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나는 차를 타서 소파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고고하고 냉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신은 절대 웃은 적이 없는 것처럼.
이중인격자.
나는 카이런 공작을 찻잔 위로 흘겨보며 차를 마셨다. 그 순간에 나는 비통했다. 내가 내 남주 카이런 공작을 미워하게 되는 건 상상도 못 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를 바라보던 그가 말했다.
“기분이 이상하군.”
“네?”
“아리엘사는……. 아리엘사의 얼굴을 하고 말도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행동도 멋대로 하는 여자를 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해져.”
멋대로까지야…….
하지만 그의 얼굴은 몹시 차분했고, 내게서 피하듯 돌리는 시선은 슬픔을 숨기고 있었다. 겉으로는 나를 놀려먹고 있었지만, 그는 아리엘사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마음이 갈대 같은 나는, 카이런 공작을 미워하기로 한 계획을 바로 취소했다. 오히려 그가 안쓰러워졌기 때문이다.
나는 화제를 돌리려 말했다.
“아깝네요. 술 취해서 실수만 하지 않았다면 공작님을 내내 속일 수 있었는데.”
“설마.”
그는 코웃음 쳤고, 나는 다시 조금 기분이 상했다.
“공작님은 제가 사다리 병이라고 믿고 계셨던 거 아니에요?”
“아니.”
“에에.”
내가 야유했지만 그는 털끝만큼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냥 네가 미쳤다고 생각했어. 떨어져서 머리를 다쳐서. 게오르그를 동정했지.”
“세상에.”
나는 두 손을 공중에 휘젓고는 무릎 위로 털썩 떨어트렸다.
“그다음에는…… 믿기를 거절했지.”
우리의 시선은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만났다.
그는 나를 그날의 밤하늘처럼 검고 감정 없는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가 허세를 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공작님은 확실한 것만 믿으려 하시니까요.”
“그래.”
그는 미간을 조금 찌푸리며 순순히 대답했다. 이방인이자 침입자인 내가 자신을 안다는 사실에 옅은 불쾌감을 느끼는 듯도 했다.
“내가 사과파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미래의 이야기인가?”
“맞아요.”
그는 그렇군, 하고 중얼거리며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여전히 창밖을 응시하는 채로 말했다.
“오로라를 보고 감탄하는 북부인은 아무도 없어. 아리엘사.”
“네?”
그는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너의 음유시인이 오로라에 얽힌 불길한 전설은 이야기하지 않던가?”
“아……. 네.”
내가 읽고 잊어버렸는지, 작가의 설정 속에만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당혹스러웠다.
모베일로 가는 북부의 숲에서 그와 함께 바라보았던 오로라는 죽어도 못 잊을 절경이었는데. 행복했는데…….
나는 몹시 불만스러운 눈으로 나의 추억 파괴자를 바라보았다.
아마 하르펠령에서 그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없겠지만,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차라리 정체를 들키고 나니 더 홀가분했다.
“너는 모든 일이 아니라 내게 일어날 사건에 대해서만 아는 거야. 그렇지?”
그의 예리한 지적에 나는 흠칫 정신을 차렸다.
“맞아요.”
“그래서, 다음에는 나를 무엇으로부터 구해줄 생각이지?”
“…….”
나는 망설이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동부의 새 행정관. 너는 누가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에 신경을 썼어. 맞나?”
이 남자, 얼마나 예리한지 아주 베이겠다.
나는 아리엘사를 마냥 받아주던 심심하고 무른 카이런 공작과 북부의 주인으로서의 카이런 공작이 얼마나 다른 인간이지 다시금 깨달았다.
“가우린은 안 돼요.”
“어째서?”
나는 말을 아껴야 했다.
“모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에요.”
“미래에 잘못할 거란 얘기군.”
“네. 분명히.”
“나는 동부의 장로들을 행정관으로 쓸 생각이 없어. 내 할아버지 때부터 행정관을 지낸 자들이라 모든 걸 그때 기준으로 생각해.”
이 세계에도 ‘꼰대’가 있다니 신기했다.
“가우린은 젊고 능력 있으면서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자야.”
하지만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그 젊음과 능력으로 당신의 기사 대부분을 죽인 장본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가 제거하려 했던 롬니 행정관이 지금 자리를 지키며 포슬란의 곡식창고를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가우린의 역할이 달라질 수는 있었다.
하지만 절대 배신자가 충신이 되지는 않을 터였다.
그는 잠시 창밖을 보며 고민하더니 말했다.
“내가 네 정체를 몰랐다면, 내가 그를 행정관으로 임명하는 걸 어떻게 막을 생각이었지?”
“비밀이에요.”
나는 슬쩍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사실은 아무 대책이 없었다. 지금까지도 다 임기응변이었는걸!
내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외면하자 그는 ‘흠.’ 하더니 일어났다.
“네 정보는 네가 원할 때만 흘리겠다는 것이지?”
“저도 살아야 하니까요.”
그는 나를 향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빛을 내는 남자가 환하게 웃는다. 정신이 혼미했다.
“과연 그게 좋은 선택일까?”
차가운 위협에 나는 정신을 퍼뜩 차렸다.
“무슨 말씀이시죠?”
하지만 그는 모른 척 딴소리를 했다.
“훗. 게오르그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 넌 아리엘사에 비해서 너무…….”
