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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31/128)

28화

나는 음식 맛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가슴이 갑갑했는데, 그는 내가 있거나 말거나 조금도 흔들림 없이 편안하고 여유로워 보여서 그도 기분이 상했다.

“저는…….”

내가 입을 열었을 때, 그는 나이프를 놓고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앞으로는 따로 먹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하인들이 이상하게 여길 거예요.”

아까는 카이런 공작이 앉으라고 지시해서 얼떨결에 앉았지만, 공작과 시녀가 마주 앉아서 식사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는 불쑥 말했다.

“내가 네 말이면 무조건 들을 걸로 생각했나, 이방인?”

“…….”

그가 내 속을 훤히 꿰뚫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조금 자포자기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보다 백배 눈치 빠르고 똑똑한 남자를 내가 어쩌겠다고 이러고 있는지…….

게다가 가우린이 이대로 동부의 행정관이 되어 내가 모르는 줄거리로 진행될까 봐 두려웠다. 그러면 내게는 그의 불행을 막을 아무 힘도 없기 때문이다.

아니, 실은 지금 상황 모두에 절망감을 느꼈다. 나는 카이런 공작이 실제로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나댔다간 그는 나를 감옥에 처넣을 터였다. 내가 아리엘사가 아니게 된 순간부터 그가 나를 돌봐줄 이유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상황만은 피하고 싶었다.

내가 시선을 피하자 그는 얄미운 미소를 지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너를 내 기미 시녀로 삼았다고 말하겠어.”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 먼저 확인하는 기미 역할을 맡은 시녀라면 그와 매 끼니를 함께 하는 게 퍽 이상한 광경은 아니었다.

가신들은 그가 돌연 독을 걱정하기 시작한 것을 이상하게 여기긴 하겠지만.

하지만 그것을 대놓고 물어볼 사람은 없었다. 아마 그가 모베일에서 크게 앓은 후에 건강 염려증이 생긴 거라고 알아서들 생각할 것이다. 아니면 의심증이거나.

나는 등잔 불빛보다 더 아름다운 은은한 글로우를 발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아리엘사는 표정이 별로 없었어.”

“네?”

“너처럼 쉽게 웃고, 쉽게 풀 죽으면서 얼굴에 생각을 다 드러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나는 입을 툭 내밀고 대답했다가, 공작이 바로 이것을 지적했다는 생각에 입을 꾹 다물었다.

“네 이름은 뭐지?”

“…….”

그는 부드러운 동작으로 고기를 썰며 그렇게 물었다. 그가 처음으로 나에게 관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별안간 두려움이 밀려왔다.

내가 이 세계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이름을 기억하게 해도 괜찮을까? 원래라면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내가 그의 세계를 오염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리엘사. 그렇게 불러주세요.”

내 대답에, 그는 화가 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얼굴을 했다.

그는 잠시 말없이 나를 노려보다가 시선을 떨구고 식사를 계속했다.

카이런 공작은 이방인 대신 아리엘사를 곁에 두기로 선택한 것이다.

❄❅❄

나는 밤늦게야 방으로 돌아왔다. 방을 뒤져 아리엘사가 전에 쓰던 수틀을 찾아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지금까지는 아침에 나가서 카이런 공작에게 차를 내고, 집무실을 정리하고, 손님맞이나 식사 준비를 했다. 그리고 비교적 이른 시간에 돌아와 온실을 돌보거나 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카이런 공작은 자신이 잠자리에 들 때까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낼 일이 절실해졌다.

다행히 나도 십자수 같은 걸 즐겼기 때문에 수라도 놓으면서 낮 동안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또 집무실에서 자다가 체이어스의 눈에 띄면 좋은 소리가 안 나올 게 분명했고 말이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체이어스 경.”

내 방문 앞에 서 있는 것은 체이어스였다. 그는 나를 보더니 마치 자기 방인 양 먼저 들어갔다.

나는 그를 따라 들어가 딱딱하게 말했다.

“체이어스 경, 지금은 시간이 늦었는데…….”

“흠…….”

그러나 체이어스는 팔짱을 끼고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키 큰 남자가 코앞에 서서 그렇게 노려보는 건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많이 건방져졌네. 아리엘사.”

“그게 아…….”

아리엘사라면 이럴 때 절대 따지고 들지 못했을 거다. 그래서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또한 그와 싸웠다가 게오르그를 화나게 하면 일이 정말 복잡해졌다.

“조심하겠습니다.”

내가 고개를 숙인 채 물러나자 체이어스도 인상을 조금 폈다.

“네가 아팠을 때 공작님께서 테플 버섯을 내주셨다지? 그걸 먹고 이렇게 성질을 부릴 힘이 난 거니?”

지금 버섯으로 질투하는 거야?

체이어스 경이 이렇게 치사한 인간이었다니, 나는 경악했다.

하지만 나는 꾹 억누르고 최대한 소심하게 대답했다.

“아……. 아빠가 버섯 이야기를 하긴 하셨는데…….”

“…….”

하지만 그가 이 밤에 나를 찾아온 것은 그것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이유를 곧 알 수 있었다.

낮에 그가 나를 집무실에서 내보내려 했을 때, 카이런 공작이 막았다. 체이어스는 그때 지었던 표정을 지금 짓고 있었다.

“아리엘사.”

“네. 체이어스 경.”

“나는 네가 공작님께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

귀신같은 놈.

체이어스는 오늘 카이런 공작의 심란한 심경을 알아채고는 그게 나와 관련이 있다고 의심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문득, 내가 가우린에 대해 말하는 걸 문밖에서 들었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네가 정무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고. 넌 시녀다. 네가 게오르그 경의 딸이라고 해서 그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아리엘사.”

나는 체이어스를 똑바로 올려보았다.

시녀가 공작의 뒤에서 영지 정무에 간섭하는 건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다. 맞긴 하는데…….

“지금 질투하세요?”

“하……!”

체이어스는 팔짱을 풀며 뒤로 한 발 물러났다.

특히 이 남자만 만나면 내 아리엘사 연기는 위태로워졌다. 조금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카이런 공작님이 시녀가 뭐라고 한다고 들으실 분인가요? 체이어스 경은 공작님을 겨우 그 정도 남자로 보시는 건가요?”

“…….”

체이어스는 나를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나는 울고 싶은 심정으로 치마 뒤에서 주먹을 꼭 쥐었다.

이건 전쟁이다. 내가 방금 시작해버린 전쟁.

“저도 체이어스 경만큼이나 공작님을 아껴요. 왜 그걸 인정 못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그는 나를 바라보며 침음을 흘렸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보니 충격이 크긴 큰 모양이었다.

그는 어떤 여자가 막말을 한다고 흔들릴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 어떤 여자가 아리엘사라는 게 문제인 것 같았다.

나는 여세를 몰아 단호하게 말했다.

“밤이 늦었어요. 이만 돌아가 주셨으면 좋겠어요.”

체이어스가 내 방문을 쾅 닫고 나갔을 때 나는 긴장이 풀려 침대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침대에 엎드려 발을 동동 굴렀다.

“어떡해! 나 이제 죽었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뒤로 체이어스는 나를 철저히 무시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그렇게 노력하는 게 보였다. 사실 그게 더 무서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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