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나는 연회장의 구석에 서서 만찬 식탁을 지켜보았다. 카이런 공작이 지시한 메뉴가 실제로 성대하게 차려진 식탁을 보니 감탄이 나왔다. 물론 그 식탁을 내가 차렸으면 훨씬 더 감탄했을 것이다.
사슴 고기에다 양념에 졸인 채소를 소스와 얹은 요리는 어떤 인간이라도 다이어트를 불가능하게 할 냄새를 풍겼다.
북부의 만찬 식탁을 보며 잠깐 넋을 놓은 내게, 카이런 공작이 눈치를 주었다.
“아리엘사.”
그는 음식을 매섭게 눈짓했고, 나는 한 박자 늦게 그의 의도를 깨달았다.
‘맞아, 나는 기미 시녀니까!’
카이런 공작은 내가 식사 때도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려고 나를 기미 시녀로 쓴다는 핑계를 댔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입이 찢어지라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차 한 것은 이미 늦어버린 후였다.
그러나 나는 최대한 엄숙한 얼굴로 식탁으로 다가갔다.
한 점 떼어먹은 잘 재어 둔 사슴 고기는, 다이어트 하는 사람 말고 인류의 이성을 앗아갈 맛이었다.
제발 한 입만 더 먹고 싶었지만, 내 오물거리는 입술을 일제히 바라보는 체이어스와 동부 장로들의 시선을 자각하자 이성이 되돌아왔다.
내가 얼른 표정을 정리하자 장로 하나가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기미 시녀라니,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사건이라도…….”
그러자 체이어스가 대신 대답했다.
“동부에서 배앓이를 하셨습니다.”
“어허, 저런!”
나는 음식을 꿀꺽 삼키고는 엄숙한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맛있게 드십시오, 공작님.”
내가 뒤로 물러나자 카이런 공작이 나에 대한 비웃음인지 손님 접대용인지 모를 묘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자, 들까요?”
카이런 공작의 한마디에 방 안의 어색한 침묵은 단박에 깨어졌다. 테이블은 금방 떠들썩해졌다.
카이런 공작은 차기 행정관과 관련한 대화로 이어질 것 같으면 은근히 화제를 돌렸다.
예를 들면 모베일의 새 촌장이 마을 복구를 위해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따위 말이다.
“모베일에 더 신경을 써야 했어, 체이어스.”
그가 체이어스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말하면, 체이어스는 바로 잘못했다는 듯 머리를 숙이며 답했다.
“내일 바로 전갈을 보내겠습니다. 공작님.”
그러면 그 대화의 흐름은 끊기고 말았다. 장로들은 환상의 짝꿍 앞에서 번번이 속셈을 밝힐 기회를 잃었다.
나는 그 틈바구니에서 가우린이 상당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걸 눈여겨보았다.
만찬이 끝나고 술이 들여졌을 때, 카이런 공작의 술병에서 따른 첫 번째 술잔도 기미 시녀인 내가 마셔야 했다.
고급술이어서 맛보지 못했다면 섭섭할 뻔했지만, 취기가 오르는 게 문제였다.
나는 분위기가 무르익는 걸 보고 밖으로 나왔다. 지겹기도 하고 술도 깨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얀 달은 회랑 너머로 보이는 정원을 차갑게 비추며 북부 특유의 정취를 만들고 있었다.
난간에 기대어 찬 바람을 쐬니 뺨에 오른 열이 조금 내려가는 것 같았다.
“게오르그 경은 평안하시냐?”
가우린은 인기척도 없이 다가왔다. 마치 잠시 바람을 쐬러 나왔다는 태도였다.
나는 그를 보고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그는 아마도 게오르그를 아는 모양이었다. 하기는, 북부에서 ‘하르펠의 방패’ 게오르그 경을 모르는 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나는 최대한 건조하게 대답했다.
“네. 평안하십니다. 음식은 괜찮으셨습니까?”
“하르펠 성에 자주 들르고 싶은, 아니 여기서 눌러살고 싶을 정도였어.”
행정관이 되어서 성에 보고하러 자주 들어오고 싶다고? 어림도 없어!
그는 내가 만만한 게 틀림없었다. 내내 표정 관리를 완벽하게 하던 자가, 내 앞에서 이렇게 속내를 훅 드러낼 정도면 말이다.
“다행입니다. 연회가 끝나면 하인이 방으로 안내해드릴 겁니다.”
나는 묵례하고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가우린은 한 걸음을 옆으로 옮겨 나를 막아서며 말을 이었다.
“공작님께서 기미 시녀를 두신 것은 현명한 처사야. 귀한 분이니 항상 주의를 기울여 나쁠 것은 없지.”
“…….”
인제 보니 이자는 나와 친해지려 하는 중인 것 같았다. 공작의 측근인 내게서 정보라도 캐내려고 말이다.
“너처럼 충성스러운 시녀가 곁에 있으니 다행이야. 식사하는 동안에도 공작님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걸 봤어. 공작님껜 그런 사람이 꼭 필요하지.”
너야말로, 그런 걸 다 살피고 있었다고?
이자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나는 발끈하여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하는 말은 모두 내게 배신자다운 음습함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별다른 표정이 없었고, 그의 다부진 체격 때문에 그런 무표정은 좀 무섭게 느껴졌다. 어두운 회랑에 단둘이 있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내 비호감이 표정으로 전해졌을 텐데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 말했다.
