그를 쏘아보았다.

“왜 저 안 풀어줘요?”

“너를 믿고 싶기도 하고, 믿기 싫기도 해서.”

“……뭐라고요?”

“모베일에서 우연히 주워들은 정보라고? 좋아. 그 말을 믿어보지. 하지만 그걸 믿는대도, 너는 요즘……. 이상해.”

“그거야-”

“-사다리 병이라고?”

“…….”

그는 이마를 구기며 말했다.

“예전의 너는 좀 더……, 네가 공차는 걸 봤을 땐, 와.”

체이어스는 아리엘사와 나를 비교하기 시작했고 나는 기분이 점점 더 나빠졌다.

“그래서, 제가 요즘 마음에 들지 않아서 묶어놨어요?”

“모베일 여관에서 들었어. 아리엘사.”

순간 식은땀이 났다.

“네가 손을 다쳐가면서 벌집을 뜯어와서 몇 시간을 끓이고 짜내고 했다고. 그걸로 공작님을 살렸지? 그런 방법은 어떻게 알았지?”

“체이어스 경도 차에 관해 공부해보세요. 그럼 주워듣는 지식 몇 개는 있을 테니까!”

“흠……. 그럼 보트가 망가졌다는 건, 사냥 때 말 귀에 붙은 도깨비 풀은?”

“유심히 보니까요! 좋아하는 사람 주변은 커다랗게 잘 보이는 게 당연하잖아요!”

“…….”

체이어스는 입을 조금 벌렸지만, 더 말을 하지는 않았다.

나도 아차 하고 굳어버리고 말았다. 카이런 공작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이렇게 말해버리면…….

하지만 나는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풀어줘요!”

“……싫은데.”

“뭐라고요?”

체이어스는 어두운 얼굴로 일어났다.

“공작님을, 네 주인으로 좋아하는 거니? 아니면…….”

“그거야 당연히…….”

나는 말하다 입을 다물고 말았다.

갑자기 말문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그를 마음껏 좋아할 수 있어서 즐거웠는데, 듣고 보니 당혹스러운 질문이었다.

물론 나는 그를…….

나는 체이어스의 울적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망연히 대답했다.

“저는 공작님의 삶이 행복해지기를 바라요.”

체이어스는 입을 굳게 다물더니 문으로 향했다.

“체이어스 경, 풀어줘요!”

“싫어.”

그는 정말로 문을 탕 닫고 나가버렸다.

“하…….”

나는 기가 막혀서 잠시 앉아 있다가 고함쳤다.

“이러는 게 어딨어요!”

하지만 내 고함만 창고 안을 울렸고, 그는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빠한테 이를 거야!”

나는 다시 고함을 치고 나서 훌쩍거렸다.

화로는 벌겋게 타오르고 있었다. 밤새 춥지는 않을 듯했지만, 묶인 팔도 아팠고 외딴곳에 방치되었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나는 화로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런 게 어디 있어…….”

“내 마음이야.”

“공작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카이런 공작이었다.

그는 빙글빙글 웃으며 체이어스가 앉았던 의자에 앉아 체이어스가 꽂아놓은 인두로 화로를 뒤적였다. 그의 몸짓에는 나를 풀어주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다.

나는 그의 손길을 따라 벌겋게 숨 쉬는 숯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깨닫고 말았다.

오늘 밤 체이어스가 벌인 일 모두는, 카이런 공작의 명령이었다.

체이어스가 카이런 공작의 묵인이 없이 나를 이렇게 묶어둘 수는 없었다. 카이런 공작은 나에 대한 의심을 버린 적이 없었던 것이다.

“절 어떡하실 거죠?”

카이런 공작은 의문스럽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널 어찌한다고?”

“절 가우린을 낚기 위한 미끼로 쓰셨잖아요. 그가 진짜로 어떤 인간인지 알아보려는 미끼요! 그러고도 안 풀어주시고!”

“흠. 그건 정말 재미있었어. 그렇게 즉시 반응하다니. 가우린 놈은 진짜로 너만 없으면 내가 저를 행정관으로 임명할 거로 믿은 모양이지? 성에 함께 있는 동안 결판을 보려 한 것을 보면 분명히 마음이 상당히 급했던 거야.”

이런 상황을 즐기고 있는 그가, 나는 조금 무서워졌다.

“……그의 배후는 캐셨어요?”

“이제부터 할 일이다.”

“정말 철저하시네요.”

그는 몹시 매력적인 삐뚠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가 좀 그래. 그래서 치를 떠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지.”

“가우린은요?”

“감히 내 코앞에서 내 시녀를 해하려 하다니. 죄목대로 다스리면 될 뿐이다.”

복잡한 계획을 짜는 그는,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하게 생각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내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저는요?”

“너는 아직 나를 만족시키지 못했어.”

“네……?”

나는 맥이 탁 풀린 채 카이런 공작을 바라보았다.

대체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건지, 그는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네가 체이어스 앞에서 울고 불며 비밀을 털어놓을 줄 알았거든. 그런데 너는 나를 실망시켰어.”

“세상에!”

“아니, 그건 체이어스 탓이지. 네게 그렇게 무르게 굴 줄이야. 녀석은 멀었어.”

나는 울컥해서 말했다.

“제가 빙의자라고 다 불어버리기를 바라셨다고요?”

그는 나를 향해 삐뚤게 웃었다.

