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5/128)

31화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실망이야. 체이어스. 정말 실망이야.’

심적으로 흥분한 탓에 잔을 놓는 소리가 컸다. 다행히도 이미 취한 손님들은 내 행동을 유쾌하게 여기며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내 자리로 돌아와 앉으니 취기와 함께 심장이 아까보다 더 빨리 뛰었다.

이것이야말로 배신과 음모가 함께하는 완벽한 술자리가 아닌가.

하지만 나는 실수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자리가 빨리 끝나기를 기다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내 마음과는 무관하게, 연회는 참 시끌벅적하고 즐겁게 이어졌다.

❄❅❄

연회가 끝난 다음, 하인들이 손님들을 각자의 방으로 안내하며 내 역할이 끝났다.

나는 조금 후에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도 모르고, 안심하며 일어났다.

연회장을 떠나는 카이런 공작에게 허리 숙여 인사할 때, 그를 따라 나가던 체이어스가 나를 슬쩍 돌아보았다. 참으로 냉담한 시선이었다.

체이어스는 나를 언제부터 미워했을까.

빈 복도를 걷는데 괜히 마음이 서러워졌다.

원작에서는 참 든든한 사람이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도저히 그대로는 잠들 수가 없어서, 나는 정원으로 향했다.

술도 깨고 기분전환을 하기에 그만한 장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사이 이 북부의 봄 기온도 한결 온화해져서, 이제는 내 기준 한겨울 같은 추위는 없었다.

체조라도 하면 좀 나을 것 같았지만, 그 덕에 죽을 뻔한 걸 생각하면 앞으로 체조는 평생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대신 크게 심호흡을 하며 정원을 잠시 돌아다녔다.

“어…….”

캄캄한 온실은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하인이 닫기를 잊은 모양이었다.

나는 놀라서 온실로 달려갔다.

아무리 온화해져도 북부의 밤이다. 저대로 두었다간 나의 민감한 허브들은 다 냉해를 입어서 못 쓰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읍!”

온실 안에 들어가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팔로 내 목을 감으며 입을 틀어막았다.

“얼마 전에 나무에서 떨어졌다지? 그러면 또 떨어져도 문제없겠군. 모두가 네가 취한 걸 봤으니까 말이야. 이 나대는 계집 같으니.”

목이 강하게 졸리며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

정신을 차렸을 땐, 나는 의자에 손이 뒤로 묶여 있었다. 나무로 지은 창고 안이었고, 내 앞에는 화로가 피워져 있었다.

나는 온실에서 내 입을 틀어막은 남자의 목소리를 기억했다. 그것은 분명히 가우린이었다.

나는 가우린에게 납치된 것이다.

그때 내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남자 하나가 나타났다. 화로 건너편 의자에 앉는 남자를 보고 나는 경악하여 입을 벌리고 말았다.

“체이어스 경? 대체…….”

“아리엘사.”

그는 화로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손을 쬐었다. 추워서라기보다 온도를 신중하게 확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그 불을 다른 데다 사용할 예정인 사람처럼.

나는 그의 시선을 따라 바닥에 놓인 인두를 발견하고 경악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아까 왁자한 연회에서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던 것을 기억해냈다.

설마, 이것을 위해서……?

“가우린과 한패였어요?”

체이어스는 손을 쬐는 채로 고개를 들어 나를 빤히 보았다.

“그렇다면?”

흔히 많이 놀라면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라고 한다. 그러나 놀라움이 크나큰 실망과 겹치면서, 나는 심장이 뜯겨나가는 듯 상심했다.

체이어스가 카이런 공작을 배신하다니!

그는 게오르그도 잃고 남부로 쫓겨난 카이런 공작의 곁을 끝까지 지킨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는데…….

이런 식으로 원작이 엉망이 된다면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었다. 암담함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어떻게……. 어떻게 경이 공작님을 배신할 수 있어요? 어떻게 폐하 편에서…….”

그는 잠시 나를 응시하다 말했다.

“하르펠가의 적이 폐하뿐일까?”

나는 충격에 휩싸여 중얼거렸다.

“뭐라고요?”

수년 전 동생인 대공의 반란으로 홍역을 치른 황제는 황태자의 안전한 권력 장악을 위해 힘 있는 세력 전부를 꺾어놓기로 결심한다.

그 첫 번째 목표가 카이런 공작이었다. 북부의 주인이며 마물로부터 제국을 지키는 수호자. 논쟁의 여지 없이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자였다.

그런데 황제 말고 또 다른 흑막이 있다고?

나는 혼란스러워 머리를 저었다. 그러자 결박당한 몸이 다시금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러면 경과 가우린의 배후는 누구죠?”

“흠…….”

체이어스는 의자 뒤로 등을 기대더니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른세수를 하며 머리카락을 긁적이는 모습이 내심 무엇을 격렬히 갈등하는 듯 보였다. 나는 그 갈등이 어떻게 결론 나도 내게 좋을 리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아리엘사. 우리에 대해서 어떻게 알았지?”

“…….”

체이어스는 내게 집중하며 나직이 말했다.

“내가 너를 고문하게 하지 마.”

그는 장작 조각이 숱이 되어 벌겋게 숨을 쉬고 있는 화로 속으로부터 시선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닥에서 인두를 집어 화로에 푹 꽂아 넣었다.

나는 기함하여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의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화로의 열기가 나를 훅 덮치는 듯 느껴졌다.

