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7/128)

24화

어린 아리엘사는 통곡하고 있었다. 내가 겁에 질린 상태라서 앞뒤 상황이 차근차근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카이런 공자가 심하게 성질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울면서 카이런 공자를 원망하고 있었다.

“흑흑, 공자님은, 흐흐흑, 정말, 성격이 나빠요. 그건 공자님 몸이 차가워서 그런 거니까, 흑, 차를 많이 드셔야 해요!”

돌아가신 선대 공작 부인은 카이런 공자의 괴팍한 성격이 몸이 차가워서라고 곧잘 변명하곤 했다. 어린 아리엘사는 그걸 곧이곧대로 들은 것이다.

카이런 공자는 아리엘사를 어쩔 줄 모르고, 마치 충격을 받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 있었다.

지금의 나처럼.

카이런 공작은 나를 향해 씹듯 말했다.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입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가 하는 일이라면 다 받아주던 네가 나를 인간 말종이라고 하기에 나는 충격을 받았어. 너마저 나를 질책할 정도라면 내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네 말대로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세상에! 아리엘사는 성격이 나쁘다고 했지, 언제 인간 말종이라고……!

카이런 공작이 자기 말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면 아리엘사는 기함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소리를 주절거릴 수는 없었다.

“나는 차 맛에 적응하는 데 수년이 걸렸고 아리엘사는 내게 차를 타주면서도 자주 미안한 표정을 짓곤 했다. 그런 아이가 그 기억을 잊는다?”

과연 그것은 잊어버릴 만한 추억이 아니었다. 사람 사이에서 이런 중요한 경험과 기억이 사라진다면, 그때부터는 실제로 아는 사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카이런 공작이 내 수상한 행동을 모르는 척 해주기를 멈춘 것도 바로 그 지점이었다.

그래서 나를 미행했더니 글쎄 컴컴한 정원에서 이상한 소리를 내며 제자리에서 콩콩 뛰면서 진짜 집에 가겠다고…….

마물이 존재하는 이 시대라면 충분히 수상한 행동이었다.

카이런 공작을 설득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처음 맞닥뜨리는 그의 살기는 원작이 표현하던 묘사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도망가려 해도 다리가 떨어질 것 같지 않았고 머리까지 다 얼어버린 것 같았다.

“훗.”

그의 검이 내 목덜미에 닿자 피부가 시리다 못해 살이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내 손에 죽는 걸 자비로 알아라.”

그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대로 죽다니. 그것도 내 남주의 손에……?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 아니, 지금부터 시작인데!

나는 억울해서 소리쳤다. 이제는 아리엘사의 소심함을 가장할 이유가 없었다.

“아, 아, 아빠가, 저를 다치게 하면, 아빠는 돌아버릴 거예요!”

“그래. 네 정체가 무엇이든 자기 딸을 빼돌린 걸 알면 게오르그는 너를 맨손으로 짓이겨버릴 거야.”

아……. 그런 식으로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카이런 공작은 싸늘하게 말하며 검을 쳐들었다.

“공작님!”

나는 머리 위를 팔로 가리며 주저앉았다. 딱딱한 땅바닥에서 전해지는 한기가 공포 때문인지 추위 때문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다급히 소리쳤다.

“아리엘사는 없어요! 제가 아리엘사라고요!”

카이런 공작은 나를 잠시 가늘게 노려보았다.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나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무슨 소리지?”

“아리엘사가 사다리에서 떨어졌을 때……. 그녀는 그때 떠났어요.”

그의 표정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러나 아리엘사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는 음침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너는 뭐지?”

“저는 다른 세상에서, 저쪽 세상에서 왔어요.”

카이런 공작은 이를 갈며 대꾸했다.

“미친 소리.”

나는 빠르게 말했다.

“흉터요! 오늘 사냥에서 공작님은 말에서 떨어져서 흉터를 얻기로 되어 있었어요. 저는 그게 싫어서 막았고요.”

검을 든 그의 팔이 조금 느슨해졌다. 그도 내가 말 귀에서 도깨비 풀을 떼어내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알고 있었다.

그가 내가 자신을 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술자리를 빙자해 나를 떠보려는 행동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네가, 미래를 안다고 주장하는 건가?”

“저는 저쪽 세상에 있을 때 공작님의 삶을 보았어요. 끊임없이 버거운 적과 싸워야 하는 고된 삶이었지만, 공작님은 한 번도 포기하거나 물러서지 않았어요. 그래서 공작님을 좋아하는 거예요. 당신의 삶이 감동적이었기 때문에!”

나는 차마 이 세상이 소설이고, 창조주인 작가가 따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소설이라는 말로는 부정할 수 없으리만치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이 세계에서, 그 말은 어떤 인격에 대한 가장 가혹한 살해 방법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당신의 삶을 보았다고만 말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아니 차갑고도 은은한 빛 속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그런 말에 속으리라고 생각하나?”

“호수요. 공작님은 그 보트 사고로 물에 빠져서 죽을 뻔했어요. 겨우 헤엄쳐 나오지만 폐렴에 걸려서 사경을 헤매세요. 그때 황제 폐하는 공작님께 치료제를 보내시는데 거기에는 독이 들어 있었어요.”