“그랬다면 체이어스는 너를 바로 풀어줬을 거야. 네가 머리를 다쳐서 미쳐버린 게 맞다고 확신했을 테니까. 사실 우리는 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게오르그의 눈치를 보느라 모르는 척하고 있었거든.”

그리고 그는 차분하게, 한숨을 쉬듯 말했다.

“하지만 너는 비밀을 지키는 데 퍽 열심이더군.”

“…….”

나는 카이런 공작을 음울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소리를 들은 걸까, 아닌 걸까?

아니다. 지금 저 인간의 성격이라면 들었어도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제 삶을 훔쳐보고 즐겼다는 이방인의 호감이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나는 몸을 마구 흔들며 소리쳤다.

“미워! 다 미워!”

카이런 공작은 그런 나를 바라보며 유쾌하게 웃었다. 내 비참함과 구차함을 잠시 잊어버릴 만큼 아름다운 얼굴로.

그는 단검을 꺼내 나를 묶은 밧줄을 한 번에 잘라낸 다음, 나를 문으로 앞세웠다. 문을 열기 직전에, 그의 망토가 내 어깨에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그래서 그가 문을 열었을 때 나는 물을 스쳐온 싸늘한 바람에도 크게 몸을 움츠리지 않았다.

내 눈앞에는 달빛을 받은 검은 호숫물이 흩뿌려진 유리 조각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이곳은 호숫가의 보트 보관 창고였다.

그는 뒤에서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체이어스를 너무 미워하지 마. 녀석은 너를 좋아하니까.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 네 허벅지는 인두질에 다 익어 있었을 거다.”

“…….”

아름다운 밤의 호수의 정경에 잠시 압도된 내 감상을, 그는 그런 말로 산산이 깨어버렸다.

하지만 오늘 밤은 더 울거나 화내고 싶지 않았다.

체이어스는 여전히 공작의 충직한 가신이었고, 나는 카이런 공작의 믿음을 산 것 같았다.

그리고 공작의 뒤통수를 친 배신자도 물리쳤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성으로 돌아오는 길, 카이런 공작의 뒤에서 말을 타고 그의 허리를 꼭 안았을 때, 피로와 온기에 눈이 저절로 감겼다.

❄❅❄

“아악!”

그 파란만장했던 연회의 밤 다음 날, 나는 늦잠을 자고 말았다.

내가 해가 환할 때까지 출근하지 않았음에도 두 다리가 멀쩡한 건, 내가 어제 겪은 고생에 대한 작은 보상인 모양이었다.

나는 기왕 늦은 것, 정원으로 먼저 나갔다. 온실이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었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원으로 나갔을 때 나는 기함하고 말았다. 나의 소중한 온실 벽에는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아리엘사?”

두 손을 공중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내 어깨를, 게오르그의 커다란 손이 짚었다.

“아빠? 온실이, 온실이……!”

그러나 나는 그의 딱밤에 ‘악!’하고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것은 거의 망치질에 가까운 강도였다. 지금까지의 딱밤은 애교였다.

나는 눈물을 찔끔 흘린 채로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아빠는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 줄도 모르면서…….”

그러나 게오르그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겁에 질렸다. 그렇게 커다란 근육질 남자가 우는 걸 어떻게 해줘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성큼 다가와 그 기둥 같은 팔로 나를 꽉 안았다.

“아, 빠.”

“아리엘사! 공작님께서 네가 안정해야 하니 깨우지 말라고 하셔서, 내가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아빠, 저는 괜찮아요.”

“이게 어디가 괜찮아!”

그는 나를 풀어주었고, 나는 그의 손가락을 따라 맞닿는 모서리에 커다란 구멍이 난 온실을 바라보았다.

“내 허브들…….”

“가우린 그놈은 내 손으로 목을 부러뜨려주마. 지하 감옥에서 지내는 동안은 나를 피할 수 있겠지만 그게 그놈 운의 끝이다.”

“동부 행정관 출신 장로의 아들이라면서요?”

“나는 하르펠의 방패다.”

나는 순간 그의 눈에 떠도는 광기를 바라보았다.

그랬지. 이 사람, 원작에서는 광전사 이미지였지.

‘하르펠의 방패’ 게오르그는 평소에는 허허 하는 호인이다가, 전투에 나가면 다른 인격인 바뀌는 캐릭터였다.

내가 지독히 비중 없는 엑스트라여서 그가 이렇게 지독한 딸 바보라는 설정이 많이 서술되지 않은 모양인데, 그걸 생생히 보고 있으니 진땀이 났다.

세상은 어느 시점을 가지느냐에 따라 많은 게 달라 보이는구나.

나는 해골물을 마신 원효대사 같은 깨달음에 한숨을 쉬었다.

“그가 왜 그랬는지 아세요?”

나는 게오르그가 얼마나 아는지 확인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심문은 공작님께서 비밀리에 진행하겠다고 하셨다. 곧 여쭤볼 수 있겠지.”

그가 나를 획 노려보았다. 진짜 섬뜩했다.

“놈이 네 목을 부러트리려고 한 걸 체이어스가 구했다며! 이 상황에서 그놈이 궁금해야 해? 너는 아픈 데 없냐?”

내가 연회장에서 체이어스의 뒤를 따라 나간 것처럼, 그도 내 뒤를 따라 정원으로 왔던 모양이었다.

“더러운 놈. 내 꽃 같은 딸을…….”

“아, 아빠! 우리 들어가요!”

나는 점점 더 흥분하고 있는 게오르그의 팔뚝을 안고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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