“예쁜 얼굴에 비해서 수수하게 입고 다니는구나. 현명한 일이야. 하지만 필요하다면 동부 아가씨들의 장식띠를 선물해주마. 잘 어울릴 듯한데.”
오오, 은근슬쩍 매수를 시도한다.
가우린은 과감하면서 눈치는 없는 남자이거나, 상대가 뭐라고 생각하든 자기가 원하는 건 다 이뤄져야 한다고 믿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으. 싫어.
“저는 계속 공작님을 쳐다보러 들어가야 해서요.”
가우린은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내가 차갑게 말하며 들어가 버리자 나를 다시 막아서지는 않았다.
나는 연회장 안으로 돌아가 음식과 술이 모자라지 않는지 확인한 다음 벽 앞의 내 의자로 가서 앉았다.
카이런 공작의 시선이 나를 스쳤지만, 그는 몹시 자연스럽게 장로들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대화를 이어갔다.
대신 그런 나를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는 체이어스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바람을 쐬려는 듯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가 바람을 쐬러 나갈 복도에 지금 가우린이 있다는 걸 깨닫고 얼른 밖으로 나갔다. 그 방 안에서 시녀의 존재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므로, 나는 조용히 움직이기만 하면 되었다.
내 예상대로 체이어스는 연회장으로 돌아가려던 가우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복도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엿보았다.
“연회가 지루해서 나오셨습니까?”
“체이어스 경.”
체이어스의 말에 가우린은 웃기만 했다.
“기대하던 이야기가 오가지 않아서 실망하신 겁니까?”
그제야 가우린은 체이어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할리사 행정관 때문에 카이런 공작님께서 예민해지셨다는 것은 확실히 알겠습니다. 선대 공작님들 중 기미 시녀를 둔 분은 안 계셨으니 말입니다.”
“아. 그 시녀요.”
체이어스는 지금까지 나를 ‘시녀’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당연하다는 듯 늘 내 이름을 불렀는데 ‘그 시녀’라니, 기분이 몹시 묘했다.
사실은, 좀 불쾌하고 울컥하기도 했다.
그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어쩌면 내가 그를 싫어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를 싫어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책사인 그를 제치고 카이런 공작의 곁을 지키는 내 존재가 반가울 리가 없었다. 겨우 시녀가 말이다.
“혹시 동부에서 그녀에게 추근대기라도 하셨습니까?”
“저는 그녀가 오늘 초면입니다만.”
가우린도, 복도에 숨은 나도 동시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흠 이상한 일이군요. 그녀가 당신을 꽤 싫어하기에 무슨 이유가 있을 거로 생각했습니다만.”
나는 피부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 들어 입술을 깨물었다. 카이런 공작이 내 말을 체이어스에게 전한 모양이었다.
가우린은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의뭉스러운 태도로 물었다.
“저를 말입니까?”
“제가 가우린 님을 지지했음에도 공작님께서 결정을 미루고 계신 것도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가우린은 몹시 낮게 말했다.
“하르펠 성의 주인이 기미 시녀의 말에 휘둘린다는 말씀입니까?”
“설마요.”
체이어스는 양손을 들어 보이며 과장되게 부정했다.
“가우린 님 말대로 공작님께서는 최근에 겪은 일들 때문에 의심이 많아지셨고, 그분 곁에 하루 종일 붙어 있는 시녀가 당신을 싫어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게 다예요.”
체이어스는 연회장 쪽으로 돌아서며 덧붙였다.
“그리고 저는 당신이 동부를 맡기에 적임자라고 생각하죠.”
나는 체이어스가 돌아오기 전에 재빨리 연회장으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조금 숨이 차오르는 듯도 해서 아주 얕게 심호흡을 하며 표정을 관리했다.
내가 방금 본 장면은 몹시 충격적이었다.
체이어스가 나를 싫어하는 줄은 알았지만, 그래도 그에게 악의는 없다고, 그렇게 믿었는데…….
체이어스가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나는 되도록 그와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주의하며 시선을 돌렸지만 심장은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원작의 그는 카이런 공작의 충신이었다. 공작의 책사이자 친구로 끝까지 원작의 끝까지 함께하는 자였다.
그런 인물이 이런 식으로 캐릭터를 배신할 수도 있는 건지, 마치 내가 배신당한 것처럼 분했다.
카이런 공작이 자기 의견대로 나를 곁에서 떼어놓지 않으려 하자 질투를 하게 된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체이어스의 배신에 머리가 얼얼했다. 대체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 틀어지려는 걸까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러는 사이 테이블에서 나를 빤히 보는 체이어스의 시선이 다시 느껴졌다. 나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카이런 공작을 바라보았다.
“아리엘사.”
카이런 공작이 웃는 도중에 나를 불렀다.
갑자기 불러서 순간 당황했지만, 그가 새 술병을 여는 것을 보고 그의 곁으로 갔다. 그사이 가우린도 연회장으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카이런 공작의 옆으로 간 나는 첫 잔을 시음하다가 체이어스와 결국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는 나를 빤히 보며 설핏 웃었고, 나는 그를 바라보며 깨끗하게 비운 잔을 탁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