나는 아차 하며 입을 다물었다. 아직 황제를 언급할 시기가 아니었다.

그는 고지식한 사람이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황제가 자신을 죽이려 함을 의심하는 걸 불경스럽게 생각했다.

역시 카이런 공작의 얼굴은 검게 굳었고 그의 팔에는 다시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검을 든 채로 내 앞으로 다가와 왼손으로 내 턱을 감아쥐었다.

그가 조금만 힘을 주면 내 턱은 으스러질 게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눈을 꼭 감았다.

“감히……. 누가 보냈느냐!”

그의 어조는 바뀌어 있었다. 이제 그는 내가 황제가 보낸 첩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울컥했고, 이제는 숨길 것도 없었다. 나는 내 온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저도 알면 좋겠어요. 저도 돌아가는 방법을 알고 싶어요! 하지만 그 방법을 모르는 이상은, 여기서 공작님이 행복해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요. 공작님이 그분과 사랑을 이루고 행복해지는 모습을…….”

카이런 공작은 나를 잠시 빤히 보더니, 코웃음을 치며 내 턱을 던지듯 놓았다. 나는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싸늘할 뿐이었다.

“사랑? 훗.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군.”

그랬다. 카이런 하르펠은 모든 것을 가진 남자였으나 피도 눈물도 없는 자였다. 지금 시점에는 특히 그랬다.

아마 그가 모든 것을 잃고 남부로 쫓겨나지 않았다면, 그의 가슴에는 영영 사랑이 들어올 자리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겪은 모든 고난은 아집에 사로잡힌 한 남자의 가슴에 진정한 사랑을 품을 자리를 깎아내는 과정이었는지도 몰랐다.

나는 서슬 퍼런 그를 보며, 그가 그동안 생각보다 무르게 보였던 것은 내가 아리엘사였기 때문임을 깨달았다. 그가 자기 시녀, 순둥이 소꿉동무에게만은 조금 물렀기 때문에.

나는 소리쳤다.

“있어요, 사랑! 당신은 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을 하게 될 거예요. 다른 건 다 거짓말이라고 해도 그것만은 부정하지 마세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그에게 고함을 질러버리고 씩씩댔다. 이 영지의 왕인 자에게. 그리고 내 목에 검을 겨눈 자에게.

카이런 공작은 그런 나를 얼어붙은 땅처럼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사납게 말했다.

“제가 공작님을 몇 번이나 구해드렸는지 기억해주세요.”

그라면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도 나를 늑대에게서 구해주었지만, 그래도 내가 그를 구해준 횟수가 더 많았다.

짧고도 긴 침묵이 흘렀다.

그는 마침내 검을 집어넣었다.

“너는, 아리엘사의 몸을 입은 다른 여자라는 것인가?”

“네.”

“내 미래를 알고 있고?”

“그렇습니다.”

“나를 도울 것이고?”

나는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대답했다.

“네. 그럴 거예요.”

“그거 편리하겠군.”

그는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턱을 쳐든 내 입김이 그의 얼굴 앞에서 흩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우리가 지나치게 가깝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나를 내려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이제부터 너는 내 소유다. 그 사실을 잊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의 차가운 웃음에 소름이 끼쳤다. 그 웃음에는 북부를 지배하며 마물을 토벌하고, 황제와 싸워 살아남아 사랑을 쟁취한 자의 잔인함이 담겨 있었다.

그가 아리엘사에게만 보여주지 않았던, 아니, 그가 아리엘사를 등진 채 세상의 다른 사람들에게만 드러내던 면모였다.

내 마음도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이제야 온전한 카이런 하르펠을 만난 것일까.

설핏 미소가 지어졌다.

내가 새로이 알게 된 그의 모습은 내가 원한 면모는 아니었다. 그러나 불쾌하거나 배신당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이게 그였기 때문이다.

카이런 공작은 내 미소에 잠시 얼굴을 굳혔다. 그러나 삐뚠 입매로 웃었다.

처음 만나는 우리 두 사람은 그렇게 인사를 나누었다.

“게오르그에게 비밀이 생겼군. 아리엘사.”

“네. 아빠에게 비밀이 생겼어요.”

“내일 아침에 집무실로 와. 다리가 잘리고 싶지 않으면.”

그는 망토를 펄럭이며 차가운 정원을 가로질러 돌아가 버렸다.

비틀거리며 내 방으로 돌아왔지만, 나는 다음 날 아침에 카이런 공작의 집무실에 가지 못했다.

내 몸이 불덩이였기 때문이다.

외투도 걸치지 않고 차가운 정원에 오래 있었기 때문인지, 그 상태로 죽을듯한 공포에 노출되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밤새 열이 올라서 끙끙 앓아야 했다. 아침에 나를 발견한 게오르그는 말 그대로 패닉을 일으켰다.

급히 불려온 의사 선생은 방 안을 쿵쿵거리며 왔다 갔다 하는 게오르그를 무심히 내버려 두고 ‘어허…….’ 하며 내게 약을 먹이고 있었다.

체이어스는 숙취가 심한 듯 제 이마를 짚고 인상을 쓰면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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