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나는 침묵이 버거워 어색하게 말했다.
“버섯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한 거라고 들었어요.”
“게오르그 때문이야.”
“네.”
나도 이제는 그의 화법에 익숙했다.
그리고 카이런 공작도 문득 얼굴을 굳혔다.
내가 그의 화법에 이미 익숙하다는 사실은 내가 그를 그만큼 오래 속여왔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내 입장이 어떠했건 그에게도 받아들이기 버거운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속여서 죄송합니다.”
카이런 공작은 나를 응시했다.
그는 아리엘사를 잃고 절망과 슬픔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나를 원망하지 않을 정도로는 어른이었다.
그 사실이 다행스럽고 또 조금 고맙기도 했다.
“저쪽 세계라고 했나?”
“네…….”
“그곳은 어떤 곳이지?”
“음…….”
나는 조금 당황했다. 내가 사는 세상을 설명해보라는 질문은 들은 적이 없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해야 하는지…….
“많이 발달한 곳이에요.”
“발달?”
“차도 많고 아파트도 많고……. 상하수도도 잘 갖추어져서 물을 틀면 늘 온수가 나와요. 가공식품도 많아서 음식을 저장하는 게 어렵지 않고, 겨울에도 과일을 먹을 수 있고, 또…….”
“황실에서는 마석을 활용해서 온수를 사시사철 쓴다더군. 마석을 고작 그런 데다…….”
그는 마법을 혐오했다. 마석을 빼앗기 위해 마물 하나를 죽이는 데 어떤 희생이 따르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얻은 마석을 겨우 물 끓이는 데 사용한다는 건 그의 입장에서는 모욕적인 일일 것이 분명했다. 말끝을 흐린 건 많이 자제한 것일 터다.
“차라고 했나?”
“혼자 굴러가는 마차요. 마석을 쓰는 건 아니고 특별한 연료가 필요해요.”
“특별한 연료?”
“일종의 기름인데, 지금 기술로는 얻을 수 없어요.”
“어째서?”
“공작님의 강철 검은 얼마나 귀한 거죠?”
그는 자기 검이 놓인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뻐기듯 말했다.
“제국에 몇 자루 없지.”
“그런 강철로 집을 지을 수 있을 만큼 물자가 풍족하고 각종 기술이 발달해야 하거든요.”
물론 그것은 천년 후라면 모를까, 이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소파 깊숙이 등을 기대고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생각보다 쓸모가 없군. 너는.”
그게 그렇게 되요?
좀 억울했지만 나는 현대의 기술을 함부로 전파에서 이 세계를 오염시킬 생각은 없었다.
나는 입을 툭 내밀고 말했다.
“목숨을 구해드렸는데도요?”
“내 운명의 여자가 있다면서. 내가 아직 그녀를 만나지 않았으니 죽지도 않을 것 아닌가. 네 말에 따르면 말이야.”
나는 뚱한 채로, 조금 웅얼거리듯 말했다.
“그분을 안전하게 만날지, 엄청나게 힘든 상황에서 만날지는 제 도움으로 바뀔 수 있을 텐데요.”
“내가 안전하지 않단 말인가?”
나는 결정을 해야 했다. 내 정보를 얼마나 공개할지는 내 생사가 걸린 중요한 문제였다. 일단은 되도록 적게 말하는 것이 나을 터였다.
“제가 미리 말씀드리면 미래가 다 변할 거예요. 공작님께서 완전히 다른 선택들을 하실 테니까요. 그러면 제 지식도 아무런 쓸모가 없어지겠죠.”
그는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자꾸 너를 아리엘사로 착각하는군. 좋아. 영리한 선택이야.”
그 말을 들으니 오히려 소름이 끼쳤다. 내가 아는 걸 술술 말했다면 그는 날…….
나는 그 생각을 털어내기 위해 고개를 휘휘 저었다.
“내 미래를 안다고 했지,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물론 곧이곧대로 대답할 수는 없었다.
“음……. 그런 걸 알려주는 사람이 있어요.”
내가 말을 고르는 사이 그가 차를 홀짝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남의 삶을 훔쳐보다니. 네 세계 사람들은 다들 너처럼 양심이 없나?”
이것은 생각 못 한 반격이었다. 그러나 그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받아들여지는 것도 당연했다.
“죄, 죄송합니다. 훔쳐본 건 아니고 활자로 읽은 건데, 저도 이쪽 세계가 실재하는 줄은 몰랐어요. 하지만…….”
“하지만?”
“감동적이었어요. 어떤 사람의 삶은 감동을 주거든요. 제 세상 사람들은 그런 감동을 좋아해요.”
“감동? 아, 내 연애 말인가. 훗.”
카이런 공작은 작게 비웃으며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이제야 알게 된 사실인데, 그는 이성적인 부분에는 대단히 냉소적이었다. 마치 자신에게는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고 믿는 사람 같았다.
우리 남주 심각하지 않은가. 까칠한 성격은 북부 공작의 기본 설정값이라고 생각했는데, 심지어 사랑을 불신하는 남자였다니.
하기는, 그래서 우리 여주가 위대한 거다. 저런 남주를 목숨 건 사랑꾼으로 만든 여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작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시면 안 돼요.”
순식간에 험악해진 그의 시선이 내게로 건너왔다.
“네가 내게 지시할 입장이라고 생각하나? 이방인.”
이방인. 마물보다는 훨씬 나은 말이었다. 객관적으로도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퍽 섭섭하게 가슴에 내리꽂히는 말이기도 했다.