“고, 공작님을 불러줘요! 체이어스 경!”

나는 몸을 흔들며 고함쳤지만, 체이어스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 웃음에 머리에 찬물을 맞은 것처럼 온몸의 털이 치솟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창고 안을 돌아보며 천천히 말했다.

“게오르그 경은 네 시신을 찾지 못해 슬퍼할 거야. 그를 위로할 생각을 하니 벌써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러니 아리엘사, 네가 아는 걸 말해.”

“…….”

나는 고개를 어깨 쪽으로 잔뜩 기울였다. 눈물이 뚝뚝 떨어져서 어깨에 닦으려고 했는데, 묶여 있는 바람에 눈가가 어깨에 닿지 않았다.

그러자 진짜 눈물이 터졌다.

내가 좋아서 빙의한 것도 아닌데! 나는 다 우리 남주 잘되라고 그런 건데!

“흑……. 너무해!”

내가 엉엉 우는 동안 체이어스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창고 안을 서성였다.

자기 정체가 들켜서 그러는지, 내가 우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그러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여기가 매우 한적한 장소라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이렇게 크게 우는데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나를 더 겁에 질리게 했다.

“아리엘사!”

체이어스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나는 놀라서 뚝 하고 울음을 그쳤다.

“너와 노닥거릴 시간 없어. 질문에 대답해! 가우린에 대해서 어떻게 알았지?”

나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모, 모베일에서…….”

“모베일?”

“공작님께서 이틀 동안 순시 가셨을 때, 마을을 구경했어요. 숲에서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얼굴은 못 봤고…….”

“뭘 들었다는 거지?”

“롬니를 내쫓는 데 실패했으니 가우린이 동부라도 차지해야 해. 폐하께는 그렇게 전하면…….”

“전하면?”

“더 못 들었어요. 인부가 나타나니까 그들도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고요!”

“왜 공작님께 바로 말씀드리지 않았지?”

“그런 말을 어떻게 해요! 제가 진짜로 그렇게 엄청난 말을 들은 건지, 사다리에서 떨어져서 헛것이 들린 건지 어떻게 아냐고요!”

“흠…….”

“나중에 그가 행정관으로 언급되는 걸 보고 정말로 심각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무서웠다고요. 흐흐흑!”

거짓말을 진짜 겁에 질린 눈물에 섞어서 말하자 내가 들어도 그럴듯하게 들렸다.

특히 사다리를 언급했을 때 체이어스는 조금 설득당하는 듯도 보였다.

체이어스의 성격이면 내가 빙의자라는 걸 믿지도 않을 테지만, 그게 아니어도 나는 내 남주를 배신하면서 빙의 인생을 마칠 생각은 없었다.

다행히도 체이어스는 턱을 긁으며 골몰하기 시작했다.

“체이어스 경이야말로, 왜 공작님을 배신한 거예요? 언제부터요?”

나는 진심으로 절박하게 물었지만, 그는 나를 향해 찌푸리기만 했다.

“아리엘사, 마지막으로 묻는다. 네가 대답하기에 따라서 네 최후가 바뀔 거다.”

“체이어스 경…….”

“네가 들은 건 그게 다냐? 가우린은 네게 무슨 말을 했지?”

“기왕 나무에서 떨어진 거 또 떨어지라고…….”

나는 말을 도중에 멈추었다.

체이어스와 가우린이 한패라면, 그들이 나를 여기 끌고 왔다면, 가우린이 뭐라고 했는지를 왜 묻는 거지?

“체이어스 경……?”

생각 중이던 체이어스는 내가 불러 방해가 된다는 듯 나를 째려보았다.

“가우린은요?”

그는 내가 자꾸 말을 걸어 귀찮다는 듯 말했다.

“당연히 지하 감옥이지. 제일 끔찍한 방에.”

“…….”

나는 잠시 얼떨떨하여 그를 바라보았다.

체이어스는 가우린과 한패인 척하며 나를 신문했던 것이다.

죽여버릴까……?

체이어스는 잔뜩 찌푸린 채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공작님의 기미 시녀를 죽이려 들었으니 죽어 마땅하지. 동부 장로들의 체면을 봐서 재판이 열리겠지만 그는 다시 해를 보기 어려울 거다. 감히 하르펠 성 안에서 살인이라니!”

공작의 집인 성내에서 일으킨 범죄는 공작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통례였다. 게다가 내가 카이런 공작의 개인 비서 역할을 하는 시녀이기 때문에 엄벌은 당연했다.

나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체이어스를 바라보았다.

“절…… 속인 거예요?”

“설마. 네가 속은 거지. 훗.”

그것은 내가 평생 살면서 본 가장 얄미운 웃음이었다.

“으으으!”

나는 체이어스에게 덤벼들려 몸을 흔들었지만 의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체이어스는 나를 가소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다음에 빙의하면 게오르그로 빙의한다. 그 팔뚝으로 널 한 방에 때려눕히겠어!’

나는 이를 꾹 문 채로 물었다.

“그러면 회랑에서 가우린에게 저에 대해서 흘린 것도 일부러 그런 거예요?”

“호오, 아리엘사. 그걸 엿본 거야? 난 항상 네가 하는 짓이 좀 엉성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의외로 두뇌 회전이 빨라. 솔직히 감탄했다.”

“으으으! 용서 안 해!”

“용서 안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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