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게오르그 경. 감기 몸살이 심한 거야. 죽을병 아니니까 나가서 바람이나 쐬고 오시오. 기사들이나 굴리던지.”
의사가 핀잔을 주자 체이어스가 이마에서 손을 떼고 발끈했다.
“선생은 지금 기사단의 폭동을 사주하고 계신 겁니다!”
게오르그가 평소에 기사들을 얼마나 가혹하게 훈련했으면 저런 말이 나오는지.
북부 남자들 무섭다.
북부 남자들 무섭지…….
나는 어젯밤 카이런 공작의 모습이 떠올라 눈을 감아버렸다.
아아……. 아침에 집무실로 오라고 했는데.
그는 지금 검을 들고 내 방으로 오고 있을까? 내 다리를 자르러.
“흑…….”
“아리엘사, 많이 아프니! 못 견디겠니? 선생님, 어떻게 좀 해보라고요!”
게오르그가 고함을 질러대는 통에 나는 귀가 아파 인상을 썼다. 그는 그걸 보고 더 흥분해서 고함을 질렀다.
“어허, 정말!”
의사 선생도 마침내 짜증을 내고, 참다못한 체이어스가 ‘게오르그 경!’하고 불렀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공작님.”
세 사람은 방 안에 나타난 카이런 공작을 동시에 불렀고, 나는 이를 덜덜 떨었다.
게오르그는 그런 나를 보고 하늘이 무너지는 얼굴을 했지만, 카이런 공작은 나를 향해 매우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때로 퍽 따뜻한 미소를 지을 때가 있었다. 그때야말로 카이런 하르펠이 가장 위험한 순간임을, 그의 가신들은 알고 있었다.]
하필 그때 내 머릿속을 스치는 원작의 한 구절. 나는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그의 가신들은 지금이 그런 순간이라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오히려 다들 바보같이 감동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 아빠! 게오르그! 어떻게 좀 해보라고요!’
카이런 공작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채로 퍽 인자하게 말했다.
“아리엘사가 아프다기에 와 봤어. 방이 비좁군.”
게오르그는, 심지어 감동한 눈으로 말했다.
“어릴 때부터 튼튼한 것 말고는 장점이 없는 놈이었는데, 이렇게 민망할 데가……! 공작님을 여기까지 오시게 하다니 죄송합니다.”
“그런 말 말아, 게오르그 경. 아리엘사는 동부에서 나를 밤새워 열심히 간호해줬어. 아니, 어느 시점까지만. 하지만 하는 동안은 열심히.”
‘닥쳐요. 제발.’
나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눈을 이글거리는 카이런 공작에게서 시선을 피하게 위해 이불을 끌어당겼다.
그사이 게오르그와 체이어스, 의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방을 비워주었다.
나는 그들을 붙잡고 싶었지만 그런 것은 불가능했다.
방 안에 우리 둘이 남겨지자, 카이런 공작은 내 작은 나무 의자에 앉아 긴 다리를 꼬고 등을 기댔다.
“오면서 고민했다. 아리엘사.”
그의 말투와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다. 그래서 더 소름이 돋았다.
“네 다리를 자를까, 머리를 자를까……. 하지만 막상 이런 꼴을 보니 곤란하군. 나는 내 말을 주워 담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흠. 앞으로 네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가르치려면 퍽 귀찮겠군.”
‘가르치지 마!’
나는 정신적인 고함 끝에 울먹이며 대답했다.
“하, 하지만, 지금 제가 아파서, 제가 안 가려고 한 게 아니고, 열이 나고 몸이 움직이지 않아서…….”
“나는 치료했으면서 자신은 치료할 수 없었나?”
나는 울음을 삼키며 이불 속에 숨어서 대답했다. 정말로 서러웠다.
“그때 만든 약은 공작님께 다 써서……. 흐흐흑.”
나는 당신이 검에 흘린 살기 때문에 튼튼한 게 유일한 장점인 이 몸의 면역력이 무너진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열이 올라 있으니 더 쉽게 서러워졌고 눈물도 금방 났다.
내가 훌쩍거리기 시작하자 카이런 공작은 이마를 잔뜩 찌푸렸다. 그에게 나를 동정하는 기색은 먼지만큼도 없었다.
하기는, 원작에서 그가 적을 어떻게 대하는지, 자신을 멸시하고 이용했던 여주 집안의 가신들을 어떻게 응징했는지를 떠올리면 이건 시작도 안 한 것이었다.
그는 꼬았던 다리를 탁 내려놓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훌쩍 큰 키로 나를 내려다보며, 그는 웃고 있었다.
“좋아. 딱 한 번만 봐주지. 앞으로 내 허락 없이 아프면 벌을 내릴 줄 알아.”
“……네?”
“사흘 주지. 그 안에 아픈 것 마치고 집무실로 와.”
“헉…….”
카이런 공작은 대답은 필요 없다는 듯 나가버렸다.
방금 막 약을 먹었는데 이런 얼토당토않은 위협을 듣고 나니 몸이 침대를 파 내려가며 푹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뭐라고? 허락 맡고 아프라고? 자기가 정한 기간만 아프라고?
그는 아마 내가 며칠 전에 앓아누웠다면 내가 아픈 줄도 몰랐을 것이다. 체이어스나 발끈했을 것이고.
그런데, 지금은 이 인간이!
하지만 입으로는 다른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마도 생존 본능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작님……. 흐흐흑.”
나는 그렇게 울다가 잠들었다.