그는 조롱하듯 말했다.
“다시 말하면, 네 세계의 음유시인들은 남의 인생을 적당히 포장해서 팔아먹는 사기꾼들이군. 너는 나를 여자에게 정신 못 차리는 모자란 놈으로 보며 즐거워했고.”
헉. 그게 그렇게 돼?
“나중에 그녀를 만나면 제 얘기가 무슨 뜻인지 단박에 아실 거예요.”
나는 몹시 단호하게 말했지만 카이런 공작은 그냥 무시해버렸다. 그는 자기 안위와 관련된 정보 말고는 관심이 없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네?”
“그래서 내 사랑이 너에게 왜 중요하지? 그걸 위해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지키려 든다고?”
그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도 내가 자신을 위해 진심이었다는 사실만은 인정하는 게 틀림없었다. 조금 안심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카이런 공작은 바로 냉정하게 경고했다.
“감동 이야기는 그만해.”
그 얘기를 내 입으로 하려니 몹시 민망해서, 나는 내 무릎의 치맛자락을 조금 꼬집었다. 기가 죽어 조금 웅얼거리며 대답했지만, 그것은 내 진심이었다.
“공작님이 행복해지시는 걸 보면 저도 행복해지니까……. 우리는 행복해지고 싶어서 사는 거잖아요. 삶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하고요.”
“…….”
카이런 공작은 나를 더 추궁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좋아. 네가 나를 여러 번 살린 것은 인정해. 차 맛도 최근에 더 좋아졌어.”
“…….”
“네가 나를 죽이길 원했다면 기회는 많았을 거란 것도 인정하지.”
“감사합니다.”
그는 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가 잠시나마 속았다는 걸 참을 수가 없어.”
“그건 죄송하다고…….”
“앞으로 너는 네 방과 내 집무실 두 장소만 오가야 한다.”
“하, 하지만-”
“-내 조치가 부당하다고 생각하나? 지하 감옥이 더 좋은가?”
절대! 나는 하르펠 성의 지하 감옥이 어떤 곳인지 이미 읽어서 알고 있다. 절대 실제로 체험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오! 그게 아니라, 온실의 허브도 솎아야 하는데…….”
“내 감시하에서만 이동해.”
이럴 때는 알았다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당분간 시키는 대로만 하면서 그의 믿음을 사는 것이 중요한 상황이었다.
“알겠습니다. 공작님.”
내가 불퉁하게 말하자 카이런 공작은 거실 중앙 쪽을 눈짓하며 말했다.
“그거 해봐.”
“네?”
“네가 정원에서 하던 것 말이야. 그게 정말 주술이 아니란 걸 확인시켜줘야겠어. 네가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 내가 그런 걸 얼마나 싫어하는지도 알겠지.”
안다. 그는 마물을 혐오하고 마석에 대한 권력자들의 탐욕에 진저리 쳤다. 그래서 하르펠 성에선 마법이 금지인 것은 물론 북부 전체에도 마법사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아…….”
나는 입을 쩍 벌린 채 잠시 얼어붙었다.
카이런 공작은 내가 처음으로 당황하자 몹시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심지어 만족하는 기색으로 소파로 등을 기대며 다시 찻잔을 집어 들었다.
한 손에는 잔 받침을 받쳐 들고 다른 손에는 찻잔을, 긴 다리를 꼬고 나를 바라보는 그의 비웃음은 정말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그가 나를 괴롭히는 상황만 아니라면 나는 그 모습을 정말로 즐겼을 것이다.
“운동한 거예요. 공작님께서 사냥하면서 몸을 푸시듯이 저도……. 정말 별거 아니라고요!”
하지만 카이런 공작은 씨도 안 먹힐 변명하지 말라는 얼굴이었다. 나는 헛헛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은 내게 수치심을 안겼어.’
나는 자리에 서서 뒤꿈치를 들썩들썩하다가 구령을 붙이며 가볍게 뛰기부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아니. 그게 아니야.”
“네?”
“넌 그렇게 하지 않았어. 주문을 외고 있었단 말이다.”
“아……. 그거요.”
나는 한숨을 푹 쉬고 청소년 체조 음악을 입으로 불러주었다.
“빰빠라빠빠 빰빠빠…….”
나는 울상을 한 채 말했다.
“청소년 체조오 가볍게 뛰기부터 시이작! 이렇게 하면서 운동하는 거예요. 팔운동, 팔다리운동 하고요. 취기도 오르고 춥기도 해서 몸을 풀어야 했다고요.”
하지만 나를 삐딱하게 바라보던 카이런 공작은 인상만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 바보 같은 몸짓이 다라고?”
나는 한숨을 푹 쉬고 대답했다.
“네. 이게 다입니다.”
“시시하군.”
내가 별거 아니라고 했잖아요!
나는 허탈함에 공작의 앞임에도 웃고 말았다. 그리고 스르르 걸음을 옮겨 콘솔 테이블로 갔다.
카이런 공작에게 열심히 먹이던 겨울딸기 차가 오늘은 내게 절실하게 필요했다. 심신을 진정시키고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는 차가.
나는 차를 타는 도중에 내 뒤에서 작은 소음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카이런 공작은 아까와 똑같은 모습으로 내가 타준 시나몬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웃음소리 같았다. 카이런 공작이 잔뜩 억눌러서 풉 하고 숨을 뿜은 소리 말이다.
내가 겨울딸기 차를 타고 있을 때, 다시 작은 ‘풉’ 소리가 났다. 제기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