“너무?”
“엉성해.”
책상으로 돌아간 그는 그때부터 나를 싹 무시했다.
하!
나는 그를 흘겨보다가 창가의 내 자리로 가서 털썩 앉았다.
흥미롭고 설레던 북부의 생활이 무거운 현실이 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앞으로 카이런 공작 앞에서는 아리엘사인 척 연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다행이었지만, 그가 경고한 대로 긴장이 풀려서 다른 사람 앞에서 실수할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느 하나 쉬운 게 없다.”
나는 울적하게 중얼거리며 창밖을 바라보다가, 겨울딸기 차를 한 잔 더 타서 마셨다.
나는 어느 틈엔가 엎드려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러다 카이런 공작과 체이어스가 대화하는 소리 때문에 눈을 떴다.
“그러면 가우린을 불러들이겠습니다. 다른 행정관들도 부를까요?”
체이어스의 질문에 카이런 공작이 대답했다.
“아니. 이 모임의 목적은 장로들을 불러 의견을 듣는 거야. 차기 행정관에 대해서는 내가 여전히 고민 중에 있다는 걸 알게 해.”
“알겠습니다. 공작님.”
내가 무슨 차를 낼까 물어보러 다가가자 체이어스가 놀라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방 안에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아리엘사. 잠시 나가 있어라.”
“네. 체이어스 경.”
내가 돌아서자 카이런 공작이 자르듯 말했다.
“아리엘사, 옌델 차 있나?”
그것은 나더러 나가지 말라는 뜻이었다. 체이어스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네. 공작님. 준비하겠습니다.”
나는 재빨리 대답하고 콘솔 테이블로 돌아갔다.
카이런 공작은 무심한 얼굴로 하던 말을 계속했고 두 사람은 영지의 공무에 관해 여러 가지를 논의했다.
나는 옌델 차를 두 잔 타서 내주고 자리로 돌아왔다.
마음이 너무 복잡했다.
대화를 들어보니 카이런 공작은 가우린을 불러서 일종의 면접을 볼 모양이었다.
그가 내 말을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인지, 내 정체를 들키는 바람에 도리어 설득력을 잃게 된 것인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체이어스는 몇 가지 논의를 더 거친 다음 돌아갔다.
나는 찻잔을 치우러 카이런 공작의 테이블로 다가가서 침울하게 말했다.
“가우린을 불러들이신 건가요?”
서류를 들여다보던 카이런 공작은 매서운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지금, 시녀가 정무에 간섭하는 건가?”
“아닙니다! 공작님.”
나는 찻잔을 치우고 내 자리로 돌아갔다. 창틀에 턱을 괴고 멀리 보이는 숲을 바라보아도 가슴이 너무 갑갑하기만 했다.
밖에 나가 바람이라도 쐬고 싶었지만 집무실을 벗어나지 말라는 그의 명령에 그럴 수도 없었다.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카이런 공작이 내 빙의를 인정했다고 하지만, 그래서 그가 내 말을 다 믿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그는 결코 다른 사람의 말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걸 깨닫고 나니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제부터 그의 불신을 어깨에 진 채로 그를 도와야 하는 것이다.
내 작은 책상에 엎드려 잠들었던 내가 눈을 떴을 땐, 이미 석양이 깔리고 있었다.
‘공작님 저녁 식사!’
식사 준비를 시작할 때가 조금 지나버린 탓에, 나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내 등에 걸쳐져 있던 망토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카이런 공작의 것이었다.
어느 틈에 와서…….
나는 그의 망토에 묻은 먼지를 털며 책상에 앉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벌떡 일어나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미동 없이 일하고 있었다.
내 정체가 들킨 뒤로 그는 나를 사냥감을 노리는 늑대 같은 눈으로 보고 있었다. 만날 죽인다는 소리나 하고.
그런데 잠든 내게 망토를 덮어준 건 그는 나를 잠깐 아리엘사로 착각한 걸까.
고맙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한, 복잡하기 짝이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내가 주방에 내려가서 식사 준비를 지시하겠다고 말하려고 일어났을 때, 하녀가 들어왔다.
그녀는 트롤리로 이인분의 식사를 들여와 테이블에 차리고 갔다. 카이런 공작은 종종 그러듯이 체이어스와 저녁을 함께 들기로 한 모양이었다.
나는 땅거미가 깔리는 창밖을 보고 식탁과 방 안에 등잔을 켰다.
그는 하녀가 나가자 테이블 맞은편을 턱짓하며 말했다.
“먹어.”
“……네?”
“이제부터 식사는 하녀가 시간에 맞춰 가져올 거야. 너는 내 집무실 시중만 들면 돼.”
내가 주방에 혼자 내려가는 것도 허락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비밀은 지켜요. 제가 떠벌리면 오히려 사람들이 아리엘사가 미쳤다고 할걸요?”
내가 한숨을 쉬며 말했지만 그는 못 들은 척했다.
나는 식기의 뚜껑을 연 다음 카이런 공작과 마주 앉았다. 이따금 일렁이는 등잔불에 드러난 그의 얼굴은 완벽했다.
심지어 그는 식사할 때도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다. 음식을 묻히거나 흘리지 않았고, 씹는 모습마저 우아했다.
아주 가끔 자신을 바라보는 내게 무슨 경고라도 하듯 시선을 던졌는데 그러면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