세상이 무너진 게 이런 기분일까. 내 남주가 나를 구박하니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의사의 약이 잘 들어서 그런지, 아니면 게오르그의 말대로 내가 타고난 강골이어서 그런지, 한잠을 푹 자고 나니 열이 떨어졌다.
하지만 미열과 오한으로 계속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게오르그는 내게 상한 맛이 나는 버섯죽을 먹여주며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잡담을 주절거렸다. 그는 내가 회복해가니 안심해서 조금 들뜬 것 같았다.
그러나 실은 카이런 공작은 나를 죽이려고 죽에 독을 탄 게 틀림없었다. 이 정체불명의 여자를 귀찮게 감시하느니, 마침 아플 때 죽여서 걱정거리를 없애기로 한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음식에서 이런 맛이 날 수는 없었다.
게오르그는 사정도 모르고 주절댔다.
“공작님이 얼마나 감사한지. 그 귀하다는 버섯을 내주셨다. 많이 많이 먹어둬.”
하지만 나는 지금이야말로 게오르그에게 사실을 고백하고 작별인사를 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는 정말 공작님께 감동했다. 다들 그분이 괴팍하다고 말하지만 하르펠가는 예로부터 가신들을 대하는 데는 온정이 있었다.”
진실과 눈곱만치도 관계가 없는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나는 그저 힘들고 다 싫어서 울상을 지었다.
“흑…….”
“아리엘사, 왜? 왜 그러냐, 또 아프냐?”
“아니에요. 아빠.”
“그런데 왜 울어?”
“공작님께 너무 감사해서요. 흑.”
“이놈……. 착하기는.”
짜증이 나서 죽어버릴 수 있다면 그 순간에 나는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짜증으로는 사람이 죽을 수 없는 게 분명했다.
나는 계속 입을 벌리고 죽을 꾸역꾸역 받아먹었고, 게오르그는 몹시 행복해 보였다.
한 사람이라도 행복해서 다행이었다.
❄❅❄
나는 정확히 사흘 후 아침, 침대에서 나와 깨끗이 씻고 단장했다. 타고난 체질인지 그 이상한 버섯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생각보다 빠르게 회복했다.
카이런 공작의 집무실로 가기 위해, 나는 일부러 피가 묻어도 티가 잘 나지 않을 칙칙한 색상의 드레스를 골라 입었다.
그것은 게오르그를 위한 배려였다. 딸의 시신이 최대한 덜 끔찍해 보이게 하려는 마지막 배려 말이다.
나는 그만큼 비장한 각오로 카이런 공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공작님.”
책상에 앉은 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평소 같은 행동이었다.
그가 그러니 나도 평소처럼 행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차를 낼까요?”
여전히 답이 없었지만, 이런 때엔 차를 타는 것이 정답인 것 같았다.
그는 콘솔 테이블로 가는 내 뒤에다 몹시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
“그렇게 해. 내 개 같은 성격을 죽이려면 아침에는 차가 필수거든.”
나는 팔다리가 다 뻣뻣해져 그 자리에 서고 말았다. 입술이 달달 떨렸다.
‘이런 건가…….’
로맨스 판타지는 남녀 주인공들의 로맨스 시점에서 벗어나면 그냥 판타지였던 것이다.
거칠고, 잔혹한, 이세계.
자체 발광 카이런 공작은, 학원 시험도 나 몰라라 하고 나를 잠 설치게 했던 내 최애 남주는, 여주 앞이 아닐 때는 이런 성격파탄자였다.
그리고 그는 그 재능을 나에게 아낌없이 쏟아붓기로 했다.
내 계획은 수정되어야 했다. 카이런 공작을 지키고 나도 안전하도록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내 이전 목표였다면, 앞으로는 내 생존이 우선하는 목표였다. 어쩔 수 없었다.
멍한 생각에서 빠져나와 차를 고르는데 무언가가 뒤에 다가온 느낌이 들었다.
“앗!”
내 뒤에 나타난 카이런 공작은 내 몸을 훅 돌리더니 내 턱을 쥐어 자기 얼굴 가까이 당겼다.
그는 내 얼굴을 마치 뜯어먹듯 바라보았고, 나는 눈을 꼭 감고 버텼다. 나는 콘솔 모서리를 꼭 쥐고 몸의 균형을 유지해야 했다.
그는 낮고도 사납게 말했다.
“완벽하군. 아무리 봐도 아리엘사야.”
“아, 아리엘사니까요. 그녀의 몸이에요.”
“흠…….”
그는 길게 한숨을 쉬고 내게서 물러났다. 그리고 괴로운 표정으로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을 쓸어 올렸다.
나는 그제야 내가 공포에 사로잡혀서 그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이해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그도 아리엘사를 잃은 것이다. 유일하게 다정하게 대했던 소꿉친구를.
그렇게 생각하자 그에게 붙잡혔던 턱이 얼얼한 기분은 곧 잊혀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유감이에요. 착한 아이였는데……. 공작님을 진심으로 아꼈고요.”
“내게 여동생이 있다면 그 애 같았을 거야.”
그는 나를 등진 채로 중얼거리고 소파에 앉았다.
나는 문득 그가 어젯밤 정원에서 ‘나의 아리엘사’라고 말한 걸 떠올렸다. 그녀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그의 사랑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카이런 공작은 아리엘사를 잃었다는 사실에 깊이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의 침묵은 이상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숲에 퍼지는 나무꾼의 도끼질 소리처럼 사람의 마음을 멀리까지 울렸다.
“공작님 차 드세요.”
나는 시나몬 차를 그의 앞 테이블에 조심스럽게 올려두었다.
하얗게 김이 오르는 갈색 차를 물끄러미 보던 그는 나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