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33/128)

29화

카이런 공작은 짜증스럽게 말했다.

“시끄럽다.”

“네?”

내가 벌떡 일어나 카이런 공작의 책상 곁으로 가자 그가 말했다.

“시끄럽단 말이다.”

“…….”

하지만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고, 집무실도 조용했다.

창밖에서도 평소보다 더 큰 소음은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창밖을 흘끔 보며 말했다.

“밖에다가 조용히 하라고 이를까요?”

“네가 수놓는 소리 시끄럽다고.”

“…….”

나는 카이런 공작의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냥 쉬고 싶으셔서 트집 잡으시는 거죠?”

그는 펜을 탁 꽂아 넣더니 나를 향해 상체를 돌렸다. 그의 눈썹 선이 유려한 사선을 그렸다 흐트러졌다.

“나를 트집쟁이로 모는 건가?”

불행히도, 아니 다행히도, 나는 지난번 아리엘사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어렸을 적에도 카이런 공작은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으면 아리엘사에게 화풀이를 하곤 했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신경질을 부리고 트집을 잡으면서.

어린 아리엘사를 펑펑 울려서 그녀가 카이런 공작에게 차를 먹이는 데 열중하게 만든 그 사건도 그런 경우였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그런 기억은 없는데…….

카이런 공자도 그날 이후로는 자신을 바꾸려고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게 분명했다. 적어도 아리엘사의 기억은 그랬다.

“…….”

그가 좀처럼 하지 않던 행동을 하는 것은, 그가 실은 아리엘사를 잃었다는 사실을 생각보다 강하게 의식하고 있어서인지도 몰랐다.

나는 몸을 획 돌려서 콘솔 테이블로 갔다. 그리고 옌델 차에다가 꿀을 확 부어서 달게 탔다.

“공작님, 차 드세요.”

카이런 공작은 눈썹을 무섭게 일그러트렸다.

“지금, 차나 마시고 닥치라는 뜻인가?”

“주방에서 꿀을 받아왔어요. 최고급품이래요.”

그는 어이없다는 듯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웃더니 차를 조금 마셨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걸 어디부터 시작해 고문을 해줄까 하는 고민을 선명하게 전달했다.

그러나 차를 마시면서 그의 얼굴은 스르르 부드러워졌다. 꿀을 탄 옌델이 마음에 드는지, 그는 두어 모금을 더 마셨다.

나는 겨우 안도하며 침을 꼴깍 삼켰다.

정말, 아리엘사는 이런 성격을 싫은 티도 내지 않고 다 받아줬던 걸까? 그가 나아지기를 바라며 늘 허브를 기르고 차를 끓이면서…….

어쩌면 북부의 주인이 될 신분으로, 그것도 남달리 뛰어난 능력을 갖고 태어난 그는 처음부터 외로울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친구란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 그에게, 어렸을 적부터 곁을 지킨 시녀 아리엘사가 가장 친구와 비슷한 사람인지도 몰랐다.

내 마음속에는 아리엘사 로크만에 대한 존경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나는 제멋대로인 그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무심결에 뱉고 말았다.

“공작님은 아리엘사 덕에 성장하신 거예요. 그녀의 차 덕분에요.”

카이런 공작의 날카로운 시선이 내게 날아와 꽂혔다. 마치 그가 내게 검을 던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나는 재빨리 내 책상이 있는 구석으로 물러났다.

“드, 드세요. 얼른 더 드세요! 달게 탔어요.”

빨리 단것 먹고 진정하라고요.

그는 아직 뜨거울 차를 한 번에 다 마셔 버리고 탁 소리를 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다행히 내게 덤벼들지는 않았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수틀을 집었다가 그냥 내려놓았다.

이게 어떻게 시끄럽다는 건지.

하지만 그를 쓸데없이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가슴 한구석을 간지럽혔다.

카이런 공작은 아리엘사를 많이 아꼈던 게 틀림없었다.

누군가를 그렇게 아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까칠하고 때론 단호하고 잔인해도 나쁜 사람일 수 없었다. 결국은 그는 남주니까.

땅거미가 깔릴 무렵, 나는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서류들을 뒤적이며 일에 완전히 집중한 카이런 공작은 문이 열리는 걸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

정원에서 나를 찾아낸 카이런 공작은 이를 사리물고 있었다.

망토의 한 팔이 살짝 들린 것으로 보아 그는 검을 붙잡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저 검이 뽑히면, 나와 내 다리는 각자의 인생을 설계해야 한다.

“고, 공작님……?”

나는 멈칫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지만, 이상하게도 당장 몸을 돌려 달아나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막 해가 넘어간 어스름 속에 선 카이런 공작이 한결같이 아름다워서라고 말한다 해도 딱히 반박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그를 잠시 바라보고, 풍등에 불을 붙였다. 그는 나를 지켜보며, 검을 뽑기를 미뤘다.

나는 공중으로 조금 떠오른 등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붙잡고 카이런 공작의 앞으로 가져갔다.

나와 풍등을 번갈아 보는 그의 눈동자는 약하게 흔들렸다.

“아마 저는 바람을 타고 왔을 거예요. 아리엘사도 바람을 타고 갔겠죠.”

“이방인…….”

그의 목소리는 낮고 조금 거칠었다.

