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너는 아직 나를 만족시키지 못했어.
“주방에 이걸 준비하라고 일러.”
카이런 공작은 유려한 필치로 쓰인 메모를 내게 건넸다.
“행정관이나 가신들이 오면 연회를 연다. 그때 준비할 주요리는 매번 아리엘사가 내게 물어서 주방에 전달했다.”
“공작님은 정말 유능하세요!”
나는 들떠서 되지도 않는 찬사를 해버렸고, 그는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북부의 주인이 시녀에게 연회 메뉴를 잘 골랐다고 칭찬받고 싶었을 리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는 쐐기를 박듯 말했다.
“마지막이야. 앞으로는 네가 알아서 준비해.”
“네. 알겠습니다.”
“달려가서 달려와.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내가 잡으러 간다. 나를 그렇게 마주쳤다간-”
“-네, 네. 제 다리를 자르실 거잖아요.”
나는 얼른 문을 닫고 정말로 반쯤 뛰어서 주방으로 내려갔다.
그가 무섭게 굴긴 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사정이야 어떻든 그가 내가 나인 것을 알고서도 나를 미리 챙겨준다는 사실이 싫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동안 이 성안에서 보고 들은 게 있었기 때문에, 음식 준비 말고도 연회장과 식기 준비 따위를 추가로 점검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되도록 유능한 아리엘사가 되고 싶었다.
다만 문제라면 내가 그렇게 해서 맞이할 손님들이었다.
이 연회는 하르펠 성을 방문하는 동부의 장로들을 접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가우린도 딸려오기로 되어 있었다.
이 모임의 공식적인 목적은 할리사 행정관의 횡령 사건 이후 동부의 민심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동부의 장로들은 행정관이자 장로 중 하나인 할리사가 부정을 저질렀으니 대신 사죄하고 부디 다음 행정관을 조속히 지정해달라는 부탁을 할 터였다.
가우린이 그 무리에 섞인 것만 아니라면 문제 될 것 없는 모임이었다.
그러나 모두들 실은 이번 만남이 카이런 공작이 가우린을 선보는, 일종의 면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행정관이 없으면 영지에서 나오는 돈의 흐름이 멈추기 때문에, 모두들 행정관이 빨리 내정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카이런 공작이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를 이대로 행정관으로 임명할까 봐 나는 걱정스러웠다.
내가 집무실로 돌아가자 카이런 공작은 고개를 획 돌려 나를 노려보았다.
“십 초만 더 늦었으면 내가 달려갔을 거다. 그랬으면…….”
“연회장과 식기 준비를 확인하느라 그랬어요!”
내가 재빨리 말하자 카이런 공작은 ‘그건 생각 못 했군.’ 하듯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하던 일을 했다.
세상에.
북부 공작님의 집착을 받는데, 그게 이 정도로 방향이 어긋나 버리면 즐길 수 있는 건더기가 전혀 없었다.
나도 집착남이 주인공인 로맨스 판타지 소설을 좋아했지만, 이렇게 애정은 없이 집착만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은 정말 알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쉬며 내 자리로 돌아가 수틀을 집어 들었다.
수를 놓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카이런 공작이 마치 들으라는 듯 한숨을 푹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