“저는 이곳이 점점 좋아지고 있어요, 공작님. 하지만 공작님도 아리엘사도 인사를 나누지 못해서 슬프실 테니까……. 이 등이 바람을 따라서 그 인사를 전해줄 거예요.”

나는 남부로 쫓겨간 카이런 공작이 자신의 죽은 기사들을 그리며 풍등을 날리던 장면을 기억했다. 북부인들은 그렇게 떠난 자를 추모했다.

그때 그는 남부에서 풍등을 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아 핍박을 받아야 했다. 가슴 아픈 장면이었다.

그는 내가 내민 풍등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그리고 짧게 말했다.

“그렇군.”

그새 더 짙게 깔린 어둠 속에서, 붉은 풍등은 점점 환한 빛을 냈다. 카이런 공작은 풍등을 공중으로 가볍게 띄워 올리며 말했다.

“아리엘사. 내 친구여. 어디에 있든지 평안하기를.”

나는 그의 손에서 둥실 떠오른 풍등이 점점 작아지다 사라지는 것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았다.

내가 고개를 내렸을 때, 카이런 공작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마주친 그의 시선은 풍등처럼 아련하고 뜨거웠다.

그때 나는 그가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었으면 했다. 그랬다면 나는 기꺼이 그를 꼭 포옹하여 등을 토닥여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혼자 지고 가는 사람이었다. 늘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러해야 하기에 고개를 돌려 머리를 기댈 자리를 찾지 않는 사람이었다.

곧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한 번 더 바라보고, 몸을 돌려 돌아갔다.

“내일 보지. 아리엘사.”

❄❅❄

카이런 공작이 동부의 장로들을 꺼림칙하게 여긴 이유를 나는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나는 집무실 창으로 그들이 마차에서 차례로 내리는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그 할아버지들은 다들 비슷하게 보였고, 성난 것 같은 격렬한 몸짓으로 무언가를 떠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마차 안에서 말싸움이라도 붙었나 했지만, 가만히 보니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떠들고 있다는 걸 점점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창을 닫았다. 저들이 이 집무실에서 한꺼번에 떠들 걸 생각하면 벌써 무서웠다.

‘졸음이 쏟아지게 하는 허브 차가 뭐가 있더라…….’

나는 일단 먼저 겨울딸기 차를 준비했다. 카이런 공작은 곧 짜증을 가라앉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북부의 수호자를 뵙습니다!”

금방 집무실로 몰려 들어온 네 명의 노인은 차례로 카이런 공작의 손등에 입을 맞추어 인사했다. 마지막으로 인사한 사람은 다부진 체격의 젊은 남자였다.

가우린이었다.

그는 짧은 회색 머리에, 각지고 굳은 얼굴은 무표정했다. 원래 감정이 둔한 사람이라기보다 조심스럽게 자기감정을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장로들 사이에서 자신을 크게 드러내지 않고 말석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카이런 공작에게는 겨울딸기 차를, 손님들에게는 꿀 차를 내놓았다.

꿀 차는 북부에서 귀한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내는 것으로, 공적인 자리에서 관행적으로 내는 차였다. 물론 이것도 카이런 공작이 가르쳐준 것이다.

동부 장로들은 할리사 행정관이 부정을 저질러 수감된 사실을 마치 방금 마차에서 내려서 들은 것처럼 놀라워하며 분노했다.

북부 남자들이 과묵하고 무뚝뚝하다는 인상은 특정 연령대까지만 적용되는 것일까?

어쨌든 그들은 자신들과 할리사 행정관이 아주 먼 사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대단히 열심이었다. 실은 좀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다.

그들은 심지어 착복한 돈이 재난지원금이라는 부분에서 처벌의 가중치가 붙는 바람에, 할리사가 삼 년간 지하 감옥에 수감될 것이라는 말에도 매우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노인이 이 북부의 감옥에서 그만큼을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원작에서 지하 감옥은 악명 높았다. 죄수들은 지하 감옥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영지 북부 끝의 마물을 지키는 방벽으로 가겠다고 자원할 정도였다. 최소한 거기서는 해는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카이런 공작은 내내 온화한 미소를 띠고 그들의 말을 경청했다.

나는 그가 겨울딸기 차를 마시는 속도가 평소보다 빠르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어쨌든 겉보기에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의 오른편에 배석한 체이어스도 퍽 외교적인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억지로 비유하면 멀리서 찾아오신 문중 어른을 모시는 분위기와 비슷했다.

그리고 그의 그런 미소를 보는 나는 소름이 돋았다.

“그러면 그 부정한 자를 대신할 자는-”

“-그것은 내가 숙고하여 결정하겠습니다.”

장로 하나가 은근히 말을 꺼내자 카이런 공작이 싹 잘라버렸다.

그리고 체이어스가 재빨리 말을 채어갔다.

“연회가 준비되어 있으니 내려가실까요? 이번 봄 사냥에 잡은 사슴 고기가 남았습니다.”

“오오, 봄의 첫 수확물이군요. 이렇게 감사할 데가.”

장로들은 서로 눈치를 교환하다가 껄껄 웃으며 일어났다. 나는 카이런 공작과 체이어스의 환상적인 호흡을 보며 감탄했다.

이제는 내가 일할 차례였다. 나는 얼른 일어나 그들을 연회장으로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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